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문을 열고 난 뒤 나는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 이 위험한 탐험을 시작한 내가 원망스러웠다. 잠잠하게 살아갈 수 있었는데 내가 또 못난 짓을 자처하고 말았다. 아무리 그것이 가상이었다고 하지만 너무 치욕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약해빠지고 못난 새끼라고 욕하는 것은 참아줄 수 있지만, 우리 엄마가 그런 모욕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문을 열고 싶어 하는 나의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엄마를 욕보였다. 못난 내가 하이에나의 개가 되고 피해자였기 때문에, 그때도 악몽 속에서도 엄마는 듣지 않아도 될 모욕을 들어야 했다. 엄마에 대한 모욕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내뱉어져서는 안 되는 문장이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원에서 수업내용은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가까운 곳에 앉는 동제도 거슬렸다. 동제가 나를 그 길바닥에서 발견하지만 않았더라면, 동제가 자명을 소개해주지 않았더라면, 나 혼자 악몽을 감당하면서 살아갔을 것이다. 어떤 것 하나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기억을 되살리려는 것은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가정들을 통해 후회를 곱씹었다.
바다를 건너겠다고 다짐했지만, 망망대해의 중간에서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뒤를 돌아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앞으로 가면 육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수면 아래에서는 식인상어들이 내가 포기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가? 나는 그 어느 세계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악몽의 메타버스에서도 현실에서도 나는 길을 잃었다. 다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내가 시작된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곳에서 다시 태어나서 그 어떤 흠집도 없는 완벽한 인생을 살아 내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갈 수 있는 엄마의 자궁이 없다. 엄마가 없다. 시발. 엄마 나를 버리고 가면 어떻게 해.
나도 모르게 식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나를 두고 떠난 엄마가 미웠다. 우리는 서로밖에 없었는데 엄마가 나를 버리고 떠났다. 엄마를 증오한다. 호흡이 가빠졌다. 식탁 위에 놓여 있는 박하사탕 유리병으로 시선을 돌렸다. 엄마의 흔적이 다를 미치게 했다. 유리병을 머리 위로 힘껏 들어서 바닥으로 던졌다. 하얀 박하사탕들이 눈알처럼 바닥에 사방으로 굴렀다. 엄마를 다치게 한 것 같아 머리를 부여잡고 짐승처럼 울었다. 주방에서 아침 준비를 하던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가 놀라서 다가왔다. 마치 정신병자라도 본 듯한 눈빛. 유리병의 파편 하나가 튀어 손등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걸림돌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의 긴급 연락으로 나의 이상행동에 대한 조치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권 비서님이 집으로 달려왔다. 검정고시 학원에는 몸이 좋지 않아 결석이라고 연락을 하고 담당 의사와 긴급 면담을 잡았다. 나는 무기력하게 권 비서님의 조치에 순응했다. 집을 정리하고 나를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백미러로 내가 괜찮은지 가끔 나를 살펴보면서 운전을 했다.
“권 비서님, 엄마가 저 때문에 많이 아파했어요?”
나의 질문에 당황한 듯했다.
“사모님을 잘 아시잖아요. 정민 군이 아프면 자기 일처럼 아파하셨죠. 이제 고통 없는 곳에 계실 거예요.”
“거기에는 저 같은 아들이 없으니 편했으면 좋겠어요.”
나 때문에 모욕당한 엄마. 나 때문에 아빠랑 참고 살아간 엄마. 나의 고통으로 인해 더 큰 고통을 느낀 엄마. 슬픔이 사라지지 않고 증폭되어 가고 있었다. 힘없이 창밖을 보는 와중에 병원에 도착했다.
담당 의사는 먼저 나의 상태부터 점검했다. 한눈에 봐도 나는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의 혈압, 체온, 눈 속부터 입안까지. 그들은 내가 지랄 발광한 이유를 샅샅이 찾아내는 탐정이 되었다. 간호사들에 의해서 입력되는 숫자들을 멍하니 보고 있었지만, 그것들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차트를 들여다보더니 뇌파검사와 뇌에 대해 정밀검사를 하자고 했다.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모든 것을 그들이 하자는 대로 흐름에 맡겼다.
머리에 패치 여러 개를 붙이고 누워있었다. 누워있는데도 심장이 쉴 새 없이 펌프질 했다. 나의 감정과 상관없이 눈물이 흘렀다. 나는 분명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왜 눈물이 흐르는 거지? 차가운 기계들이 나를 탐색하고 있는 동안 나는 모든 것을 멈추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받았던 고통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담당 의사는 검사 결과가 떠 있는 화면을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정민 군, 아직도 악몽을 꾸고 있나요?”
대답을 잘해야 했다. 지난번 거짓말이 들통나기 직전이었다.
“아뇨, 이제 악몽은 사라졌어요.”
“근데 잠은 여전히 충분하지 않은 것 같네요. 그리고 혹시….”
담당 의사는 말을 하려다 멈췄다. 혹시 악몽의 메타버스를 탐험하고 있냐고? 그걸 눈치를 챈 건가? 선생님. 묻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는 이제 탐색 따위 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더는 나의 기억을 찾으려는 오만을 부리지 않겠다. 나의 뇌가 기억을 지운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때 담당 의사가 망설이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면 나는 자포자기하고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깊은 질문은 하지 않고 겉도는 몇 가지 질문만 던지고 상담을 끝냈다. 지금은 쉬는 게 낫다고 결과가 나오면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나에게는 안정제를 처방해 주었다. 권 비서님은 나를 집에 내려다 주고 아빠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다시 회사로 향했다. 나는 저녁도 먹지 않고 캄캄한 방에 혼자 누워있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캄캄한 방에 갑자기 환한 불빛과 함께 진동이 왔다. 또 협박 문자인가 싶어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권 비서님의 문자였다.
[문자] VR기기 빨리 숨겨요. 10분 전.
문자에 다급함이 느껴졌다. 숨기라는 말은 아빠가 그것을 찾아낼 것이라는 뜻이었다. 아빠는 왜 VR기기를 찾는 걸까? 담당 의사가 눈치챘다면 아빠의 귀에도 당연히 들어간다는 것을 간과했다. 아빠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나의 입장이 달라져야 한다. 솔직해질 수 없다. 나의 변명을 들어보기도 전에 내가 파멸될지도 모른다. 일단 이 공포를 해결해야 한다. 최대한 이성을 되찾고 숨길 곳을 찾았다. 침대 밑은 뻔했다. 옷장 속? 내 방에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아빠는 찾아낼 것이다. 일단 내 방이 아니어야 했다. 알약과 VR기기와 부품들을 박스에 담아서 내 방을 나섰다. 권 비서님은 신호대기 중에 몰래 문자를 보냈을 것이다. 10분 안에 아빠가 도착할 것이다. 신호에 걸리지 않는다면 7분도 가능했다. 나는 1층으로 내려와서 숨길 곳을 찾아 헤맸다. 1층은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이곳은 아빠의 주 활동지였다. 눈썰미가 예리한 아빠는 작은 변화도 감지할 것이다. 이리저리 헤매다 계단 아래쪽의 작은 문을 열어 창고에 숨었다. 몸을 완전히 반으로 접어야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 아빠가 이런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찾는 곳은 아니었다. 이곳은 문을 통과할 때 불편함만 감수하면 작은 방처럼 넉넉한 공간이 나온다. 평소 잘 쓰지 않는 물건들을 쌓아놓는 곳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버려질 물건들이 쌓여있었다. 문을 통과하여 허리를 펴고 창고를 둘러보았다. 엄마의 옷가지와 사용하던 물품들이 다 여기 있었다. 그동안 엄마의 유품은 어디 있는지 궁금했지만, 누구에게도 묻지 못했는데 내가 매일 오르고 내리던 계단 아래에 있었다. 아빠는 엄마의 물건들이 원래 있던 공간에서 애도할 시간도 없이 신속 정확하게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 엄마의 냄새가 남아있는 물건들이 이렇게 쫓기듯 창고로 보내졌을 것을 생각하니 목이 막혔다.
일단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상자에 VR기기를 숨기기로 했다. 위험은 최소한으로 만들어야 하는 법, 만일의 대비하여 상자의 맨 밑바닥에 넣어둔다. 아빠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했을 때 상자에 있는 물건까지 꺼내어 찾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상자에 있는 물건들을 꺼냈다. VR기기가 담긴 상자를 맨 아래에 넣고 그 위에 다시 물건을 때려 넣으려고 했다. 상자에서는 엄마가 가지고 다니던 카드지갑, 쓰다 반쯤 남은 향수, 꽃 사진이 있는 엽서들이 나왔다. 엄마의 서랍에 있던 물건들을 담아두었나 보다. VR기기를 제일 밑바닥에 넣어두고 마구잡이로 물건들을 다시 상자에 넣었다. 시간이 없어서 한쪽 팔로 물건을 가득 들여 상자 안으로 넣었다. 그때 툭 하고 노트 하나가 옆으로 떨어졌다. 떨어지면서 검은 볼펜으로 종이가 뚫리도록 낙서한 페이지가 펼쳐졌다. 엄마의 메모장이었다. 나는 일단 이 메모장을 티셔츠 안쪽 배에 숨기고 방으로 올라왔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내 방으로 향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보이려고 책상에 문제집을 펼쳐놓고 앉았다. 내가 숨을 쉴 때마다 같이 움직이는 엄마의 메모장에 온 신경이 쏠렸다. 서랍에 두는 것보다는 내 배가 안전했다. 잠시 이 메모장을 왜 가지고 왔을까 후회했지만, 엄마의 흔적이 나에게는 간절했다. 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창밖에서 들렸다. 후하. 심호흡을 했다. 아빠는 나에게 곧장 달려올 것이다. 나무처럼 단단히 나를 지키자. 아빠는 방문을 열면서부터 욕을 해댔다.
“이 새끼가 제정신이야? 너도 엄마처럼 죽고 싶어 환장한 거야?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게 더 낫다고 말했지. 그거 어디에 놨어. 당장 꺼내. 나 몰래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었던 거야.”
아빠는 나를 밀치고 책상 서랍을 뒤지고, 내 가방을 뒤집어 물건들을 모두 꺼냈다. 옷장도 무사하지 못했다. 모두 꺼내어 바닥에 내던지고 있다. 그의 분노가 멈추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 VR기기를 순순히 건네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의 뇌까지 터뜨려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악몽보다 더 악몽 같은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당장 가지고 와.”
아빠는 내 멱살을 잡았다. 나는 책상 의자에 앉은 채로 멱살이 잡혀있다.
“뭘요?”
“뭘요? 어디서 눈을 뻔뻔스럽게 뜨고 모르는 척을 하는 거야! 그 VR 모두 내놔.”
아빠는 있는 힘껏 내 얼굴을 후려쳤다. 아빠의 두툼한 손이 닿자 의자까지 휘청거렸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퍼졌다. 입술이 터진 것 같았다. 아빠의 눈은 반쯤 돌아가 있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아빠의 이런 모습을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지금 이 눈빛은 대치하면 절대 안 되는 것이다. 살짝 힘을 풀고 약간의 억울함을 가미한 순진한 얼굴로 태도를 전환했다.
“게임하다가 싫증이 나서 팔았어요. 진짜예요. 게임 몇 번 한 것밖에 없어요.”
나는 살기 위해 연기를 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 상황은 끝나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다. 차라리 모자라고 철없는 열아홉 살이 되는 게 낫다.
“이제 저도 제대로 살 거라고요.”
나는 책상에 펼쳐놓은 문제집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제야 아빠는 나를 때린 손의 열기를 인지하고 나를 내리쳤다는 미안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철썩 소리와 함께 벌겋게 부풀어 오른 내 얼굴이 그제야 보였는지 차츰 아빠의 호흡이 안정화됐다.
“게임이 됐든 뭐가 됐든 VR기기 같은 이상한 물건이 내 눈에 보이면 안 된다. 그리고 마지막 경고다. 기억 같은 거 찾으려고 하지 마. 무조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아빠는 옷이 헝클어진 상태로 내 방을 나갔다. 아빠가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고 화를 내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았다. 무엇이 아빠를 저렇게까지 분노하게 했을까? 내가 기억하려고 애쓰는 모습에 분노가 치민 것일까? 아빠도 지난 기억을 다 잊고 싶은데 내가 들쑤셔서 그런 것일까? 무엇 하나 정확한 게 없었다. 모두 추측일 뿐이었다. 나는 현실에서도 악몽에서도 안개가 깔린 길만 걷고 있었다.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서 침대로 걸어갔다. 툭. 배에서 메모장이 떨어졌다. 엄마의 메모장을 잊고 있었다. 바지 사이에 잘 끼어놨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툭 떨어지다니, 아빠랑 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메모장 표지에는 ‘2027년 5월~’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깨어나지 않고 있던 5월부터 메모가 시작되었다. 엄마는 평소에도 얇은 노트에 많은 생각들을 쏟아냈다. 일기장처럼 사용하기도 하고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이나 때로는 아빠에 대한 분노를 적어 놓기도 했다. 엄마가 나의 일기장을 몰래 보듯 나도 이따금 엄마의 서랍에서 노트를 훔쳐보곤 했다. 내가 집을 비운 사이, 혹시 엄마 아빠가 싸운 것은 아닐지 단서를 찾을 때도 있었고, 엄마의 기분이 저기압일 때에도 이유가 궁금해서 메모장을 들춰보고는 했다. 엄마는 내가 누워 있을 때도 메모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처음 만져보는 엄마의 유품이었다.
노트는 볼펜을 꾹꾹 눌러썼는지 말려있는 부분이 많았다. 군데군데 찢긴 부분들도 많아서 엄마의 감정 상태가 불안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날짜는 적혀 있지 않았다. 글씨의 글씨가 겹쳐서 새까맣게 된 메모들이 대부분이었다. 무언가를 강박적으로 계속 적고 있었던 것 같다. 중간에는 글씨인지 낙서인지 알 수 없지만, 힘껏 무언가를 쓰는 바람에 뒷장까지 구멍이 뚫려있었다. 미친 듯이 원만 그려진 페이지도 보였다. 엄마는 고통을 견뎌내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앞쪽 페이지는 강박의 낙서가 덜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알아볼 수 있는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마치 왼손으로 글씨를 쓴 듯 글씨들이 비틀거리고 불안정했다.
[메모] 악마 같은 자식.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악마.
이런 악마와 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지옥이고 고통이다.
똑같은 고통을 느껴야 한다.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엄마는 나를 이렇게 만든 개자식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기억을 잃고 누워있는 나를 보면서 엄마는 고통을 견디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누구도 공감해주지 않는 고통을 이렇게 홀로 견뎠다. 뒷장으로 넘겼다.
[메모] 견딜 수가 없다. 차라리 이 모든 기억이 지워져 버리면 좋겠다.
자다가 영영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다. 기억이 고통스럽다.
그 악마 같은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엄마의 문장은 온통 분노로 가득했다. 그중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글씨들이 절반이 넘었다. 눈에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엄마의 비틀거리는 글씨는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엄마의 너덜거리는 메모장만큼이나 너덜거렸을 엄마의 마음은 이해가 되었다. 내 침대 머리맡에서 힘겹게 한 글자씩 분노를 표현했을 엄마 생각에 마음이 터질 것 같았다. 엄마의 고통이 실체화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조금 전까지 그만두고 싶었던 마음이 모조리 사라졌다. 나는 끝까지 가야 했다. 악마 새끼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해 낼 때까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다음 날 학원으로 향하는 차 안이었다. 입꼬리 부분이 터져서 반창고로 가릴 수도 없었다. 누가 봐도 맞아서 생긴 상처처럼 보였다. 상처를 핑계로 학원을 쉴까도 생각했지만 이런 분위기일수록 평소대로 행동하는 것이 유리했다. 아빠 눈에 튀어 보이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럼 아빠는 그때 찾기를 포기한 VR기기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낼 수 있는 위인이다. 아침에 내 얼굴을 본 권 비서님은 나를 걱정했다. 권 비서님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어젯밤 퇴근길에 담당 의사와 아빠가 통화했고 통화 이후 아빠가 몹시 불안정하고 화가 많이 난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대화 도중에 VR기기, 뇌파, 악몽 등의 단어를 들어서 일단 VR기기를 숨기라고 나에게 문자를 보낸 것이었다. 권 비서님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제부로 나의 기행이 끝날 수도 있었을 텐데 위기를 모면했다. 이제는 나의 기행을 멈출 수가 없게 되었다.
어떤 정보를 아빠가 알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기억을 되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아차렸다. 어젯밤 아빠는 멈추라는 경고의 메시지는 명확히 전달한 셈이다. 마지막 경고라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엄마의 메모장은 나에게 멈추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이번만큼은 엄마의 손을 들어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