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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밀도 Oct 27. 2024

3장. 다섯 개의 문(4)

며칠이 지나고 어느 정도 컨디션이 회복되었다. 다행히 다음 날부터 악몽은 세 번째 문까지 열려 있는 상태 그대로 나를 찾아왔다. 오늘만 잘 넘기면 다시 접속해 볼 수 있었다. 나는 습관처럼 1시간 일찍 학원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교실의 맨 뒷자리가 편했다. 자리를 잡고 잠시 책상에 드리려고 하는데 문자 하나가 날아들었다. 아빠와 권 비서님,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 얼마 전 추가된 담당 의사를 제외하면 내 번호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발신자 제한의 메시지였다.


[문자] 잊고 싶다고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문자를 받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이건 또 뭐지? 가해자들이 나의 위치를 알아냈나? 내가 약자의 기억을 잊고 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경고의 메시지인가? 이 거리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미 서대용도 마주쳤고 다른 누군가를 만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번화가였다. 다만 그들과 이 거리를 다니는 시간대만 다를 뿐 이 거리는 위험했다. 내가 아무리 모자와 옷으로 가려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진성학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발견한 가해자나 가해자 지인들이 내 번호를 알아내 장난질을 하는 걸지도 몰랐다. 한번 개는 영원한 개니까. 잃어버린 개를 발견하면 목줄을 묶어 끌고 가야 하니까. 휴대전화의 전원을 끄고 가방에 던져 넣었다. 휴대전화의 전원은 꺼졌지만 나의 불안감을 꺼지지 않았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안절부절못했다.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에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자 보낸 새끼인가 가해자인가 싶어 나는 잔뜩 긴장해서 문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엎드리고 싶었지만, 몸이 굳었다. 똑똑. 누군가 내 책상을 두드렸다. 


“저기…”


동제였다. 휴,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동제는 오늘 다른 때보다 일찍 도착했다. 목소리를 듣고 안심을 했다. 마음이 복잡해서 온갖 감정들이 짬뽕된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동제의 목소리가 훅 들어온 것이다. 그런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자는 척을 할까 생각해 봤지만 두 번이나 나를 도와준 동제였기에 힘을 내어 고개를 들어 동제를 바라보았다.


“저기, 혹시 오늘 나랑 수업 땡땡이 한번 쳐 볼래?”


생각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악몽과 자명에 대해 질문을 할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동제와 나는 이렇게 함께 추억을 만들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내가 두 번의 신세를 지기는 했지만, 이런 낯간지러운 추억을 만들 사이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제의 제안을 내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는 잠시 숨을 쉴 곳이 필요했다.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어디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짐을 챙겨 동제를 따라나섰다. 동제는 데스크 직원에게 다가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나왔다.


“내가 알리바이는 만들어놨으니까 걱정하지 마. 가자.”


동제는 앞장서서 입구로 향했다. 진성학원 건물 측면으로 들어서자 오토바이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검은색 보디에 날렵한 디자인의 오토바이였다. 몇 번 타지 않았는지 관리를 잘한 것인지 깨끗했다. 동제는 헬멧을 건넸다. 일부러 나를 태우기 위해 헬멧을 챙긴 건가 생각을 하는 찰나, 동제는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여분으로 항상 가지고 다니는 헬멧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 가끔 학원 앞으로 놀러 오는 여자를 태우고 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동제는 익숙하게 오토바이를 탔다. 처음 타보는 오토바이였다. 동제의 어깨를 손으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 어색했지만 어깨를 붙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동제는 꽉 잡으라고 말하고 시동을 걸었다. 조금씩 속도감이 느껴졌다. 바람이 나의 몸을 구석구석 만지듯이 스쳐 갔다. 무서워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대로 누군가 우리를 들이박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 속도에 익숙해지자 오히려 온몸에 느껴지는 속도감이 내 속을 뻥 뚫리게 하는 것 같았다. 30분 남짓 달렸을까? 바닷가의 비릿한 냄새가 나서 눈을 떠보니 정말 바로 옆으로 바닷가가 보였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바닷가가 있는지 몰랐다. 동제는 자주 오는 곳인지 익숙하게 주차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바닷가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서 모래사장에 앉아있는 내 옆에 왔다. 바닷물은 점점 뒤쪽으로 빠지고 있었다. 검은 갯벌이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내는 시간이었다.


“답답할 때 가끔 오는 곳이야. 자 여기.”


동제는 따뜻한 캔 커피를 내밀었다. 


“가까운 곳에 이런 바닷가가 있는지 몰랐어요.”

“동생이랑 어릴 때 자주 왔어. 저 갯벌에서는 하루 종일 놀 수도 있었어. 너는 다른 형제는 없어?”

“네, 저는 혼자예요.”

“뭐, 지금은 나도 외동이야. 이제는 동생이 없어. 아, 아니 동생은 여기 있다고 해야 하나? 이 바닷가에 동생을 뿌려줬거든. 사실 오늘이 기일이야.”

“아…. 힘드시겠어요.”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동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려고 노력하는 중인 것 같았다.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캔커피를 마시면서 꾹꾹 누르고 것처럼 보였다. 평생 외동으로 자라왔고 엄마 아빠의 형제들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동생이 생각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동제도 상실감이라는 감정을 알고 있다는 생각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형, 저도 엄마가 이제는 없어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소리를 내뱉지는 않았다. 동정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내 안에서 동질감을 느낀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했다.


“동생은 몇 살이었어요?”

“너랑 동갑이야. 올해 열아홉 살, 그래서 너를 보면 동생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 늘 무언가에 눌려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비슷하고. 그래서 신경이 좀 쓰였어. 요즘은 어때?”

“별로 좋지 않아요. 저도 늘 눌려있죠. 사실 그동안 좀 아팠고, 많은 것들이 변했어요. 변하기 전에 나를 찾고 싶기도 하고 그냥 두고 싶기도 하고 복잡해요. 요즘 제 악몽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데 알면 알수록 헷갈려요. 현실과 환상 그 사이에서.”

“여기 와서 종일 앉아있다 보면 신기해. 시간이 되면 알아서 물이 차고 빠지잖아. 거스를 수 없는 섭리인 거지. 검은 갯벌이 숨겨졌다가 드러났다가 하잖아. 어느 시간에 이 바다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바다가 되는 거야. 가끔 안 보이고 답답하지만, 시간이 되면 명확해질 때가 반드시 올 거라고 생각해.”


우리는 편의점에서 밖으로 보이는 바다를 보면서 아무 말 없이 컵라면과 삼각 김밥 하나씩을 먹었다. 완전히 물이 빠져서 검은 갯벌이 보이는 바다를 뒤로 하고 다시 학원으로 돌아왔다. 둘만 아는 비밀이 생긴 것 같아서 나는 동제에게 전보다 친밀감을 느꼈다. 이 작은 교실에 나와 같은 상실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동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어쩌면 이런 것이 자연스러운 친구 관계인 걸까? 자연스럽게 서로를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것. 이 관계와 감정이 낯설지만 복잡한 내 일상에서 유일한 활력이 되고 있다. 무기력했던 기분이 조금은 수그러든 채 집으로 갈 수 있었다.


돌아오는 일요일, 아빠는 새벽부터 골프장에 갈 준비를 했다. 나는 일찌감치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는 시간이 어긋나는 것에 극도로 예민했다. 몇 번 시간을 지키지 못해서 엄마·아빠가 크게 싸웠던 기억이 나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아빠와의 약속은 항상 30분 일찍 준비했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이었다. 아직 밖은 어두웠다. 우리는 아빠의 7시 라운딩에 맞춰 출발했다. 아빠는 나와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나는 약자였지만 아빠는 늘 강자였다. 그는 탁월한 비즈니스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의사결정을 했다. 많은 사람이 아빠를 신뢰하고 사업을 함께 했다. 대기업에 물건을 납품하게 된 것은 아주 오래전에 일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이미 아빠는 꽤 많은 금액의 계약을 성사시켰다. 그때부터 우리 집의 크기와 차가 달라졌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엄마·아빠가 서로를 물어뜯을 것처럼 갈등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엄마에게는 아빠의 관심과 시간이 필요했고, 아빠에게는 성공을 뒷받침해 줄 엄마의 내조가 필요했다. 서로 원하는 것이 명확히 달랐다.


“너도 검정고시 합격하면 골프를 좀 배워 놔라. 언젠가 다 쓸 데가 있어. 비즈니스의 기본이기도 하고. 언젠가 너도 아빠가 하는 일을 물려받기도 해야 하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빠처럼 사업가가 될 자신도 없었고, 골프에도 관심이 없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동굴에서 기거할 수 있다면 영영 나가고 싶지 않았다. 100일을 다 채워도 평범한 사람이 되어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나에게는 쑥과 마늘도 없다. 하지만 지금 솔직하게 이야기했다가는 본전도 찾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아빠는 나의 감정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전혀 관심 없는 자신의 세계에 빠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요즘 환율 때문에 내가 골치가 아파. 연쇄적으로 우리 사업하는 사람들한테는 영향이 오거든. 항상 대응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해야 해. 학교에서는 정작 중요한 것들을 가르치지 않고 겉도는 지식만 가르치는 것 같아. 내가 공부하던 때나 지금이나 다른 게 없어. 차라리 검정고시로 졸업장만 따는 것이 훨씬 이득이지. 시간을 아낄 수도 있고. 결국, 시간이 돈이라는 걸 너도 알게 될 거야. “


나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작은 분노가 내 안에서 자가 증식을 하고 있었다. 세상 돌아가는 것에는 그렇게 관심이 많으면서 엄마의 작은 감정은 헤아리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시간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나의 학창 시절 친구들과의 시간 축적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아빠에게는 감정이나 교우관계는 하찮은 일이었다. 덕분에 내 학창 시절은 아빠의 의사결정에 많은 것들이 좌지우지되었다. 계속해서 정보를 쏟아내는 아빠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아빠의 문장들이 내 가슴의 불덩이를 점점 키워갔다. 좁은 차 안에서 함께 하는 이 30분이 못 견디게 싫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피해자로 살아가게 된 것은 모두 다 아빠 때문이었다. 늘 강자 그룹에는 발이라도 걸쳐있던 나였는데 내가 피해자로 확실히 분류된 것은 그 당시 아빠의 의사결정 때문이었다. 아빠의 일방적인 문장이 희미한 기억에 확신을 심어주었다.


내가 가장 예민하던 시기. 아빠는 역시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빠 식대로 우리의 계획을 변경했다. 예민한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에게 전학은 피해야 할 것 중의 하나였다. 그날 아빠는 엄마에게 굳게 약속했다. 내가 중고등학교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만큼 앞으로는 독단적으로 이사를 결정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엄마는 각서까지 요구했지만, 아빠는 뭘 그런 걸 가지고 각서를 요구하냐며 화를 냈다.


“중학생 되면 아이들이 더 예민한 시기라서 전학은 피해야 해. 제발 부탁이니까 이사를 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잠시 떨어져 살자.”

“알았다니까? 나도 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야. 그리고 떨어져 산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는 하지도 마. 힘들게 번 돈 두 집 살림에 쓰고 싶지 않으니까. 새로운 환경에 새끼 사자처럼 떨어져 봐야 강해지는 거야. 당신처럼 약해 빠지게 키우지 않으려면 극성은 그만 좀 떨어.” 


결국, 각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초등학교의 친구들과는 중학교 이후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모두 중학교 배정을 각기 다르게 받기도 했고,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학원과 과외를 일정이 빠듯하여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었다. 친구들과 연락은 끊겼지만 유일한 성과는 같은 중학교에 배정받은 아이들 몇은 어렴풋이 내가 상대적으로 강한 그룹에 속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나를 호락호락하게 보는 눈빛은 아니었다. 나는 조금 자유롭게 자신감을 가지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데에 집중했다. 다행히 성적으로 특수반에 배정되었고 반에는 나처럼 말이 없고 조용한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두 친구를 사귀는 데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중학교 때부터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것처럼 면학 분위기가 진지했다. 앞으로 3년은 평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는 권 비서님과 벤츠를 교문에서 만나는 계획은 시도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믿고 있을 때쯤, 엄마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중학교의 2학년의 신학기를 지나고 있을 무렵, 아빠로부터 우리는 이사를 통보받았다. 안방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당신이 아빠야?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각서 쓸 필요도 없다면서! 믿으라면서! 정민이 이제야 잘 적응하는데 중요한 시기 놓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내가 나 좋자고 그러는 거야? 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거잖아. 나는 사업가라 늘 변수에 대응해야 해. 당신이 누리는 이 모든 것 다 그런 비용이 포함되어 있어. 그리고 지금 이사 안 하면 내야 하는 세금, 당신이 그 돈 벌어 올 거야? 어디 구해 올 데라도 있어?”

“돈! 돈! 돈! 그놈의 돈! 내가 우리 엄마처럼 신내림이라도 받으면 되겠네. 그러다 죽으면 내 앞으로 들어 놓은 보험으로 주면 되잖아. 내가 무당이 될지언정 정민이 절대 전학 못 시켜.”


싸움은 격해져서 엄마는 절대로 피하고 싶어 하는 할머니의 기억까지 들먹였다. 하지만 나의 예상대로 승자는 아빠였다. 엄마는 다른 때보다 조금 더 길게 식음을 전폐했을 뿐, 결국에는 아빠의 말에 따랐다. 나의 불행은 어쩌면 그때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확실하다. 그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학교에 전학을 갔는데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이사를 한 곳은 새로 생긴 신도시였다. 도로와 집은 그 어떤 지역보다 깨끗하고 정갈했다. 몇 군데 아파트는 이사를 먼저 시작했고 마무리 공사를 하는 단지도 있었다. 새로운 아파트 단지와 함께 신설된 학교들은 어수선했다. 운동장 구석에는 아직 공사를 더 진행하고 있었고 교실에서는 비릿한 자재 냄새가 여전히 진동했다. 나는 전학생이라고 하기에는 그들보다 6개월 정도 늦게 들어왔을 뿐인데, 반에는 이미 서열이 확고하게 정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신체가 빠르게 성장한 아이들 몇이 맨 뒷자리에서 지방방송을 하고 있었고 가녀린 선생님이 조용히 하라고 소리쳤지만 그들의 귀에는 가 닿지 않았다. 선생님은 중학교 2학년 남학생들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통제할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앞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교복을 벗으면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반 아이들 전반적으로 학기 중간에 들어온 평범한 나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무관심이 낫다고 생각했다. 2주가량을 그렇게 평화롭게 다녔을 무렵, 맨 뒷자리에 앉는 무리가 나에게 접근을 해왔다. 


“너 돈 많은가 보다? 벌써 가방이 명품이네? 우리랑 좀 나눠 쓰자.”

“미안한데 난 이만 학원 가야 해.”


몇 번은 단호하게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를 피했지만, 그런 모습이 그들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학기 중간에 전학을 온 데에다 1학년마저도 다른 곳을 다니다 왔기에 나는 그 어떤 그룹에도 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에 대한 레퍼런스를 제공할 친구들도 없었다. 내가 스스로 과거에는 나는 육식동물 그룹에 늘 끼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들은 괴롭히기 만만한 혼자 있는 약자들을 찾아다니는 비겁한 하이에나 같은 부류였다. 나는 차라리 아웃사이더가 되기로 마음먹고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대응을 했단 나는 피해자가 될 운명이었다. 단호하게 끊어봤지만, 그것이 되레 그들의 오기를 발동시켰다. 하지만 내가 처음부터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비아냥거리던 말투는 조금씩 거칠어졌다. 거친 말은 조금씩 거친 행동으로 옮겨갔다. 복도를 지날 때 내 어깨를 일부러 치고 지나가거나 체육시간 축구 수업에서는 나를 타깃으로 거친 플레이를 시도했다. 단단하지 못했던 나는 넘어지고 온몸에 멍이 들기 일쑤였다. 어느 날 내가 당번이 되어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길이었는데 하이에나의 리더 서대용이 따라와 나를 협박했다.


“야, 내 말이 말 같지 않냐? 앞으로 나랑 같이 다녀줘야겠어. 오늘 수업 끝나고 남아라. 안 그럼 다 조져버릴 테니까.”


무엇이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갑자기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더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하이에나의 개처럼 그렇게 끌려다녔다. 그 당시 나는 애초에 약해빠진 초식으로 태어나서 그런 일들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운명일 거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 좁은 공간 안에서 쓸데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모든 것이 이렇게 생겨먹은 아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빠의 말을 끊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는 엄마한테 미안한 감정 같은 건 없죠?”


아빠는 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불쾌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엄마한테 미안해야 한다고 생각하냐?”

“엄마가 외로웠을 것 같아서요. 내가 의식이 없던 동안에는 더욱더 그랬을 거고요.”

“또 약해빠진 소리를 하는구나. 엄마는 외로움이 문제가 아니었어. 연약해서 스스로 견딜힘이 없던 거지.”

“그럼 더 신경 쓰고 더 잘 돌봐주면 됐잖아요. 아빠가 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것을 챙기듯 엄마를 챙겨줬다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이 세상은 각자 강하게 살아남아야 해. 그렇게 감정적으로 굴지 마.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제발 걸림돌처럼 굴지 마라.”


아빠는 그렇게 말을 쏘아대고는 입을 닫았다. 냉랭한 분위기가 아빠의 쓸데없는 말을 듣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아빠는 나를 납골당에 먼저 내려주고 권 비서님과 골프장을 향해 떠났다. 1시간 뒤 권 비서님이 나를 픽업하러 온다고 했다.


엄마와 이렇게 오래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엄마의 죽음을 내 눈으로 본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엄마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엄마가 잘 지내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다. 그런 희망이 깨질까 봐 용기를 내어 바로 납골당으로 오지 못했다. 오늘은 엄마의 죽음을 확인하러 온 날이었다. 내가 긴 잠에서 깨어나서 엄마가 없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2달이나 흘렀다. 겁이 나서 입구에 서 있다가 권 비서님 차를 타고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용기를 내어 엄마를 향해 다가갔다.


엄마의 자리는 눈높이를 맞추기 좋은 자리였고 유골함도 최고급으로 보였다. 평소에 엄마가 좋아하는 꽃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권 비서님이 선택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빠가 엄마의 그런 취향까지 기억할 리 없었다. 유골함 옆에 놓인 엄마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를 보며 웃는 것 같았다. 내가 아플 때 같이 아파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아니 나보다 나의 아픔을 더 고통스러워해 주는 그런 존재였다. 이제 그런 엄마는 유리 벽 안에서 환하게 웃어줄 뿐이었다. 이제는 내가 느끼는 고통의 크기에 상관없이 늘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을 것이다. 엄마의 유골함을 보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정말 엄마는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내가 끔찍하게 일을 당하던 피해자라는 것을 엄마가 알지 못했을 텐데. 고통은 나에게서 멈췄을 텐데. 이 모든 악몽의 시작은 내 머리를 가격한 그 자식이다. 아니 가장 처음 지옥문을 열어 준 것은 아빠였다. 중학교 2학년 때 하이에나의 개로 지목되지만 않았어도 그 이후 내 인생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아빠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모두 다 똑같다. 하이에나도 내 머리를 가격한 새끼도 아빠도 모두 나에게는 가해자일 뿐이었다.


용인에 다녀온 나는 슬픔과 분노, 외로움까지 많은 감정에 뒤섞여서 복잡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선명해진 엄마의 죽음이 존재감 있게 나를 압박했다. 엄마와 가장 가까운 기억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나는 2년의 기억을 찾고 싶었다. 골프 약속이 있는 날은 일찍 잠드는 아빠의 습관 덕에 나는 조금 이른 저녁에 VR 탐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네 번째 접속의 시작.

이제는 익숙해져서 요령도 생겼다. 나무에 내가 묶여 있는 모습은 보지 않는 것이 좋다. 시간을 아껴야 한다. 최대한 그쪽은 바라보지 않고 지나치고 그날 열고자 하는 문을 상상하면서 걷는다. 그럼 순간이동을 하는 것처럼 빠르게 그날의 목적지까지 움직일 수 있었다. 덜컹거리는 소리는 좀 작게 들렸다. 이미 개봉된 3개의 문이 폐허처럼 힘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네 번째 문은 손잡이를 돌렸더니 바로 열렸다. 아무런 방해 없이 쉽게 열리는 것이 더 오싹한 데? 이 방은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로 온통 하얗다. 너무 눈이 부셔서 어디로 걸어갈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직진했다.


쉭-

뭔가 내 볼에 생채기를 내며 지나갔다. 날쌘 바퀴벌레 같기도 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온통 하얀색뿐이다. 앗. 이번에 이마다. 벌레가 아니라 날카로운 흉기였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의도적으로 던지고 있었다. 자세를 낮춰서 걸어갔다. 다른 검은 물체가 나에게 날아오는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피했다. 그것은 뒤쪽 벽을 파고들어 꽂혔다. 가까이 다가가서 그것을 확인했다. 글자가 적혀있는 검은 철판의 이름표였다.


[고자 새끼]


서대용 무리한테서 많이 듣던 욕이었다. 그 문장을 읽으니 기분이 엿 같아서 바닥에 떨어뜨리고 발로 사정없이 밟았다. 얇은 철판은 금세 찌그러졌다.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이번에는 몇 개의 철판이 동시에 내 머리카락을 스쳐 뒤로 꽂혔다.


[좆밥] [저능아] [졸부새끼]


이 단어들에 익숙했다. 내가 2년 동안 수없이 들었던 말들인가 보다. 익숙한 단어들을 보자 반사적으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누군가 비겁하게 내가 잘 보이는 곳에 숨어서 나를 자극할 말들을 던지고 있었다. 정정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나를 공격하고 있다. 역시 치사함이 일관되게 드러나고 있다.


“비겁하게 숨어있지 말고 나와. 이 새끼야.”


내가 지른 소리에 온통 하얗던 벽들이 지진이 난 듯 흔들리면서 무너졌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을 벌려 중심을 잡기 위해 집중했다. 무너진 하얀 방은 오늘 다녀온 납골당 입구로 변해 있었다. 뭐지? 현실인가? 내가 낮에 갔던 그곳에서 집에 오지 않는 건가? 아직 악몽의 메타버스야? 순간적으로 현실과 가상이 헷갈렸다. 손목의 밴드를 보고 가상임을 깨달았다. 자명이 만든 나의 악몽의 메타버스는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었다.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교복을 입은 남학생의 두 명의 뒷모습이었다. 그들은 엄마의 납골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을 왠지 막아야만 할 것 같아서 달려가는데 바닥에 끈적끈적한 것이 붙어 있는 것처럼 내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 자식 엄마 눈깔이 이상하지 않냐?”

“그 표정 봤어? 너희 엄마 혹시 정신병자 아니냐고 했더니 그 새끼 눈깔이 똑같이 변하더라.”


저 자식들이 우리 엄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엄마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소리쳐보지만 몸이 나아가질 않았다.


“그깟 가방에 낙서했다고 학교까지 찾아와서 그 난리를 쳤잖아. 내 가오가 바닥에 떨어졌어. 존나 쪽팔려.”

“시발 년이 뭔데 쪽 팔리게 해. 눈깔도 정상이 아닌 년이.”


악마의 자식들이 틀림없었다. 제발 멈춰. 차라리 나를 찔러. 나를 패. 나를 죽여. 연약한 엄마는 건드리지 말라고. 어느새 엄마의 유골함 앞에 그들이 멈춰 섰다. 그들을 낄낄거리며 유골함을 보호하고 있는 유리창을 주먹으로 치기 시작했다..


“나 쪽 팔리게 하고 저기서 쪼개고 있는데? 더 세게 쳐.”


무슨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신이 나서 유골함의 유리창을 부수려 한다. 무거워진 내 다리를 반드시 옮겨야 했다. 나는 짐승처럼 포효했다.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내가 뒤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주머니를 뒤져봤다. 잭나이프가 만져졌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칼을 펼쳐 그들을 향해 던졌다. 빗나갔다. 다시 주머니에 또 다른 잭나이프가 만져졌다. 다시 던졌다. 세 번째 던졌을 때 한 놈의 등에 칼이 꽂혔다. 그 자식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다른 한 명도 같이 고개를 나에게 돌렸다. 엄마에게 모욕적인 말을 내뱉던 입만이 입꼬리가 올라간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얼굴 없는 두 사람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징…. 알람이 울렸다. EXIT.

엄마를 모욕하던 그 자식들이 생각나서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심장이 갑갑하게 쪼여 와서 손으로 가슴을 쳤다. 소리 내어 속에 있는 감정을 풀어버리고 싶었지만, 이 고요한 집에서 차마 소음을 낼 수 없었다. 이불속에 얼굴을 파묻고 분노를 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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