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뭉치를 들고 자명을 다시 찾아갔다. 자명의 책상 구석에는 은행에서나 쓸법한 돈 세는 기계가 있었다. 자명은 내가 들고 온 돈뭉치를 기계에 넣어 세 번이나 세어봤다. 책상 서랍에서 안내문 한 장을 꺼냈다.
“이 안내문을 가져갈 수는 없어요. 그래도 말로 하는 것보다 텍스트로 써 놔야 고객들이 기억을 잘하더라고요. 몇 가지 조건들이 있어요.”
자명은 당부를 곁들여 나에게 제공할 서비스에 대한 메커니즘을 설명해 주었다. 자명의 프로그래밍은 일반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일 수 있다고 먼저 서두를 열었다. 자명은 내가 지금 꾸는 악몽이 무의식과 현재의 감정, 뇌파 상태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의 무의식에서 발산하는 뇌파 신호들을 신체의 반응과 같이 묶어서 사람들의 무의식 표본을 확보한다. 이 표본을 기반으로 데이터를 추출하여 내 악몽의 기본값을 프로그래밍하는 것이다. 그 기본값을 자명이 개조한 VR기기에 심고, VR기기에 달린 이어 셋으로 (물론, 자명이 개조한) 시신경을 자극하여 실시간으로 개체들이 자동으로 생성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기본값은 기본값일 뿐 매일 입력되는 정보에 따라서 VR 탐험에 변수가 생긴다. 그날 겪은 일이나 만났던 사람, 스쳤던 생각에 따라서 VR 탐험 안에 개체가 생성되는 개념이었다. 자명은 단순히 꿈을 시각화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고객들의 악몽을 일종의 플랫폼처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우쭐거렸다. 이 안에서 나는 내 의지에 따라서 자유롭게 탐험할 수 있다고 했다.
오늘은 바로 자명이 직접 제작한 안마 의자를 통해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과 마주할 수 있도록 자극을 가하고 감지되는 뇌파와 생체 신호를 저장해 둘 것이다. 집으로 돌아간 오늘 밤에는 자명이 주는 별도의 패치를 귀 뒤쪽에 붙이고 잠들면 된다. 패치 안에 들어 있는 반도체 칩이 오늘 밤 수면 중에 발산되는 나의 뇌파와 시각 정보들을 읽어내어 분석할 예정이었다. 다음 날 부착했던 패치만 퀵 서비스로 보내면 내가 할 일은 끝이었다. 프로그래밍이 완료되면 자명은 VR 장비를 보내줄 예정이고 기기 외에는 그 어떤 정보도 담지 않는다고 했다.
“이 업계에 나 같은 기술을 가진 사람이 몇 안 돼요. 그런데 얼마 전 다른 기술자 한 명이 정보통신부에 걸렸어. 정부에서 불법으로 뇌파를 읽었다고 난리 났거든요. 솔직히 수십만씩 받고 이야기만 들어주고 불면증 치료해 준다는 의사보다 우리가 더 과학적이고 도움이 되는데 이해가 안 돼요. 그래서 기록으로는 뭐든 남기지 못합니다. 그러니 잘 기억해 두세요. 나중에 사용법 잘 몰랐다고 찾아오시면 안 돼요.”
자명은 장비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자명은 알약이 들어 있는 통을 두 개 건넸다. 하나는 흰색, 다른 하나는 노란 알약이었다. 흰 알약은 VR 기기를 연결 전에, 노란 알약은 탐험을 끝낸 후에 먹어야 한다. 흰 알약은 짧은 시간 내의 뇌파와 감각을 증폭시켜 준다. 그래야 자명이 설계해 놓은 프로그램에서 더욱 실재감 있게 몰입할 수 있다. 뇌가 실제라고 믿어야 꿈에서도 자유의지로 움직이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연결이 끝난 후에 먹는 노란 알약은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는 장치 중 하나였다. 약을 미리 주는 이유는 VR 기기와 같이 보내다 배달 사고가 나면 약의 존재로 인해 골치 아픈 마약 사건으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명은 약통을 건네주고 거실 구석에 있는 작은 방에서 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검은 상자를 열어 VR 헤드셋을 보여줬다. 눈을 덮는 메인보드 양 끝으로 이어 셋이 붙어있었다. VR 기기를 밀착해서 착용하면 되고 특별히 자명이 개발한 이어 셋은 귀 뒤에 반드시 밀착되도록 연결해야 했다. 이것이 귀 뒤에 밀착되어 뇌파 신호를 분석하는 역할을 해준다. 그리고 얇은 손목 밴드를 하나 보여주었다. 심장의 이상을 측정하는 보조 도구이자 VR 탐험에서 EXIT하는 장치였다. 밴드의 메인보드 옆에는 작은 버튼이 있었다. 30분이 되면 1차로 알림을 주지만 EXIT 할 수 있는 주체는 고객이었다. 이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절대로 악몽의 메타버스 밖으로 EXIT 할 수가 없었다. 무의식의 바다는 생각했던 것보다 끔찍한 기억의 변수들이 많아서 탐험을 하다가 적잖은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 집중해서 탐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자명은 덧붙여서 악몽을 탐험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2가지 조건을 이야기해 주었다. 첫째, 이틀 연속으로 꿈에 접속하지 않을 것. 둘째, 접속 시간은 30분을 초과하지 말 것. 자명은 이 부분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이 두 가지가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지키기가 어려워요. 사람들은 꿈속에서 만나는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를 마주하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아주 활발히 탐색해요. 그래서 24시간을 기다렸다가 접속한다는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거죠. 한두 번은 이틀 연속 접속해도 괜찮을 수도 있어요. 보통 무의식이 끔찍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기억도 있으니까. 그런 개체들을 만나면 크게 지장은 없지만, 무의식이라는 것이 언제 어디에서 끔찍한 개체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거든요. 내가 기본적으로 무의식을 읽고 코딩화시켰지만 이건 스스로 움직이는 거대한 플랫폼과 같아요. 매일 입력되는 신호들도 지속해서 영향을 주고 VR 세계를 진화시키기 때문에 아무도 예측할 수 없어요. 그리고 30분? 이거 지키기 쉬울 것 같죠? 눈앞에 내가 보고 싶던 개체가 나타났는데 갑자기 끌 수 있겠어요? 다시 접속했을 때는 내가 나온 시점부터 접속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조금만 더 견뎌보자 하다가 1시간까지 접속하면 기절하기도 하는 거예요. 내 고객 중에 그렇게 무리하다 며칠 동안 기절해 있던 사람도 있어요. 내가 어찌나 조마조마하던지. 밥줄 끊길 뻔했잖아요. 그러니까 귀찮은 사고 일어나지 않게 30분이 되면 반드시 밴드에 있는 EXIT 버튼을 눌러야 해요. 꼭 주의해 주길 바라요. 기술이 이거뿐이라 오래오래 밥벌이해야 하거든요.”
자명은 설명을 끝내고 내 무의식의 기본값을 읽기 위해 나를 안마 의자에 앉혔다. 의자의 머리 부분에는 신호를 분석하는 패치 몇 개가 달려있었다. 내가 눕자 자명은 패치들을 귀 뒤, 정수리 앞부분, 이마에 하나씩 붙여 놓았다. 그리고 태블릿을 하나 건네고 내 악몽에 대한 설문지에 응답하라고 했다. 악몽의 전반적인 분위기,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이 사람인지 사물인지, 악몽 속에서 나의 감정 상태를 분석해서 악몽의 타입을 1차로 분류해 주는 설문지였다. 체크를 마치고 자명에게 태블릿을 건네자, 빠른 속도로 컴퓨터 검은 화면에 코드들을 입력했다. 그의 체구에서 나오는 속도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민첩함이었다. 코딩이 끝났는지 옆에 놓인 VR기기에 선을 연결하여 코드를 옮겨 심었다.
“정교하게 꿈 기본값을 설계하려면 뇌파 값을 모아야 해요. 이 분류된 악몽의 타입으로 시각적으로 극단적 스트레스를 줄 거예요. 의미 있는 뇌파 값을 얻으려면 평온하면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좀 괴롭더라도 집중해서 화면을 봐야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연히 이 상황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괴로움보다는 덜컹거리는 문을 열 수 있다는 기대감이 큰 상황이었다.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지 않아서 측정이 잘 안 되면 어쩌지 싶었는데, 기본적으로 신체 상태 자체가 스트레스의 최극단에 있다고 측정이 잘될 것 같다고 했다. 자명이 준 흰 약을 삼키고, VR 헤드셋을 착용했다. 한동안 아무것도 없는 암흑만 펼쳐졌다.
“곧 시작합니다. 놀라지 마세요. 가상일 뿐이니까.”
잠시 후 암흑이라고 생각했던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삽으로 흙은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 소리에 내가 관 안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워있는 관 위로 누군가 흙을 던지고 있었다. 나를 산 채로 묻으려는 심산이었다. 내가 처한 상황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순간 가상이라는 것을 잊고 두려움에 떨었다. 여기 사람 있어요!!” 소리쳐봤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관에 작은 구멍들이 생겼다. 빛이 들어오다가 이내 흙으로 가려졌다. 나는 사람이 있다고 계속 소리쳤다.
“여기 사람 있다니까! 뭐 하는 짓이야!”
내 소리는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다만 갑자기 생겨난 작은 구멍들 사이로 들어온 흙이 내 입안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퉤퉤, 차라리 덜컹거리는 다섯 개의 문이 낫지 싶었다. 적어도 눈앞이 보이기라도 하니까. 점점 흙이 쌓이는지 소리가 둔탁해지고 있었다. 이미 땅속에 묻힌 건가 싶었는데, 발밑에서 갑자기 불청객이 등장했다. 어두워서 몇 마리인지 셀 수 없지만 커다란 쥐들이 내 몸을 탐색하며 얼굴 쪽으로 기어 오고 있었다. 저리 꺼져. 저리 꺼지라고. 손으로 얼굴을 가릴 수도 없었다. 내 손발이 존재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발밑에서 내 몸을 타고 올라오던 쥐들이 갑자기 격하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다 쥐들의 소리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동시에 종아리 부근에서 묵직함이 느껴졌다. 묵직한 것은 나의 다리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스르르, 스르르. 쉣! 뱀이다. 소름 끼치도록 싫어하는 뱀. 나는 오줌을 지린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지린 것인지, 가상에서 지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매우 모든 것이 매우 생생하게 느껴졌다. 뱀은 종아리, 허벅지를 감싸고 올라와 내 배를 스쳐서 목까지 올라와 감싸 안았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목덜미에 자리를 잡더니 뱀의 몸뚱이가 점점 단단해지고 커졌다. 나의 목구멍이 조금씩 조여들었고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차라리 이대로 내 숨통을 조여서 의식을 잃었으면 좋겠다. 그 정도로 이 악몽은 최악이었다.
나의 무의식이 전달된 것인가? 나의 바람대로 뱀은 내 목을 끝까지 조였고 목뼈를 부러뜨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살아있었다. 뱀이 사라지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눈을 떠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내 얼굴 위로 무언가 떨어졌다. 코 옆에 떨어지더니 이마 쪽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몇 마리가 더 얼굴과 몸으로 떨어졌다. 시발, 바퀴벌레였다. 어둠 속에 익숙해져서 그들의 날갯짓이 보였다. 내 얼굴로 무더기로 떨어져서 내 코와 입, 귓구멍을 모조리 막아버렸다. 읍, 읍.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시발, 가상이라며! 자명이 이 자식이 나를 속였어. 개새끼야! 당장 꺼내.”
내가 소리를 지르자 갑자기 펑! 하고 어둠이 사라지고 바퀴벌레들도 사라졌다. 자명은 VR헤드셋을 열어주고 노란 알약을 물과 함께 주었다. 나는 극도의 흥분 상태가 되어 숨이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오우, 개새끼라는 말은 오랜만에 들어봐요. 약을 먹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진정될 거예요. 난 코드 좀 옮기고 있을게요. 눈을 감고 있는 편이 도움이 될 겁니다. 안 그럼 멀미가 날 수도 있거든요.”
자명은 순식간이 눈빛이 변했다. CCTV를 띄워놓는 1개의 모니터를 제외하고 4개의 모니터를 동시에 보면서 가운데 놓여있는 노트 PC에 코드를 입력했다. 마치 신내림을 받은 사람처럼 눈이 뒤집힐 것도 같고 무언가 계시를 받은 듯 코드를 추출하고 있다. 조금 진정이 되어 살짝 그의 컴퓨터 화면을 보았지만, 나에게는 외계어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작두에서 미끄러진 무당처럼 혼잣말을 지껄이기도 했다.
“이거 클린 하지가 않는데? 내 코드가 더 화려하거든? 좋았어.”
무언가 난간에 부딪힌 듯 보였지만 그는 그럴수록 더욱 신이 나서 손가락이 빨라졌다. 나는 그를 신뢰하고 지켜보았다. 지금 자명 외에는 다른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금씩 호흡이 안정을 되찾았고 자명은 한참이 지나서야 키보드가 뚫리도록 엔터 버튼을 내리치면서 마무리를 했다.
“휴… 고객님 코드 겁나 어렵네요. 중간에 쉽지 않은 문제도 있었지만 일단 해결. 오늘 요 패치만 붙였다가 내일 바로 퀵 서비스로 쏴주시면 돼요. 왠지 그 데이터들도 만만치는 않을 것 같아서 추가 요금을 더 받아야 할 것 같긴 하지만 일사천리로 오늘 선지급하셨으니 더 받지는 않을게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퀵 서비스는 최대한 빨리 보내드릴게요.”
시계를 보니 벌써 15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권 비서님의 픽업 시간까지 1시간 남았다. 나는 서둘러 그 동네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