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을 나와 다시 진성학원으로 향했다. 권 비서님은 한층 더 피곤해진 내 얼굴을 보고 잠시 눈을 붙이고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나도 마침 피곤함이 몰려와 30분 정도 뒷좌석에서 눈을 붙이기로 했다. 머리를 뒤로 기대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 짧은 찰나에 문 다섯 개가 내 눈앞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제길. 제발 꺼져, 꺼지라고. 이런 순간까지 이렇게 찾아오는 건 너무 하잖아! 몸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내 손과 발은 무용지물이었다. 차에 앉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권 비서님, 제발 나를 좀 깨워줘요. 제발. 텔레파시라도 통하길 간절히 원했다.
“정민 군, 정민 군, 괜찮아요?”
권 비서님의 목소리였다. 어린 시절 얼음 땡 놀이를 하면 얼음을 외치고 제자리에서 서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땡’하고 녹여주었던 것처럼 권 비서님의 목소리가 나를 녹여주었다. 아쉽게도 나의 어린 시절에는 아무도 나에게 ‘땡’의 자비를 베풀어 주지 않았다. 나는 놀이터 한가운데에 홀로 붙박이처럼 서서 뛰어다니고 서로를 터치해 주는 친구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나는 술래가 고팠다. 나도 뛰면서 아이들의 등을 터치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햄버거 가게에 갈 때면 아이들이 나를 앞서서 찾았지만 운동장이나 놀이터에서는 나는 투명인간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권 비서님이 나를 악몽에서 구해줬다. 얼어버린 나를 녹여주었다.
“학원에 다시 갈 수 있겠어요?”
“휴… 살았다. 비서님 덕분에 살았어요. 나중에 아빠한테 한 소리 듣는 것보다 학원가는 게 나아요. 아시잖아요.”
권 비서님은 항상 나를 만나는 지점에서 내려주었다. 조금 어지러웠지만 걷다 보면 괜찮겠지 싶었다. 천천히 진성학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출근 시간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아직 시작하기 전이라서 거리는 한산했다. 가을의 햇볕은 피부를 따갑게 했다. 저 멀리 학원이 보였다. 늘 고개를 숙이고 걸었는데 건물을 한눈에 보려고 잠시 멈춰서 올려다보았다. 건물 유리창에 빛이 반사되어 눈으로 날카로운 빛이 들어왔다.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빛을 가리려고 손을 들었는데 별안간 별빛이 핑 돌았다. 몸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쓰러질 것 같은데 나를 잡아줄 사람도, 지지할 물체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두꺼운 옷을 입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넘어지더라도 옷이 쿠션 역할을 해서 덜 아플 테지. 그보다 넘어지면서 내 벙거지가 벗겨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모든 걸 포기하고 몸이 바닥에 닿기를 기다리는데 검은 워커가 달려오고 있었다. 데자뷔인가? 그때처럼 다시 검은 워커가 눈앞에 보였다. 설마 이동제? 이동제에게 이런 모습만 보이게 된다니 바닥으로 그대로 꺼지고 싶었다. 차라리 이게 악몽이라고 해주기를. 달려온 이동제는 역시나 무릎을 꿇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정민 씨, 정민 씨. 정신 차려요.”
이동제가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동제도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어깨 덕에 막혔던 숨이 조금 내려갔다.
“네, 괜찮아요.”
나는 자리에 앉아 발을 벌려 지지대로 삼고 고개를 숙여 숨을 먼저 가라앉혔다. 사람들이 볼까 싶어서 빨리 일어서고 싶었는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동제는 나의 어깨를 부축했다.
“일단 저기 카페에 가서 시원한 것 좀 마시면서 숨을 가다듬어요.”
“이렇게 민폐 끼치기 싫은데……”
“나도 마침 목이 말랐어요. 천천히 걸어요.”
이동제는 왜 이 시간에 나를 발견한 걸까? 나처럼 수업에 빠진 건가? 그동안 결석한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디 외출이라도 다녀온 것일까? 그런데 하필 또 이런 모양새로 동제와 대화를 하게 되다니 피하고 싶은 우연이었다. 하지만 당장 나는 목이 몹시 타고 있었다. 탈수 증상이었다.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셔야 기운을 차릴 것 같았다. 진성학원 바로 옆에 있었지만 한 번도 가본 적 없었던 작은 카페로 이동했다. 규모는 작지만 화이트톤 인테리어가 깔끔하고 모던했다. 동제는 자주 이곳에 오는지 카페 주인이 동제를 알아보았다.
“여기 커피 맛있어요. 이왕 못 축이는 거 맛있는 게 낫죠?”
커피를 계산하려는 동제에게 나는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민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빚진 기분을 느끼기 싫었다.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됐어요. 이 정도는 살 돈은 있어요. 일단 앉아있어요.”
나는 온몸에 힘이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동제의 말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동제는 금방 계산을 끝내고 내 앞에 앉았다.
“지난번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난 별로 한 것도 없는데요? 우연들이 겹쳤을 뿐이죠. 근데 한 달 동안 엄청 수척해진 것 같아요. 어디 아픈 데 있어요?”
“아뇨, 아픈 데는 없는데. 사실은 요즘 잠을 못 자요.”
“불면증 뭐 그런 건가?”
“일종의 불면증이라고 할 수 있죠. 매일 같은 악몽을 꾸거든요.”
아, 이동제에게는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내 불면증을 털어놓았다. 내가 지금 뚜렷한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여서 오판일 수도 있지만, 이 순간만큼은 나는 그를 신뢰했다. 이동제에게 말하면 그 말이 동제 안에서만 흐를 것 같았다. 이동제는 큰 동요 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아, 그럼 혹시 그때도 악몽 때문에 비명을 지른 거예요?”
“네, 그때부터 쭉 같은 꿈만 꿔요.”
“비명까지 지를 정도면 엄청 무시무시한 꿈인가 보네요. 혹시…… 오지랖일 수 있는데 악몽을 해결해 주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기는 해요. 혹시 관심 있으면 소개해 줄게요.”
“악몽이 해결이 가능한 건가요? 지금은 뭐라도 해보고 싶어요.”
“흠. 이 사람은 좀 괴짜인데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해요. 심리치료사나 의사는 아니고 프로그래머예요. 나도 그쪽 분야는 잘 몰라서 다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뇌파를 읽어서 그것을 코드로 짜주고, 악몽을 VR 게임처럼 탐색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들었어요. 그 방법으로 악몽을 해결한 사람들이 입소문을 내서 유명해졌어요. 근데 아직 정부에서 허가를 안 내줘서 비밀스럽게 활동하고 있어요.”
오늘처럼 갑자기 이런 쓰러지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으려면 악몽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었다. 악몽을 탐험할 수 있다면 내 앞에 덜컹거리는 문을 열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기억까지 되찾아 올 수도 있다. 정기적으로 찾는 병원 외에도 다른 돌파구를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하게 한 줄기 희망이 생겼다.
“괜찮으시다면 연락처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연락처는 따로 없고, 관심 있으면 내가 아는 연락망을 통해서 물어봐 줄게요. 이용 의사를 밝히면 장소와 시간 모두 그쪽에서 정해요.”
“네,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일단 악몽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고 싶었어요. 병원에서는 수면 유도제를 처방해 줬는데 근본적인 것은 아닌 것 같아서요.”
“알았어요. 뭐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아, 그런데 저보다 형인데 말씀 편히 하세요.”
“아, 그럴까? 그럼, 말 편하게 할게.”
우리는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얼음만 남겨둔 채 자연스럽게 다음 수업 시작에 맞춰 교실로 올라갔다. 그날 수업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담당 의사에게 받아온 수면유도제보다 동제의 말에 마음이 동했다. 이 악몽이 나의 몰골을 상하게 하고 있지만 내 눈앞에 보이는 다섯 개의 문이 사라진다면 내 기억을 찾을 기회도 영영 사라져 버릴 것이다. 악몽이 사라지기 전에 이 문들을 반드시 열어야 했다. 악몽이 이대로 고통받았던 2년의 시간과 함께 사라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몽을 붙잡아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