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이 품은 슬픔(416을 기억하며..)

아빠의 손가락

by 고밀도

머리를 채 말리지도 못하고 3100번 버스에 몸을 싣는다. 오늘은 아침부터 운이 좋다. 바로 내 앞에 자리가 났다. 출근 길에 애써 경쾌한 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치는 라디오 DJ의 목소리에 피곤이 묻어난다. 이어지는 오늘의 뉴스 코너. 제주로 향하던 큰 배가 물에 빠졌다고 했다. 타이타닉호처럼 영국에서 뉴욕으로 긴 여정을 가는 배도 아니고 단지 제주도를 가는 길이니 모두 무사하겠지 하고 가볍게 뉴스를 들었다. 제주도 앞바다에는 커다란 빙하도 없고 4월의 대한민국 날씨는 아주 온순하지 않은가. 3100번 버스는 강남역에 도착하여 참아왔던 숨을 한꺼번에 내쉬며 사람들을 토해냈다. 사람들은 경주라도 하듯 바쁘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같이 일하는 대리님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밀도 씨, 친정이 안산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큰일 났어요.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수학여행 가려고 저 배를 탔다고 하네요."


그 말에 휴대폰을 켜서 속보 뉴스들을 보니 정말 내 눈앞에서 배가 가라앉고 있었다. 아니, 저렇게 큰 배가 어떻게 가라앉을 수가 있지? 눈 앞에 펼쳐지는 상황이 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뉴스 상단에 실시간이라는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상상 속의 이야기처럼 ‘세월호’의 악몽은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2014년에는 내가 어린 시절을 대부분 보냈던 도시의 이름이 그 어느 해보다 많이 들리기 시작했다.


세월호를 기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안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왜 비행기가 아닌 배를 타고 제주도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는지 안타까운 사연들이 전파를 탔다. 자연스레 그 사연들은 나를 나의 어린 시절 안산으로 데려가 주었다. 내 인생 절반을 채운 ‘안산’. 서울로 대학을 가고서야 사람들이 어디에 사는지를 인사치레로 물어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안산에 살아요’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나와 다른 생각을 떠올린다는 걸 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산은 30년 전에는 만조 때 물이 들어오는 갯벌이 절반이었다. 국가에서 수도권의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해 1977년에 안산 단원구에 반월국가산업단지를 조성했다. 그 즈음에 부모님은 공단 옆에 주택들이 빼곡히 자리한 안산 원곡동에 자리를 잡았다. 화장실을 가려면 건물 공용화장실을 가야 했기에 배가 아프다고 하면 엄마는 신문을 널찍하게 깔아줬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옥색 타일이 깔려있는 작은 부엌 하나, 방하나가 전부인 집이었다. 아빠는 가까이 반월 공단에 위치한 가구공장엘 다녔다. 엄마 아빠는 안정적인 직장에 자리를 잡았다고 좋아하며 아빠의 첫 월급날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날씨가 화창했던 봄날, 동생과 놀이터에서 놀다가 집에 와보니 아빠는 멍한 얼굴로 방 한켠에 접어 놓은 이불에 기대어 있었다. 아빠에게 다녀왔다고 인사를 했지만 아빠의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손에는 커다란 붕대가 감겨 있었다. 부모님께서 다투실 때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을 느낀 동생과 나는 구석에서 조용히 TV를 보다가 책을 읽다가 했다. 그날, 저녁 엄마의 말없이 우는 등을 보았고, 아빠는 두꺼비 그림이 그려진 소주를 아무런 반찬도 없이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 봄에 아빠는 매일 술을 마셨고 혼자서 많은 말들을 내뱉었다 "나는 이제 병신이 됐어. 인생이 좆 같아. " 그러다가 "이게 다 너 같은 여자를 만났기 때문이야." 이렇게 이어지는 대화와 다툼 속에서 동생과 나는 이불을 덮고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그때 이불 속에서 나는 아빠의 손이 크게 다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모들과의 통화 속에서 사건의 조각들을 맞춰보았다. 아빠의 두 번째 손가락이 여분의 목재들을 프레스하여 합판을 만드는 기계에 빨려 들어갔고, 빨려 들어간 손가락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부서져서 봉합하는 시술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꽤 오랜 시간 하얀 붕대는 아빠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몇 계절을 보내고, 엄마는 아빠에게 손가락 하나를 선물해주었다. 다행히 둘째 손가락의 남겨진 한마디에 의수를 꽂으면 감쪽같았다. 다만, 가위바위보를 할 때 바위만 낼 수 없을 뿐이었다. 그 다음 해 2월, 나의 병설 유치원 졸업식에 아빠는 까만 가죽장갑까지 끼고는 멋지게 나타나셨다.


<출처:구글이미지>


초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아빠의 잘린 손가락’이라는 글을 썼다. 아빠는 두 번째 손가락이 없지만 나는 그것이 창피하지 않고 자랑스럽다고 썼는데 학교에서 상을 주었다. 나는 솔직하게 글을 쓰면 상을 주는 것인가 보다 생각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내가 쓴 글과 상장을 자랑스레 아빠께 보여드렸다. 아빠는 ‘잘했구나’라는 짧은 칭찬 외에 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아빠는 더 이상 손가락 의수를 끼지 않으셨다. 더 이상 손톱깎이를 찾다가 아빠의 의수를 보고 놀라는 일도 없어졌다. 그 서랍 속 의수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어색한 의수를 끼고 아빠는 꼭 검은 가죽장갑을 끼곤 했다. 의수없이 장갑을 끼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물거리던 두 번째 손가락이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매년 4월이 되면 내 기억에서 검은 가죽 장갑 속에 흐물거리던 두 번째 손가락이 단단해진다. 어린 시절의 안산의 기억도 생생해진다. 왜 하필 그 배였을까? 꼭 배 하나가 가라앉아야 했던 것이라면 왜 신은 그 배를 선택한 것일까? 경비를 아끼기 위해 배라는 이동수단을 선택한 그들의 삶이 나의 것 같았다.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유년시절에 다른 색깔이 입혀졌다. 내가 타고 있었던 안산이라는 배를 내가 오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때로 돌아가 세월호에 탔던 그들을 껴 앉아 줄 수는 없지만 나의 기억이 허락하는 한 세월호에서 내리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이 배에 똥이 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