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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밀도 Oct 27. 2024

2. 악몽의 메타버스(5)

그 뒤로 이틀이 지났지만 동제에게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도 우리 사이는 변한 것은 없었다. 여전히 묵례를 했고 수업이 끝나면 각자 갈 길을 갔다. 그 악몽 프로그래머를 언제 만나볼 수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담당 의사가 준 약은 먹지 않고 고이 모셔두었다. 애증의 관계처럼 꿈이 사라져 버릴까 봐 겁이 났다. 열흘 뒤면 담당 의사를 만나러 가야 했다. 그러면 분명히 수면 유도제를 복용했는지 나의 악몽은 변화가 있는지 물어올 것이었다. 일단 그전까지는 약을 먹지 않고 버텨 보기로 했다. 동제 덕분에 알게 된 카페에서 투 샷을 넣어 커피를 마시면 낮에 정신을 조금 차리고 있을 수 있었다. 동제에게 부탁하고 삼 일째 되는 날, 동제는 나에게 쪽지 한 장을 건넸다.


“여기 적혀있는 대로 찾아가면 될 거야. 반드시 혼자 가야 해.”

“감사합니다. 잘 해결되면 제가 보답할게요.”

“보답은 무슨, 조심해서 다녀와.”


[쪽지] 서울시 무학동 891-6번지, 목요일 13시 10분


주소를 보니 낯선 동네였다. 서울에 이런 동네가 있었는지 몰랐다. 가상 지도로 위치를 먼저 확인해 보았다. 최근 재개발이 확정된 오래된 주택 밀집 지역이었다. 다행히도 권 비서님과 아빠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대였다. 학원에 머무는 시간 동안 서둘러 다녀오기로 했다. 빨리 목요일이 오면 좋겠다. 목요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며칠 동안의 악몽은 가뿐히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목요일 아침, 최대한 가볍게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아침 수업을 그대로 소화를 하고 점심시간에 출발하면 된다. 동제가 그 쪽지를 미리 보았다면 오늘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았을 텐데 별다른 말은 없었다. 점심은 건너뛰고 공복감을 내 몸에 허락하고 이동했다. 이동의 효율성과 사람들과 마주칠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학원에서 택시로 30분 거리였다. 택시는 한강을 건너 부지런히 북쪽으로 향했다. 지도는 목적지에 점점 가까워짐을 알려주고 있었다. 점점 도로의 차선이 좁아지고 언덕이 조금씩 생겼다. 몇 번의 언덕을 넘으니 제각기 모양이 다른 붉은 벽돌의 건물들이 밀도 있게 붙어 있다. 사람들이 사는 곳인가 싶어 창밖을 유심히 쳐다봤다. 이따금 작은 철문에서 사람들이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왔다. 장을 보고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이런 곳에서도 살아가고 있었구나 생각했다. 낡은 주택 안에 자리한 집 내부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되어 있을까? 영화에 나오는 한국판 고담 시티 같았다. 좁은 골목길은 대부분 일방통행이었다. 택시는 꼬불거리는 길을 부지런히 올라갔다. 미터기도 부지런히 오르고 있었다. 느닷없이 골목에서 얼굴이 허연 조커가 튀어나와 택시의 앞을 가로막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구해줄 베트맨도 없는데 어쩐담? 이런 망상을 하고 있었는데 기사님이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알려주었다. 모두 비슷해 보이는 집들 앞에는 주소가 붙어 있었다. 891-6번지가 맞았다.


다른 집처럼 붉은 벽돌의 건물이었다. 다만 다른 집에 비해서 규모가 꽤 컸고 출입문의 크기도 2배 정도는 돼 보였다. 건물 앞에서 날렵해 보이는 오토바이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웬만한 외제 차보다 비싸다는 고가의 오토바이였다. 이 동네에 세워져 있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정해진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기에 잠시 문 앞에 있는 계단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주변에 편의점이라도 있으면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 먹고 있을 텐데, 편의점은커녕 구멍가게조차 보이지 않았다.


10분 정도 기다려 보기로 마음먹었는데 철컥 대문이 열렸다. 겉모습은 꽤 연식이 오래되어 보였는데 안에서 자동으로 문을 열어 준다는 사실에 놀랐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오른쪽으로 정원이라고 부르기에 애매한 공간에 나무 2그루가 휑하게 심겨 있었고 대문에서 집의 현관문으로 향하는 길은 둥근돌이 징검다리처럼 안내를 해주었다. 징검다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계단 7개를 올라갔더니 오래된 철제로 된 현관문이 나왔다. 딱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현관문이었는데, 역시 센서가 달린 것인지 문 앞에 서자 자동으로 문이 딸깍하고 열렸다.


오래된 문이 열리자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흡사 최신 유행의 PC방 같다고 할까? 집안을 전체적으로 블랙 페인트로 다 발라버린 패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이 낮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게 창문도 다 검은색 페인트로 칠했다. 거실의 가장 좋은 위치에 다섯 대의 모니터가 밑에는 3단 위에는 2단으로 펼쳐져 있었고 넓은 책상 밑에는 컴퓨터 본체 다섯 대가 나란히 나열되어 있었다. 본체에서 나오는 열을 식히려고 본체가 모여 있는 공간 옆에 커다란 팬이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존재감이 강한 컴퓨터 왼쪽으로는 아빠의 서재에 있는 같은 브랜드의 안마 의자가 있었다. 분명히 측면에 동일한 브랜드명이 쓰여 있는데 개조를 했는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여러 장치가 헤드 쪽과 몸통 부위에 늘어져 있어서 병원에서 사용하는 의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들어갔을 때 한 남자는 헤드셋을 낀 채 컴퓨터 화면을 보고 무언가에 집중해 있었다. 남자는 블랙 외에는 다른 색을 모르는 사람으로 보였다. 몸에 붙어 있는 모든 패브릭 역시 모두 블랙이었다. 옷이 닿아있지 않는 남자의 팔과 얼굴만이 검은 우주에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덩치가 크고 살집이 꽤 있는 편이었다. 남자는 이 집으로 오는 길에 오르던 언덕길에서 넘어지면 맨 밑 끝까지 굴러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문 앞에 세워져 있던 날렵한 오토바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머리는 헤어 에센스 양을 조절하지 못한 것인지, 며칠 동안 머리를 감지 않은 것인지 군데군데 뭉쳐있었고 자연스러운 곱슬머리 기가 있는 단발머리였다. 남자가 앉아있는 책상 위 다섯 개 화면을 보니 어떻게 문이 타이밍을 딱 맞춰 열렸는지 알게 되었다. 집 안팎에 설치된 CCTV가 실시간으로 다섯 개 중 한 개의 화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남자는 나의 인기척을 느끼고 의자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일어날 의지는 전혀 없어 보였다. 앞모습을 보니 운동을 전혀 안 하는 사람이란 걸 다시 확신했다. 


“쪽지 받고 오신 거죠? 시간 맞춰 잘 오셨네요. 의외로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이 드물거든요. 들어오세요.”

내가 신발을 벗으려고 하자 남자는 신발을 신고 들어오면 된다고 자신의 발을 간신히 들어 올려 보여주었다. 남자는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는 탁자와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하고 자신의 의자도 끌어서 나를 마주 봤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동제…”

“됐어요. 여기서는 이름 같은 거 서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당신한테 제 닉네임은 자명이에요. 자명이라고 불러주세요. 제가 짜놓은 코딩프로그램이 고객마다 각각 다른 닉네임을 선정해 줘요. 오랜만에 한국 이름이네요.”

“네, 자명 님이라고 부를게요."

“설명은 대략 듣고 오셨을 테니, 본론부터 말씀드리면 선 지급 되어야 바로 작업에 들어가고요. 고객님 악몽의 복잡도에 따라서 비용이 추가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절대 이 서비스에 대해서는 누설을 금지합니다. 이게 합법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오셨을 테니까 그 부분은 별도로 설명하지 않을게요. 서비스의 원리 같은 것은 사실 들으셔도 잘 모르실 텐데 고객들이 중간에 너무 질문을 많이 해서 돈이 선 지급되는 대로 설명해 드릴 예정입니다. 일종의 영업기밀 같은 거니까 방문을 해주셨다는 이유로 알려드릴 수는 없으니까요.”

“오늘 바로 입금드릴게요. 가급적 빨리 진행하고 싶어요.”

“오우, 빠른 의사결정 좋네요. 여기는 현금만 가능해요. 일단 500 먼저 선 지급. 다 설계되면 나머지 500 완납. 오케이?

“네, 바로 입금할게요.”

“우리 입금 안 받는데? 올 현금으로만 직접 받아요. 계좌추적 되면 골치 아프거든요.”

“그럼 지금 바로 돈 빼서 올게요.”

“그게 좋겠어요. 계산은 정확히 하고 가는 게 좋으니까.”


자명은 가장 가까운 곳의 인출기를 알려줬다. 이 주변에 전혀 편의시설이 없을 것 같았는데 편의점 비슷한 곳에 인출기가 있었다. 수수료는 비싸지만 그래도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 않고 인출할 수 있었다. 아빠는 비상시에 사용하라고 넉넉한 돈을 항상 내 통장에 넣어주었다. 치밀한 아빠는 증여세까지 고려해서 입금해 두었다. 10년에 2천만 원. 가끔 아빠가 기분이 좋을 때 입금해 주는 용돈도 더해서 어느새 목돈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규모가 되었다. 어릴 때는 나의 통장을 친구들에게 햄버거를 사주는 데 썼는데, 지금은 나의 기억을 찾기 위해 사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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