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은 학원과 선생님에 대한 소개와 앞으로 벌어질 일들, 의지를 다지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지루함을 충분히 만끽했다. 의외로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은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작은 공간이었지만 모두 정해진 공간 앞에 앉아 있고, 일제히 앞을 향하고 있다. 맨 뒤에 앉은 나는 사람들의 등을 볼 수 있었다. 내 뒤에는 단단한 벽만 있을 뿐, 살아있는 생명체는 없었다. 맨 뒤에 앉는 것은 무방비 상태에서 누군가가 나를 공격할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학교에서 일진들이 맨 뒤에 앉는 것은 등 때문이었다. 아무도 자신의 등 뒤에서는 공격할 수 없다는 암묵적 메시지를 던졌다. 맨 뒷자리에 앉은 최상위 포식자는 어떤 등에라도 칼을 꽂을 수 있지만, 자신의 등을 타인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교실뿐 아니라 다른 공간에서도 맨 뒷자리는 강자들의 자리였다. 수학여행을 가는 버스, 일탈을 꾀하러 향하는 길. 그들은 뒷자리가 아닌 곳을 못 견뎠다. 그들이 칼을 꽂은 등들이 태세 전환을 노리고 있을 테니까.
꽤 오랜 시간을 전학생 신분으로 살아온 나에게 뒷자리는 허락되지 않았다. 전학생은 학생들의 시선에 잘 노출되는 중간 자리에 배치되었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약육강식 전쟁에 관심 없는 선생의 입장에서 중간 자리가 꽤 안정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큰 실수였다. 중간 자리는 모두의 표적이 되는 자리였다. 뒤에서는 상위 포식자가 나의 가녀린 등을 살피며 먹이사슬 어디쯤 놓을지를 평가했다. 전학생들은 사방에서 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다. 이미 약자로 분류된 아이들조차 새로 입장한 전학생보다 자신들이 조금이라도 우위에 있을 수 있는지 희망을 품고 곁눈질을 해오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학교에서의 강자는 맨 뒤에 앉았지만, 사회에서 강자는 선두에 선다는 것이었다. 교실의 맨 뒤에서 군림하던 강자들은 사회라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간 순간, 작아지는 경우가 많았다. 어른들은 조금만 참으면 알게 된다고, 괜한 혈기 부리지 말고 치욕스러운 순간이 있어도 초식으로 살아가라고 했다. 그러면 곧 판도가 뒤집힐 거라고. 그 말이 맞는지 나는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어른이 되기도 전에 이미 한쪽 날개가 부러져 기억을 잃고 악몽에 시달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2년의 기억은 날아가 버렸고 나는 가해자들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몇 년 뒤의 역전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 시간이 나한테 영영 올 것 같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나는 천천히 사람들이 교실에서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의 등을 보며 교실을 마지막으로 빠져나왔다. 워커 역시 수업이 끝났는데도 한참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 교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권 비서님한테 수업이 끝났다고 문자를 보냈다. 권 비서님은 이미 근처에서 대기 중이었다. 권 비서님을 만나는 장소는 학원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숍 앞이었다. 열아홉 살이나 되는 남자를 누군가가 데리러 오는 것을 그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었다. 나는 그런 어린 애는 아니었다. 그 누구로부터 일말의 관심도 받고 싶지 않았다. 물론 진성학원에서는 어떠한 인간관계도 맺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미리 조심해서 나쁜 것은 없었다. 로비에는 커피믹스와 싸구려 캔 커피를 파는 자판기가 양쪽에 3대씩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옆으로는 잠시 쉴 수 있는 유리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해외 유학파로 보이는 학생들 다섯 명이 자리에 앉아 유창한 영어로 웃고 떠들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학원 바로 옆 건물의 스타벅스 그란데 사이즈 종이컵들이 놓여 있었다. 그렇지, 그들과 싸구려 커피믹스는 어울리지 않는다. 귀에 거슬리는 그들의 꼬불대는 대화를 뒤로하고 로비를 나섰다. 입구에 워커의 등이 보였다. 워커를 지나치니 워커 앞에는 몸집이 작은 여성이 서 있었다. 워커의 몸집이 커서 앞에 누가 서 있는지 모르고 지나갈 뻔했다. 여자 친구인지 그냥 친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둘은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다. 타인과 저렇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은 어떨지 궁금했다. 나는 고개를 푹 눌러쓰고 거리를 걸었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