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을 이렇게 기대하면서 기다리게 된다니 나 자신이 정신이상자처럼 느껴졌다. 귀 뒤에 자명이 준 패치를 붙이고 침대에 다소곳이 누워 잠들기를 기다렸다. 악몽은 여전히 나를 반겨주었다. 덜컹덜컹. 스르르. 스트레스 상황에서 신호가 더욱 정확할 것이라는 자명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보다 괴로움을 더 느껴보려고 악몽에 몰입했고 일부러 손을 더 뻗어 보았다. 하지만 몸까지는 터질 수 없었기에 내 몸통이 터지지 않을 정도로만 반항했다.
다음 날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패치를 자명에게 퀵서비스로 보냈다. 그날 저녁, 집에서 가까운 편의점을 배송지로 해서 물건을 받아 집으로 왔다. 집 안에 있는 어떤 사람도 내가 들고 오는 상자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권 비서님이 “오랜만에 쇼핑했네요.”라고 말을 걸었고, 나는 VR 게임을 해보고 싶어서 구매했다고 대답했다. 일초라도 빨리 열어보고 싶은 마음에 계단을 2개씩 성큼성큼 올라서 내 방에 들어왔다.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박스부터 열어보았다. 오큘러스 VR헤드셋이라고 상자에 적혀있었다.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제품의 박스라 문제없이 버릴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 이 기기를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게임을 위한 제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어 셋이 양쪽에 달려있기는 했지만 기본 액세서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오늘 나는 첫 번째 문을 열게 될 것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저녁을 먹고 방에서 숙제를 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온통 문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아빠는 퇴근 후 정확히 30분의 샤워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자명이 설계한 나의 악몽을 탐험할 준비를 했다. 먼저 침대 위에 VR기기와 손목 밴드를 나란히 올려두었다. 그리고 서랍의 맨 안쪽에 휴지로 돌돌 말아두었던 약통에서 흰색과 노란색 알약을 하나씩 꺼내어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놓았다. 안전지향 주의인 나는 5분 일찍 종료를 알리기 위해 내 휴대전화의 알림을 25분 뒤로 설정을 두었다. 주어진 시간 30분 안에 첫 번째 문을 열 수 있을까?
먼저 흰 알약을 꿀꺽 삼켰다. 손목에 밴드를 착용하고 조심스럽게 VR헤드셋 뒤에 있는 밴드를 조였다. 귀 뒤로 이어셋이 밀착되도록 손으로 누르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오른쪽 관자놀이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누르기 쉽게 설계되어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드디어 나의 악몽의 메타버스로 들어왔다. 곧 탐험이 시작될 터였다. 눈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악몽에서처럼 묶여 있나 싶어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나의 손과 발은 멀쩡하게 제 위치에 있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보고 내 배를 만져 보았다. 내 배를 감싸고 있는 것도 없었다. 흰 알약의 효과로 모든 감각이 증폭되어 작은 소리나 움직임에도 즉각적인 반응이 나왔다. 저 멀리서 미세하게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어갔다. 소리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어둠 속 한가운데에 커다란 나무가 보였고 그 앞으로 다섯 개의 문이 둘러싸여 있었다. 꿈속에서 봤던 다섯 개의 문이었다. 다섯 개의 문을 둘러싼 나무는 몸통이 굵고 울퉁불퉁한 뿌리들이 바닥으로 굳건하게 뻗어있었다. 서낭당으로 쓰이는지 나뭇가지에는 빨강, 파랑, 노랑, 흰색의 끈이 묶여서 축 늘어져 있었다. 내가 저 나무에 매달려있었던 거구나. 나무는 아주 오래된 당산나무처럼 보였다.
나는 당산나무를 잘 알았다. 엄마가 명절이 가까워져 오면 나만 데리고 시골 마을을 찾고는 했다. 그 입구에 꼭 이런 모습의 나무가 서 있었다. 그 앞을 지날 때면 누군가가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엄마는 당산 나무라고 했다. 마을을 지켜주고 때로는 소원을 들어주기도 하는 서낭당이라고 했다. 우리는 당산나무를 지나쳐서 사람이 살 것 같지 않는 작은 집으로 향했다. 단출해 보이는 작은 주택에 작은 마당이 있는 집이었지만 관리가 되지 않아서 이끼가 군데군데 끼어 있었다. 엄마는 그곳에서 가면 나를 정해진 마당의 한 구역에서만 놀게 했다. 엄마는 마을 초입의 슈퍼에서 소주와 초코파이를 사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절대로 방 근처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엄마가 나오면 다시 당산나무 앞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당산나무를 지날 때마다 엄마아빠가 싸우지 않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 보니 그때 내가 봤던 나무와 악몽 속 내가 매달린 나무가 같았다. 똑같이 천이 늘어져 있었고 우락부락한 뿌리도 똑같았다. 내가 만들어 낸 당산나무인가 보다. 소원을 빌던 나무에 내가 매달려 있다니 헛웃음이 났다.
진짜 악몽과 악몽의 메타버스의 차이일까? 이곳에서는 내 의지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조급한 마음이 들어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당장 문을 열고 싶었다. 나무를 지나치는데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꿈속에서 봤던 나무줄기들이 나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나는 섣불리 뒤돌아보지 못했다. 조금씩 시선을 옮겨 뒤를 보았다. 맙소사. 내 모습이 보였다. 내가 탈진한 상태로 나무에 등을 대고 묶여 있었다. 나무줄기들이 내 몸통을 둘둘 말고 있는 상태였다. 그 모습은 서낭당에 바쳐지는 재물처럼 보였다. 나는 의식을 잃은 나를 깨워보려고 소리를 질렀다. 박정민!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사력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문을 열기 위해 모른 척 지나쳐야 할지, 악몽의 메타버스 속 나무에 묶인 채 정신을 잃은 나를 깨워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나를 풀어줄 수는 없어도 의식이라도 깨워야 할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줄기들을 하나씩 떼어 주려고 했지만 가장 강력한 줄기 하나가 나를 향해 공격적으로 다가와서 나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나무줄기에 시신경이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면 나의 목을 조이겠다고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듯이 위협적인 몸짓을 취했다. 나는 일단 손목의 시계를 확인한 뒤, 눈을 질끈 감고 문들이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등 뒤로 나의 신음이 들려왔다.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정민아. 미안하다. 일단은 저 문들부터 열어보자.
곧바로 첫 번째 문으로 다가갔다. 문은 나의 움직임을 포착했는지 심하게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손잡이가 없어서 문을 밀어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을 두드려서 안에 누가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계속 덜컹거리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힘들게 문 앞까지 왔는데 열리지 않는다니 허무했다. 문을 여는 것이 쉬울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30분 중의 10분을 허비했고 20분 내로 첫 번째 문이라도 열어보고 싶었다. 다음 접속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이틀이 너무 길다고 느껴졌다. 다시 등으로 있는 힘껏 문을 밀어보았다. 땅을 지지한 두 발이 조금씩 밀려 앞으로 꼬꾸라질 뻔했다. 다른 방법이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명이 변수 개체들이 언제든지 나올 수 있다고 했으니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지 몰랐다. 허리를 구부리고 건조한 흙으로 된 바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문에서 두어 발자국 떨어진 곳에 쇠로 된 야구 방망이가 놓여 있었다. 좋았어. 나는 바로 집어 들고 있는 힘을 향해 문을 내리쳤다. 문에 조금씩 틈이 생겼다. 그 틈을 기준으로 더욱더 세게 강타했다. 오늘 이 문을 반드시 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사력을 다해 방망이를 휘둘렀다. 나무로 된 문에 작은 틈이 생기더니 문의 일부가 조금씩 찢겨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가운데를 최대한 쳐내서 몸을 숙이고 통과할 수 있게 만들었다. 공간을 다 만들어 놨는데 순간 손에 힘이 빠져 쇠 방망이를 놓쳤다. 쨍하는 소리나 났다. 방망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동시에 내 귀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삐-
내 고막을 파고드는 소리와 함께 견딜 수 없는 두통이 생겼다. 나는 머리를 감싸고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다시 일어나려고 해도 자비 없는 소음과 두통이 꼼짝 못 하게 했다. 두통이 심한 곳을 더듬어 만져보았다. 머리카락 속에 감춰진 곳에 봉합했던 수술 자국이 만져졌다. 저 방망이가 나를 가격했던 무기였음을 직감했다. 정말 이 무기로 내가 가격 당한 것이라면, 내가 첫 번째 문을 사력을 다해 내리친 것처럼 범인도 나의 머리를 있는 힘껏 가격했을까? 화가 났지만, 고통이 심해서 분노를 표현할 수가 없었다. 바로 앞에서 문 안은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쓰러져 있는 상황에 분통이 터졌다. 그때 희미하게 알림 소리가 났다. 현실에 있는 내 휴대전화에서 5분이 남았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안으로 들어서자 나를 괴롭히던 소음과 두통이 사라졌다. 휴. 살았다. 7분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큰 성과였다. 문 안은 고요했다. 나는 어떤 단서라도 찾기 위해 주위를 살피면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다 무언가 딱딱한 것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무릎을 꿇고 앉아서 자세히 보니 연학 녹색의 캐비닛들이 눕혀져 있었다. 바닥에 깔린 캐비닛을 중심으로 조명이 조금 밝아졌다. 나는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일어섰다. 수 십 개의 똑같은 모양의 캐비닛이 줄을 지어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내가 캐비닛을 잘 볼 수 있도록 연극무대의 조명이라도 달아놓은 것 같았다. 나열된 캐비닛들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중 내 앞에 있는 캐비닛의 문고리 잡아 열어 보려고 하는데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뒤로 나자빠졌다.
“흑… 엄마…. 엄마….”
남자가 흐느끼는 소리였다. 하필 이때 손목의 밴드에서는 30분을 알리는 진동이 왔다. 바로 버튼을 눌러서 나가야 했다. 왜 하필 이 순간이야. 나는 머리를 쥐어짰다. 궁금해서 버튼을 차마 누를 수 없었다. 자명의 말대로 다시 접속했을 때는 이 광경을 못 만날 수도 있었다. 이 안에는 내 기억의 대한 단어가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재빠르게 캐비닛 안에 있는 남자의 얼굴만 확인하고 가기로 했다. 몇 분 정도는 초과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캐비닛을 열었다. 윽. 오줌 지린내가 진동했다. 초등학생이 들어가도 비좁을 것 같은 공간인데 교복을 입은 남자가 몸을 괴기하게 구기고 꼼짝하지 못하고 흐느끼고 있었다. 교복에는 내가 다녔었다는 기산 고등학교 마크가 붙어 있었다.
“정말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제발 꺼내줘.”
시간이 더 지체된다고 해도 눈앞의 남자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남자를 꺼내주어야만 했다. 머리를 감싸고 있는 그를 일으켜 주려고 손을 뻗었다. 남자는 온몸에 힘이 풀렸는지 내가 잡아끄는 대로 힘없이 끌려왔다. 어두운 곳에 있다가 나오게 되어 눈이 부신 듯 앞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손을 잡아준 나를 향해 조금씩 고개를 돌렸다. 악. 시발. 내… 내가 왜 저기 있어.
“정민아, 흑흑. 정민아.”
나는 그 남자의 손을 놓고 뒷걸음질 쳤다. 남자는 다시 캐비닛 옆으로 넘어졌다. 이 안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했던 존재가 나였다니. 그냥 여기서 멈춰 버릴까? 덜컹거리는 문들을 열지 말고 그냥 악몽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내가 가지고 있던 기억이 너무 끔찍해서 스스로 기억을 지워버렸던 것일까? 아빠의 말대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나은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눈앞에 고통스러워하며 흐느끼고 있는 나를 보고 이대로 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가상공간 속에 나였지만 너무 실제 같아서 나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남자는 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누워있는 메타버스 속 정민을 일으켜 세웠다. 삐쩍 마른 몸은 이상하리만큼 가벼웠다. 몸을 일으켜주니 지린내는 더욱더 심하게 진동했다. 지린내에 구역질이 나서 나는 고개를 돌려 구토를 하고 말았다. 소매로 입을 닦고 내가 꺼내 준 정민을 바라보았다. 캐비닛 옆에 정민과 열을 맞춰 늘어져 있던 캐비닛까지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주변을 둘러봤다. 다시 칠흑의 어둠이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들어온 문도 사라져 버렸다. 시계를 보니 이미 5분이나 지체했다. 서둘러 밴드의 EXIT 버튼을 눌러 VR 탐험을 종료했다.
헉헉. 헉헉.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협탁 위에 미리 준비해 놓은 노란 알약을 삼키고 침대로 쓰러졌다. 몸은 극도의 흥분 상태가 되었다. 심장의 펌프질이 너무 강해서 가슴이 쪼여 오는 기분이 들었다. 후하후하. 심호흡하고 약발이 들기를 기다렸다. 자명의 집에서 샘플로 경험한 VR 탐험보다 강도가 훨씬 강했다. 자명이 여러 번 규칙을 강조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잠시 후, 안정을 되찾았다. 고통스러운 탐험이었지만 하나씩 다섯 개의 문을 열어보면 내 기억이 조금씩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다만 생각보다 고통이 컸다. 새로운 의구심도 생겼다. 왜 내가 저 캐비닛 속에 누워 있었을까? 저 모습이 잊힌 기억의 한 조각일까? 그렇다면 저 문을 모두 열어 고통받는 나를 구해주어야만 했다. 기억을 되살리지 못해도 고통스러운 정민이들을 구해줘야 한다. 결국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나는 일단 끝까지 보기로 했다. 다섯 개의 문을 모두 열 것이다.
VR 탐험을 하고 잠든 그날 밤에도 다섯 개의 문은 어김없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당산나무에 그대로 묶여 있었지만, 지난밤 꿈과는 다르게 첫 번째 문이 활짝 열렸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다. 그것은 나의 VR 탐험이 실제의 악몽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뜻이었다. VR 탐험으로 무의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첫 번째 문은 이따금 바람이 불어와서 문이 앞뒤로 심하게 움직였다. 그 옆으로 나머지 문 4개는 부지런히 덜컹거리고 있었다. 자명이 설계한 VR 탐험이 너무 생생해서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이 꿈인지, 아까 탐험한 것이 꿈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당산나무에 묶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긴장이 조금 풀리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내가 발버둥 치지만 않는다면 당산나무 주변에는 나를 더 괴롭힐 것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꿈속에서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나는 어둠 속에 있었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야, 소주를 마셔. 맥주 배부르지 않냐?”
“이게 얼마 만에 맥주야. 자주 이런 자리 좀 만들어 보자. 그래도 저 자식 덕분에 이렇게 마신다.”
“아이 재수 없게 그 얘기 왜 꺼내. 술맛 떨어지잖아. 분위기 좀 깨지 마.”
그들이었다. 저 자식들이었다. 저들의 얼굴을 확인해야 하는데 나는 지금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나는 어두운 캐비닛 안이었다. 나와 스터디 모임을 한다는 핑계를 대고 내 돈으로 사 온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노숙자 아저씨한테 심부름 값으로 만 원을 주고 술을 사 왔다. 이런 방면에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자식들이었다. 나의 용처는 모임을 위한 명분과 돈이었다. 술자리에서 그들과 나란히 앉을 수 없는 나는 늘 이렇게 캐비닛 안에서 그들의 술판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술판을 일찍 시작해서 취기가 오르면 나를 꺼내어 주고 4명의 숙제를 맡겼다. 몸이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던 나는 취해서 잠든 개자식들 옆에서 숙제를 했다. 그리고 더러운 술판을 치웠다. 치욕스러운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악몽의 꿈속에서 나는 캐비닛 안에 갇혀있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열어주었다. 꿈속이니까 용기를 내어 가해자들의 얼굴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서둘러 나가고 싶었지만, 다리가 저렸다. 둥근 책상 위에 4명이 교복이 헝클어져 있는 상태로 엎드려 곯아떨어졌다. 가까이 다가가서 어깨를 잡고 얼굴을 봤다. 얼굴이 없었다. 바로 옆에 누운 새끼의 얼굴을 들었다. 역시 얼굴이 없었다. 4명 모두 얼굴이 없었다. 시발. 엿 같은 기억만 되살아났고 가해자의 얼굴은 알아내지 못했다. 나는 분노로 치를 떨다가 눈을 떴다. 내 마음도 모른 채 너무도 화창한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