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마지막 문만이 남았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가 생겼다. 가장 큰 문제는 자유롭게 내 방에서 VR 탐험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벌써 사흘째 접속 불가 상태였다. 아빠가 불시에 내 방문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사생활을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를 잃었다. 내가 잠들어 있을 때도 보고 갈지도 모른다. 아빠라면 내 방에서 몰래 CCTV를 숨겨놨을 수도 있다. 모두가 잠든 밤이라고 해도 이제는 내 방에서 접속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만약 VR 탐험 중 아빠가 들어와서 VR기기를 착용하고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발견한다면? 아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들킨다면 괘씸죄가 적용되어 가중처벌을 당할 것이다.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며칠간 아빠의 동선과 패턴을 집중해서 살폈다. 아빠가 출근하는 시간은 7시 30분. 가사 도우미는 6시 30분쯤 우리 집에 와서 식사를 차려둔다. 아빠가 먹을 동안 나의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나는 아침에 간단하게 토스트를 먹기 때문에 5분 안에 아침 식사를 끝낼 수 있다. 아침을 먹기 전에 미리 2층 화장실에서 외출 준비를 끝내 놓고 내려오면 시간도 벌어둘 수 있었다. 내가 식사를 마치면 가사 도우미는 주방과 집안 정리를 시작한다. 주방, 정원, 안방, 거실, 2층 순으로 정리하는 패턴이고 대략 40분이 소요된다. 그리고 내가 권 비서님을 만나는 시간은 8시 40분. 나에게는 40~50분의 시간이 확보될 수 있다.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계단 밑에 있는 창고에서 VR기기에 접속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며칠 동안의 관찰과 분석을 마치고 사흘 만에 접속을 시도하기로 했다. 반드시 30분 안에 빠져나와야 한다. 아침 식사를 위해 식탁에 앉기까지는 내가 예측한 흐름에서 변수나 오차 없이 잘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뜨거운 토스트를 입에 욱여넣고 가사 도우미의 눈을 피해 몰래 창고로 들어왔다. 정확히 시계는 7시 39분을 지나고 있었다.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가사 도우미가 만들어내는 적당한 소음이 임무 수행에 도움을 주었다. 창고 안의 상자를 미리 한 곳에 몰아서 누울 공간을 만들었다. 차분히 VR기기를 펼쳐두고 흰 약을 삼켰다. VR기기 장착하고 접속을 시도했다. 오랜만에 접속에 설레기까지 했다. 하지만 악몽을 탐험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어떤 고통의 기억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어둠 속에서 곧바로 내가 묶여 있는 당산나무를 찾아내고 홀로 덜컹거리는 마지막 문 앞에 섰다. 오늘 마지막 문을 다 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마법처럼 나의 기억이 되돌아올까?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끝까지 가봐야 한다. 이제는 요령이 생긴 나는 효율적으로 문을 열기 위해 몇 가지 시도를 해보았다. 문을 두드려 보기도 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변수 개체들이 있는지 찾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바닥에 떨어진 변수 개체도 보이지 않고 주머니를 뒤져봐도 그 어떤 것도 나오지 않았다. 벌써 문 앞에서 10분을 허비하고 있었다. 조금 초조해졌지만, 차분히 반경을 넓혀서 찾아보기로 했다. 시선을 주기 싫은 당산나무 쪽으로 이동해서 살펴보았다. 힘없이 매달려 있는 나를 될 수 있는 대로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당산나무 뒤쪽과 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있는 늘어져 있는 4가지 색의 천들이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부는 곳에 다섯 번째 문 앞이었다. 문 앞에는 바람에 살랑거리는 흰 원피스를 입은 마른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안개에 가려서 정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한눈에 엄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 짙은 안개가 덮여있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엄마를 알아봤을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엄마를 향해 달려갔다. 엄마가 나에게 달려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엄마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엄마도 나를 보았다. 나를 향해 웃어준다. 엄마에게 달려가는데 발밑에 컨베이어 벨트가 있는 것처럼 달려도 엄마와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갑자기 엄마와 나 사이의 공간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바쁘게 자기 갈 길을 가는 번화가의 인도로 변해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볼까 싶어 행동을 멈추고 서 있었다. 길거리에서 가해자가 튀어나와서 여기 있었냐고 내 머리를 다시 가격할 것만 같았다.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엄마가 사라지기 전에 엄마에게 가야 한다. 엉금엉금 기어서 사람들의 바삐 움직이는 다리 사이로 엄마의 가녀린 종아리를 발견하고 기어갔다. 엄마가 몇 걸음 앞에 있었다. 마음이 급해져서 일어나면서 손을 뻗었다. 내가 손을 뻗는 순간 엄마의 실루엣이 흩어져 버렸다. 그 자리에는 코드로 보이는 숫자와 알파벳들이 채워지고 있다. 나는 망연자실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엄마… 흑흑….”
그동안 참아왔던 그리움이 증폭되어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번 변수 개체로 엄마가 들어왔으니 내가 그 개체를 없애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문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도 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얼마만큼 슬픔에 빠져있었을까 알림이 울리자 내가 서 있는 것들이 무너져 내렸다. 어둠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나는 밴드의 EXIT 버튼을 눌렀다.
엄마에 대한 생각을 너무 깊이 했던 것일까? 엄마의 메모장이 나의 악몽 메타버스에 변화를 가져온 것일까? 문도 열지 못했고 엄마도 잡지 못했다. 컨디션을 다시 조절하여 이틀 뒤 다시 시도해 봐야겠다. 시계는 8시 15분을 향하고 있었다. 아직 안방을 청소 중이신 도우미 아주머니의 눈을 피해 2층으로 올라갔다.
접속을 쉬어야 하는 이틀 동안 최대한 엄마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혹시 그것이 변수가 되어 나의 무의식을 묶어 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문을 열지 못했고 흰 원피스를 입은 엄마가 나타났다. 그 순간에는 지난번 탐험 때의 결과는 기억하지 못하고 다시 엄마를 쫓다가 어둠으로 떨어졌다. 우연이 아닌 것 같았다. 이틀 뒤에도 역시 상황은 같았다. 마지막 한 개의 문을 남겨두고 나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분명 어떤 오류가 생긴 것이었다. 자명을 다시 만나야 했다.
다음 날 무작정 그때의 주소로 찾아갔다. 하지만 철거 예정이라는 딱지가 여기저기 붙어있고 집은 비어있었다.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한 모양이었다. 물어볼 사람은 이제 동제밖에 없었다. 지난번 일탈로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은 들었지만, 부탁을 하기에는 망설여졌다. 그래서 동제를 거치지 않고 이곳으로 바로 왔는데 헛걸음을 했다. 다시 택시를 타고 학원으로 돌아갔다. 나는 쉬는 시간에 동제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던 동제는 내가 다가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나도 동제의 방법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똑똑.
“어, 미안. 음악을 크게 틀어놨어. 무슨 일?”
“형, 커피 한잔 마시러 가요.”
동제는 흔쾌히 나를 따라나섰다. 학원 옆에 있던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혹시 지난번에 연결해 주셨던 곳 다시 약속을 잡을 수 있을까요? 조금 전에 찾아갔더니 이사를 한 것 같아요.”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지금까지 탐색을 잘해왔는데 계속 같은 오류가 생겨요. 몇 번 시도해 봤는데 같은 장면이 반복되고 더 나아가질 못하고 있어서요. 왠지 한 발만 더 나아가면 악몽이 해결될 것 같은데……”
“알았어. 그렇다면 내가 다시 연락을 취해볼게. 커피 고마워.”
동제는 나랑 커피를 마시고 난 이후 쉬는 시간에는 복도에서 계속 통화를 했다. 아무래도 자명과의 약속을 다시 잡으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수업이 끝나기 전에 바로 나에게 쪽지를 전달해 주었다. 동제는 혼자 갈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문제없다고 대답했다. 이런 문제까지 동제를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나의 진짜 모습을 동제가 아는 것도 싫었다. 쪽지에는 새로운 주소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바로 내일 만날 수 있었다. 하루빨리 오류를 해결하고 마지막 문을 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지난번 동네와는 전혀 다르게 빌딩 숲이 즐비한 곳이었다. 진성학원과도 거리가 꽤 가까웠다. 이동 시간이 줄어들어 좋았다. 모두 비슷하게 생긴 건물들 사이에서 쪽지에 적힌 건물을 찾느라 진땀을 뺐다. 점심시간이라 로비는 복잡했다. 복잡한 로비를 지나서 34층으로 올라갔다. 오른쪽으로 문이 하나 보였다. 안이 보이지 않게 검은 시트지가 붙어져 있었다. 온통 까만 문 한쪽에 은색의 벨이 보였다. 벨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문이 딸깍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지난번 방문 했던 곳과 위치만 달랐지 온통 블랙에 음산한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바닥에 라이트가 하나씩 켜지면서 길을 안내해 줬다. 라이트가 켜진 곳 외에는 다른 곳은 길이 보이지 않아서 발걸음을 다른 쪽으로 옮길 수도 없었다. 라이트를 따라 안쪽으로 쭉 들어가니 커다란 공간이 나왔다. 자명의 컴퓨터와 개조한 안마의자, 설명을 듣던 탁자와 의자가 그대로 배치되어 있었다. 자명은 나를 힐끔 보고 묵직한 헤드셋을 내려놓았다. 썩 유쾌한 얼굴은 아니었다. 이렇게 다시 찾아오는 고객들이 많지 않은가 보다.
“고객님, 저희 제품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우리가 배달 사고 외에는 이렇게 오류가 났다고 다시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며칠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설계해 주신 공간에서 잘 탐색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 엄마가 계속 나타나더니 손을 대면 숫자랑 알파벳으로 변하더니 계속 제가 있던 공간이 무너져요.”
나는 준비해 온 현금 뭉치를 내밀었다. 대놓고 현금을 들이밀면서 간절하게 부탁하자 자명의 표정은 제법 친절해졌다.
“뭐, 돈 때문에 그런 것 아니고 사정이 딱해서 살펴 봐줄게요. 더 자세히 설명해 봐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버그 같은데…… 일단 잠깐 기다리고 있어요.”
자명은 빠른 손놀림으로 수많은 데이터에서 나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아, 코드명 자명이었군.”
자명은 나를 안마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나는 테스트할 때의 기억이 나서 잠시 망설였다. 자명은 오늘은 그런 테스트는 없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했던 것처럼 나의 머리와 이마, 심장 쪽에 패치를 붙이고 신호를 분석했다. 자명은 그때보다 살은 조금 더 붙은 거 같았지만 키보드를 치는 손놀림은 여전히 민첩했다. 자명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내가 앉아있는 탁자로 의자를 끌어왔다. 그리고 태블릿에 화면을 띄워서 나에게 보여줬다.
“아 여기 좀 보세요. 지난번 기본값 세팅할 때도 좀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게 기억났어요. 뇌파가 깨끗하지 않고 잡다한 신호가 많이 잡히더라고요. 다중인격을 가진 분들에게 가끔 나타나는 신호라서 굳이 묻지 않았죠. 제가 다중인격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신호를 최대한 깔끔하게 잡는 소스를 추가로 투입해서 처리했거든요. 소스도 투입이 잘되지 않아서 꽤 애먹었지만 바로 당일 지불하셔서 특별히 추가 요금은 받지 않았던 거예요. 근데 오늘 신호를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기억을 담당하는 이 회백질 쪽에서만 신호가 조잡해요. 일반적이지는 않아요. 마치 여러 사람의 뇌파의 코드 값이 섞여 있는 것 같아요. 이쪽이 조잡하다는 것은 일부러 다른 사람의 기억을 심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데……이상하네요. 근데 최근 의사들이 의식이 없거나 기억을 잃은 사람을 치료한답시고 이것저것 말도 안 되는 시도를 하기도 해서 이렇게 엉망이 되는 경우도 아주 드물게 있긴 해요. 이러다 기억 엉키면 큰일인데 돌팔이 의사들이 가끔 그렇게 하기도 한대요. 현실과 가상이 엉켜서 구분을 못 하게 될 수도 있는데.”
자명은 의사들을 경계하는 말투로 혀를 끌끌 찼다.
“병원에서 따로 뇌파 치료를 받은 적은 없어요. 아, 혹시 제가 이런 탐험을 하고 있다는 걸 검사로 알아낼 수도 있어요?”
나는 아빠가 어떻게 알게 됐는지 궁금해졌다.
“일반적인 장비로는 절대 알 수 없고 저랑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쓰는 특수 장비를 구동시키는 칩이 있는데 그게 있으면 가능하죠. 근데 거의 알 수 없다고 봐야죠.”
“일단 버그를 없애주세요. 탐험을 반드시 끝까지 해야 해요.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아요.”
“반드시 내가 말한 모든 규칙을 철저하게 지켜서 탐험해야 해요. 조금만 선을 넘어도 모든 게 꼬여버릴 수도 있어요. 그리고 최근에 본 것은 엉킨 코드들이 만들어낸 버그 같아요. 버그는 쉽게 잡혀요. 버그를 무시하도록 만드는 소스를 입력하면 끝인데, 지금 상충하는 뇌파 신호들이 한 부분에서 엉키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버그가 생길 수도 있어요.”
자명은 기술을 잘 모르는 내가 이해하기 쉽도록 잘 설명을 해줬다. 그리고는 오늘 VR기기에 업로드를 하라고 작은 칩 하나를 주었다. 칩을 삽입하면 자동으로 버그를 잡아줄 거라고 했다. 나는 칩을 잃어버리지 않게 가방 안쪽 주머니에 잘 챙기고 건물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