오늘 저녁 부산스럽게 서류를 찾고 있었다. 예전에 동사무소에서 떼어놓은 것 같아서 부동산 서류들을 뒤적여보았다. 무엇이든지 여분으로 준비해놓기 때문에 분명히 서류도 한 두 장은 더 있을 텐데… 그러다 찾아야 하는 서류는 찾지 못하고 ‘주민등록 초본’을 발견하게 되었다. 부모님의 신혼집부터 내가 결혼해서 이사한 집들의 주소들이 모두 나와있는 서류. 한 장에는 담을 수 없어 3장에 주소들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글을 쓰겠다는 마음을 먹고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하나씩 꺼내오다 보니 기억의 한 조각이었던 엄마의 웨건(지난 글을 보면 아실 것이다.)을 타고 돌아다닌 동네를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마침 주소가 나와 있으니 지도 앱으로 대신 가상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다.
목적지에 내가 살던 그 동네를 입력하고 로드뷰를 기다리는 그 순간 긴장감이 몰려왔다. ‘과연 그대로일까?’ 간절히 내 기억 속의 동네의 모습이기를 기대했다. 우리 집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작은 철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 있었다. 철문은 매우 엉성하여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에 깊은 울림이 생겼다. 철문을 열고 자전거를 두 대 정도 세워놓을 수 있는 벽을 지나면 우리 집의 진짜 현관문이 나왔다. 시멘트로 발을 디딜 수 있게 만들어놓았고, 그 돌을 딛고 올라가면 보통의 문보다 작은 문이 있다. 문을 열면 작은 주방 겸 수도꼭지가 바닥에 있고 미닫이 문을 하나 열면 단칸방 하나,그 것이 전부였다. 그곳은 네 식구의 따뜻한 보금자리였다. 화장실이 없었기에 철문과 현관문 사이의 공간(우리가 마당이라고 불렀던)에 엄마는 신문지를 깔아주었고 큰 일을 보았다. 우리가 아직 부끄러움을 몰랐던 나이라서 가능했다. 작은 일은 어떻게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요강을 활용했으리라. 처음 이곳에 이사를 올 때는 우리 집 옆 건물 상가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 어둡고 낯선 화장실이 무서워 엄마가 만들어 주는 신문지를 이용한 간이 화장실을 자주 애용했다. 엄마가 나의 대변을 보는 것이 미안하여 꼭 신문지로 덮어두고 늘 엄마를 불렀다.
내친김에 나는 초등학교 등교 길을 로드뷰로 가보았다. 약 400미터의 거리. 어린 시절 이 곳을 혼자 다녔다. 학교 가는 길에 털이 없고 깡 마른 개가 짖어대는 구간이 있어서 늘 마음을 졸이며 지나가던 길이었다. 나는 수줍음이 많았고 야무지지 못했다. 오전 오후반을 잘 구분하지 못하여 자주 지각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엄마가 시계 보는 법을 알려주셨다. 그래도 시계를 잘 읽지 못하여 2층에 사는 친구가 홀수 반이고 내가 짝수 반이니 반대로 하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2층에 사는 친구가 우리 집을 내다보면 우리 집 마당이 보였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신문지를 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지 못했다. 마침 나는 화장실이 번듯하게 있는 학교를 다니게 되었으니 엄마는 학교에서 볼일을 보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식은땀을 흘리고 허리를 세우지 못했다. 엄마는 나의 배가 빵빵 해진 것을 보고 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말했다.
‘어머님, 배에 똥이 가득 차있어요.’
그제야 엄마는 내가 그동안 학교에서 볼일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8살이 되어 마당에 화장실을 깔아주는 것도 싫어했던 나였기에 학교에서 볼일을 보고 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변비약을 먹고서야 복통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 뒤로 한동안 엄마는 건물의 공용화장실 안까지 나와 동행해주셨다. 다행히 한 해가 지나고 우리는 임대 아파트에 당첨이 되었다. 한 껏 넓어진 공간보다 화장실이 집 안에 있다니! 앞니가 빠져있던 나는 그 집을 보고 ‘천국’ 같다며 웃었다. 그리고 더 이상 학교 가는 길에 짖어대는 치와와도 없었다.
로드뷰에는 건물 사이에 위치한 옛 우리 집이 보인다. 그리고 소리가 울리던 철문이 그대로다. 다만 얼마 전에 칠을 했는지 때깔이 좋았다. 내 기억에는 우리 집 앞 골목이 실컷 놀 수 있을만큼 넓은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진을 보니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이었다. 그 골목, 우리 집 맞은편에 작은 슈퍼가 있었다. 아침에 나의 긴 생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주고 엄마는 보험회사에 출근했다. 초등학교 오후반 등교인 날에 학교 가기 전 남는 시간에 동생과 놀다가 머리가 한 올이라도 빠져나오면 울면서 엄마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그러면 엄마는 맞은편 슈퍼 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머리를 부탁했다. 나는 다시 정갈한 머리를 하고서 학교에 등교했다. 이제는 그 자리에 나의 삐져나왔던 머리카락을 책임져주던 슈퍼는 없고 한글로 읽히는 글자가 하나도 없이 중국어로만 된 간판만 보인다. 사진을 보니 양꼬치를 파는 식당인 것 같다. 이제 그곳은 먼 이국 땅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의 고향 음식을 곳곳에서 판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길에 러시아 식료품점, 방글라데시 식료품점이 보인다. 내가 뛰어놀던 어린 시절 골목은 옛 이름을 버리고 ‘다문화 거리’로 불리고 있다. 나의 기억 속 골목에는 이제 나의 어린 시절 언어 대신 세계 곳곳의 언어들이 채워지고 있다. 그곳에 누가 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나는 이제 화장실이 2개인 집에 산다. 나의 화장실은 따뜻하고 쾌적하다. 여행을 다닐 때에도 화장실이 쾌적한 곳만을 다닌다. 그리고 나의 아이의 배에는 똥이 차지 않는다. 어릴 때에는 우리가 왜 자주 이사를 다니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제 왜 3장의 초본이 있는지 알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마당에 근사한 야외 화장실을 만들어주었던 엄마 아빠의 노고에 나는 진짜 멋진 화장실을 가진 엄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