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쯤에서 멈춰야 하는지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하는지 수천 번을 생각하느라 밤을 지새웠다. 잊힌 고통을 마주할 것인지, 이대로 심연에 드리운 안개와 함께 살아갈 것인지 갈팡질팡했다. 접속을 끊고 나서도 꿈속에서 봤던 장면들이 계속 떠오르면서 나의 심장을 조여 왔다.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모두 고통을 가져다줄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행복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모두 고통을 수반한 길이지만 무엇을 더 견딜 수 있는지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우연히 가해자를 마주치더라도 가해자인지도 모르고 그들을 향해 웃어주는 내 모습을 견디기 어려울까? 먹이사슬의 가장 밑바닥의 기억을 되찾아서 고통받던 날들의 내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더 견디기 어려울까? 그날 수업 내용은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업이 끝난 줄도 모르고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누가 내 책상을 똑똑 두드렸다. 동제였다.
“혹시 악몽은 잘 해결됐어?”
“아 네, 아직이요. 그래도 소개해준 곳이 꽤 믿을만한 것 같아요. 사실 병원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중이었어요. 고맙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목요일에 만나러 갔던 것 같은데 오늘도 피곤해 보여서 궁금했어.”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힘든 것 같아서 악몽을 그냥 둬야 하나 최대한 해결해봐야 하나 싶더라고요.”
“그 고민을 하느라 내가 처음 불렀을 때 못 들었구나. 이럴 때는 몸을 좀 움직여야 해. 혹시 괜찮으면 코인 야구나 하러 갈래? 스트레스 쌓일 때 가끔 가거든. 바로 옆 골목에 있어.”
몇 개월 동안 항상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몸을 크게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어제 VR 탐험과 악몽의 여파로 몸이 찌뿌둥했다. 그리고 동제의 말에는 거절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나는 흔쾌히 동제를 따라나섰다. 권 비서님한테는 30분 정도 늦는다고 문자를 보내두었다.
동제는 이 주변을 자주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옆 골목 코인 야구장으로 향하는 길을 매끄러운 동선으로 이동했다. 지난번 커피를 얻어 마시기도 해서 야구 게임 비용은 내가 내려고 했는데 현금이 없었다. 동제는 괜찮다고 주머니에서 만원을 꺼내어 익숙하게 동전으로 바꾸고 나에게도 몇 개를 건넸다. 나란히 야구공을 치러 들어갔다.
내가 들어간 칸에 세워진 야구 방망이를 보니 마음에 동요가 왔다. VR 탐험에서 내가 손으로 쥐었던 방망이랑 비슷해 보였다. 군데군데 칠이 벗어지기는 했지만 크기도 무게도 비슷했다. 먼저 게임을 시작한 동제는 마치 야구선수처럼 날아오는 공들을 쳐냈다. 야구장이었다면 분명 홈런이었을 것 같았다. 나도 날아오는 공들을 집중해서 쳐 보려고 했지만, 내 몸이 마음대로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나에게 날아오는 공들이 무섭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약한 모습을 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특히, 동제에게는 더욱. 동제는 게임을 먼저 끝내고 뒤에서 나를 지켜보았다. 동제가 지켜보고 있으니 남자답게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욱더 긴장했다. 한두 번은 그런대로 잘 맞았는데 대부분 헛방망이질을 했다. 더는 날아올 공이 없다는 것이 반가웠다. 그제야 안심하고 내려왔다.
“이것도 하다 보면 늘어.”
동제는 내가 민망하지 않도록 내 핑계를 대신 말해주었다.
“형은 많이 해보셨나 봐요. 자세가 좀 달라 보였어요.”
“나? 실은 야구선수였어. 학교 그만두기 전까지는 그랬지. 근데 선수처럼은 못 쳐. 발목을 한번 다쳤는데 완전한 회복은 안 되더라. 자세가 좀 그럴듯해 보이지. 몸이 자세는 기억해서 그래. 머리로는 야구를 다 잊은 것 같은데 몸은 마지막까지도 기억하고 있어.”
운동했었구나. 어쩐지 동제는 앉아있을 때나 서 있을 때나 늘 균형 잡힌 자세였다. 대체로 운동선수들은 강자그룹에 속했다. 동제는 나와는 다른 부류였다. 그의 자신감과 사교성에는 이유가 있었다. 갑자기 전에 없던 거리감이 느껴졌지만, 아직 나의 본모습을 들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정도 친분은 유지하며 지내도 좋을 것 같았다. 설사 내가 초식동물이라고 해도 동제는 강자처럼 군림하지 않을 것이다.
동제의 몸이 마지막까지 야구를 기억했듯이 정말로 기억의 마지막 종착지는 몸일까? 내 몸은 아직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게 사실이라면, 가해자들이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내 몸은 반응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내 눈은 그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도 내 몸은 반응할지도 모른다. 그들 앞에서는 몸이 경직되고 심장이 뛰고 어쩌면 오줌까지 지려버릴지도 모르지. 하, 아니다. 전혀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람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나의 선택은 뚜렷해졌다. 기억을 되찾는 고통이 좀 더 견딜만하다고 생각했다. 동제와 다시 학원으로 걸어오다가 권 비서님을 만날 시간이 되어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일단 끝까지 가보기로 마음먹자 기다림이 쉽지 않았다. 자명의 말대로 24시간이 영겁의 시간 같았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반가웠다. 고통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내가 살아있다는 방증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마도 아직은 그것이 나의 진짜 기억이라고 확신하지 못해서 일수도 있다. 아직은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뚜렷해지겠지.
오늘은 반드시 30분 안에 탐험을 끝내기로 다짐했다. 꿈속의 또 다른 정민을 구하기 직전이라고 하더라도 신호가 오면 반드시 EXIT 버튼을 누르자. 그래야 안전하게 끝까지 다섯 개의 문을 열 수 있다.
오늘은 바로 눈앞에 다섯 개의 문이 펼쳐졌다. 아직은 닫혀 있는 덜컹거리는 세 개의 문 앞으로 갔다. 이제는 나무에 매달린 내 모습을 가뿐히 무시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세 번째 문 앞으로 곧장 직행했다. 내가 가까이 가자 요동치던 문이 가라앉았다. 고요했다. 어제는 분명히 없었던 손잡이가 생겼다. 금색의 손잡이였다. 손을 뻗어 잡아보았다는 너무 차가워서 손이 그대로 얼어버릴 지경이었다. 손잡이가 있지만 손잡이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급한 대로 두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아서 손잡이를 녹여 보려고 했다. 하, 하, 입김을 내뿜었다.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지금 다시 손잡이를 잡으면 손이 부어서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내 무의식의 코드들이 변수 개체를 만들어내도록.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다시 문 앞으로 왔는데 아까는 없던 호루라기 하나가 걸려있었다. 호루라기를 문고리에서 빼내어 불어보았다.
삐빅-
그러자 마치 안에서 누군가 문을 열어준 것처럼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물이 잔잔하게 흐르는 소리가 들렸고 눈앞에 커다란 징검다리가 반대편을 향해 쭉 이어져 있었다. 물소리가 어디서 들리는 것인지 쉽게 분간이 되지 않았다. 징검다리를 하나씩 하나씩 밟고 건너갔다. 어느새 징검다리 밑은 강으로 변해있었다. 물소리의 출처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강의 폭이 엄청 넓다고 생각했다. 꽤 많은 징검다리를 건너왔는데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앉아서 물에 손을 담가 온도를 확인해 봤다. 물은 꽤 차가웠다. 몸이 점점 으슬으슬해지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났다. 20개의 징검다리 떨어진 곳에 기산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은 남자가 발로 물 쪽에서 첨벙거리는 쪽을 내리치고 있었다. 한 칸씩 가까이 가보니 한 사람이 물속에서 살려달라고 허우적거렸다. 그런 남자를 구해주기는커녕 짓밟고 있었다. 저 사람이 가해자일 것 같다는 생각에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징검다리 사이에 빠지지 않도록 집중하며 달렸다. 남자는 내가 가까이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이 새끼야. 그만 두지 못해.”
나는 소리를 지르면서 더욱 속도를 내서 달렸다. 그 자식은 나를 발견하더니 반대편으로 도망갔다. 계속 쫓아가려고 했지만 일단 허우적거리는 사람부터 구해줘야 했다. 나는 손을 뻗기 위해 앉아서 한 손을 징검다리 모서리를 잡고 한 손을 허우적거리는 사람 쪽으로 내밀었다. 손을 내미는 순간 그 사람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첨벙거리던 강물이 투명한 얼음으로 바뀌었다. 물 안으로 손을 넣을 수가 없어졌다. 얼음이라는 장벽이 생겼다. 입에서는 하얀 김이 나오고 있었다. 급속도로 기온이 내려가고 있었다. 투명한 얼음 위로 올라갔다. 그 사람을 아직은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얼음에 엎드려 표면을 두드렸다.
“이봐요. 아직 포기하면 안 돼요. 도와줄게요.”
내 무의식 속에서 궁금증이 생겼다. 물속으로 빠져버린 사람은 누구일까? 설마 또 나인 걸까? 다른 곳은 몰라도 물속에서 나는 허우적거릴 리가 없었다. 나는 달리기를 할 때보다 물속에서 더욱더 빨랐다. 다섯 살 때부터 개인레슨으로 수영을 배웠기에 물을 두려워한 적은 단 순간도 없었다. 물 안에서는 몇 시간이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누가 됐든 일단 구하고 보자는 생각에 나는 얼음판을 쉬지 않고 두드렸다. 어차피 도망간 사람은 잡기에도 늦었다.
그때 새하얀 얼굴이 얼음판 바로 밑으로 떠올랐다. 그는 꺼내 달라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남자와 얼음판을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쳤다. 제길 또 나였다. 우리는 거울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이 온 힘을 다해 얼음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얼음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얼굴을 한 우리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꺼내 달라고 몸부림치는 나와 그런 나를 구하지 못해서 고통스러운 나. 꺼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주변에 작은 돌멩이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어서서 있는 최대한 무게를 싣고 발을 굴렀다. 제발 작은 균열이라도 생겼으면 좋겠다. 제발. 깨져라. 발이 떨어져 나가도록 발을 굴렀다. 빠지직. 드디어 작은 균열이 생겼다. 너무 흥분해서 행동했던 나는 지지할 곳 없는 물 한가운데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징검다리는 저 멀리 가 있었다. 내가 서 있던 얼음이 순식간에 싱크홀처럼 밑으로 꺼졌다. 내 몸이 차가운 물속에 빠지고 있었다. 물 밑에 있던 정민도 의식을 잃고 어두운 물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가라앉는 정민을 잡아보려고 몸을 고쳐 잡고 아래로 헤엄치려 했다. 징- 알림이 울린다. 벌써 30분이 다 되었다. 오늘은 반드시 30분을 넘지 않기로 했다. 이것은 모든 문을 끝까지 탐험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규칙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가상이다. 진짜가 아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나부터 지켜야 한다. 할 수 없이 EXIT 버튼을 눌렀다. 노란 알약을 집어 들었다. 잠깐, 다시 접속할까? 살려달라고 발버둥을 치는 나를 발로 내리치던 그 자식은 잡지도 못했다. 흥분해서 헉헉거리는 나의 심장이 노란 알약을 쉽사리 입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할 수 없이 노란 알약을 삼키고는 자포자기로 침대에 누웠다. 심장이 쪼그라든 것 같아서 부여잡고 있었다.
똑똑.
제길. 계획에 없던 노크 소리였다. 이 시간은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아야 하는데. 누구지? 나는 대충 이불로 VR 장치들을 덮어놓고 책상에 앉았다. 온몸에 땀이 흥건했고 숨이 가빴지만 진정하려고 애를 썼다.
“네.”
가까스로 대답하고 뒤를 돌아보니 아빠였다. 독서 안경을 쓴 것으로 봐서 오랜만에 책을 읽는 시간을 가졌나 보다. 나는 이렇게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여유롭게 책이 읽히는가 보다. 집안에 모든 전등이 소등되었다는 것을 확인했었는데 아빠의 독서등은 방심했다. 책상 앞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빠는 내 컨디션은 눈치채지 못했다. 관심이 없으면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법이다.
“요즘 통 얼굴을 못 봐서 잠시 와봤다. 사업을 확장하느라고 나도 통 시간이 나야 말이지. 그래도 권 비서 통해서 학원 잘 다니고 있다는 보고는 받고 있어. 별다른 문제는 없지?”
“네, 저야 만날 똑같죠. 뭐.”
“그래. 그거면 된 거지. 별다른 없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 다음 주 주말에 용인이나 다녀오자.”
“엄마 납골당에요? 같이 가시게요?”
“그래, 같이 아빠랑 출발하자. 나는 그 근처에서 골프 약속이 있으니까 그사이 엄마한테 다녀오면 되겠다.”
“네. 알겠어요.”
그러면 그렇지.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계획적이고 철저하게 냉정하다. 아빠에게 용인은 그저 골프장이 있는 도시일 뿐 자신의 반려자가 묻힌 도시는 아니었다. 요즘 주말까지 일로 바빠서 나를 내버려 뒀다고 느꼈나 보다. 가끔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의미 없는 한 두 마디의 대화로 자식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는 만족감을 얻는 저 표정에 익숙했다. 원래 하려던 계획에 나를 곁다리로 태워서 가는 것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꽤 괜찮은 아빠라고 착각하는 사람이었다. 비즈니스 골프를 가는 길목에 20년을 같이 살았던 아내의 납골당을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남편의 역할을 해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에게는 관대했고 타인에게는 엄격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엄마와 나에게는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었다. 아빠는 간단히 용건을 끝내고 서둘러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그때 나의 질문이 아빠를 멈춰 세웠다. 흥분 상태가 아직 진정되지 않아서인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그런데 아빠 혹시 가해자 얼굴 알아요?”
“뭐?”
아빠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것 같기도 했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아빠에게 지난 실수란 가능하다면 완전히 덮어 버려야 하는, 영원히 잊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빠는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고 늘 앞으로만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정민아.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거냐?”
“그냥,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래도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어서요. 길 가다 마주칠 수도 있잖아요. 저는 기억 못 하지만……”
“그 얼굴을 안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으냐?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은 거야. 더는 궁금해하지 말고 새롭게 시작하는 게 너를 위해서도 좋아.”
“네. 그건 그렇죠.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라고 나는 거짓말을 했다. 짧은 대화를 하는 동안 아빠의 얼굴이 몹시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는 관심을 끌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악몽 안에 담긴 고통이 어떤 크기인지 겁도 없이 접근했지만, 이제는 크기가 어찌 되었든 이 문을 끝까지 열어야만 했다. 이미 악몽을 꾸기 전으로 돌이킬 수 없었다. 어쩌면 나의 뇌는 스스로 이 기억을 끊어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 내 의지로 이 기억을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살려내야 했다.
아빠는 구제불능을 바라보는 듯 쯧쯧 혀를 차며 나갔다. 아빠가 나가고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고민에 빠졌다. 종료 알람이 울려서 가상세계를 빠져나왔지만 징검다리 너머로 도망가 버린 그 자식의 뒷모습이 계속 생각이 났다. 무언가 해결이 안 된 기분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는 자명의 규칙을 깨고 다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눈을 질끈 감고 흰 약을 다시 먹었다. 1시간 만에 다시 감각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약을 먹은 것이었다. 말초신경들이 두 배나 더 예민하게 요동치는 기분이었다. 나는 다른 접속 때보다 훨씬 빠르게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생각만 했는데도 벌써 징검다리 중간까지 도착해 있었다. 내가 허우적거렸던 물밑은 조용했다. 안개 낀 징검다리를 계속 건너갔다. 다리를 움직여서 건너가는 것인지, 허공에 떠서 이동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 의식의 흐름과 호흡을 맞춰 몸이 움직여주고 있다.
그때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에서 거대한 물 기포가 생겼다. 가던 길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머리 위를 쳐다보았다. 사람의 맨발이 바동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누군가 발목을 잡고 아래로 잡아끌고 있었다. 물안경을 낀 그들은 물속에서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다른 한 놈이 내려오면 위에 있던 다른 한 놈이 내려와서 교대로 발목을 잡았다. 발목을 붙잡힌 남자는 물 위로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수면 위로 올라가 숨을 실컷 쉬고 번갈아 가는 그들은 발목을 잡힌 사람이 물속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기며 보고 있었다. 지금 나는 그들에 비하면 피라미 같은 크기로 그들 밑에 있었다. 내가 서 있던 공간이 물속으로 변했다. 내가 짓밟혀서 뭉개질지도 모르지만 나는 헤엄을 쳐서 그들을 향해 올라갔다. 그때 나의 아래에서도 누군가 내 발목을 잡았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놈들이 이번엔 내 발목을 잡고 웃고 있었다. 발목이 빠져나올 수 있도록 움직여 보았지만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나는 발버둥을 치는 대신 밑으로 방향을 틀어서 그들의 얼굴을 보려고 다가갔다. 한 명의 어깨를 잡았다. 거칠게 눈에 있는 물안경을 벗겼다. 시발. 얼굴이 없어. 하나같이 다 얼굴이 없다. 날카로운 이빨들이 자리한 입만이 나를 비웃고 있었다. 얼굴을 보고 있는데 얼굴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웃고 있는 입에서는 피가 터졌다. 피는 물속으로 퍼져갔다. 나는 물속을 유영하며 정신을 놓고 그 자식의 얼굴을 가격했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은 여전히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아니 나를 비웃고 있었다. 한 번 더 있는 힘껏 주먹으로 얼굴을 쳤다. 그때 고개가 뒤로 툭 부러졌고, 남자는 그대로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30분이 되기도 전에 EXIT 버튼을 눌렀다. 눈앞에서 그 자식을 잡았는데 오늘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나는 겨우 노란 알약을 먹고 바로 기절했다. 무의식 중에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일어났을 때는 다음 날 점심이 넘었을 때였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나를 흔들어 깨웠지만, 도저히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콧김은 잘 나오고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기에 일단은 자연스럽게 기상하길 초조하게 기다렸다는 것이다. 다행히 아빠는 토요일에도 다른 약속으로 집을 일찍부터 비운 상태였다.
깊은 잠에 빠졌던 그날 나는 꿈을 꾸지 않았다. 갑자기 매일 찾아오던 악몽이 사라지니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악몽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닐지 두려움에 휩싸였다. 내가 다섯 개의 문을 다 열기 전에 꿈이 사라지면 절대 안 된다. 두 번 연속 악몽 메타버스에 접속한 후유증은 꽤 컸다. 며칠 동안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을 만큼 신체적 타격이 상상 이상이었지만, 그보다는 악몽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 훨씬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시는 두 번을 연속으로 접속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악몽을 초조하게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