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을 만나고 난 뒤, 최대한 빨리 접속을 시도하고 싶어서 조바심이 났다. 몇 개월 동안 지속하여 온 이 지긋지긋하고 답답한 안갯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새벽부터 눈이 자동으로 떠졌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1층에서 작게 들려오는 아빠의 출근 준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만 들어도 어떤 위치에 있는지 예측이 가능했다. 늘 같은 루틴으로 아침을 준비하는 아빠였다. 아빠가 출근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2층으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아빠의 향수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아침에도 저렇게 나를 감시하고 가는구나. 역시 여러모로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
7시 30분. 정확히 아빠는 출근했다. 나는 대충 고양이 세수를 하고 토스트를 집어 먹으러 내려가려던 참이었다. 징- 문자가 도착했다. 아침에는 나에게 연락해 올 사람은 권 비서님밖에 없었다. 나의 픽업 시간에 변동이 생겼나 싶어서 문자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문자] 어제 그 사람은 잘 만났어?
내 번호를 아는 사람은 빤한데 누구지? 질문으로 미루어 보아 동제인 것 같았다. 동제한테는 내 번호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았을까? 그렇다고 이런 질문에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느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나는 동제와 멀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동제의 사회성이 발달한 인간이므로 학원 카운터에 내 비상 연락망을 물어봤을 수도 있다. 어제 나에게 쪽지를 준 이후로 서로 보지 못했으니 내가 걱정됐을 수도 있었다. 동제는 충분히 그런 사람이었다.
[문자]네, 덕분에요. 감사해요. 수업 시간에 뵐게요.
나는 몇 번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더는 동제에게는 답이 없었다. 마지막 문을 열어야 하므로 휴대전화를 붙잡고 있을 시간은 충분치 않았다. 나는 하루 먼저 내가 찾아낸 ‘안전한 시간대’에 자명이 준 칩으로 기기를 업로드를 완료했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만난 안전한 시간대에 접속을 시도했다.
눈앞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흰 약을 꿀꺽 삼켰다. 순간이동을 해서 악몽의 메타버스에 도착했다. 곧바로 다섯 번째 문으로 바로 직행했다. 내 앞에 보이는 문은 여전히 덜컹거렸다. 다시 버그가 발생하지는 않겠지? 약간의 긴장이 몰려왔다. 하지만 오늘은 이 문을 반드시 열겠다는 의지로 충만했다. 최대한 이 상황에 집중했다. 어떻게 문을 열지 고민을 하려던 찰나, 덜컹거리던 문이 작은 틈 하나를 남겨두고 멈췄다. 일부러 누군가 열어둔 것처럼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문을 열기도 전에 문틈에서 밧줄 하나가 튀어나왔다. 나는 문을 열고 밧줄을 따라갔다. 밧줄은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조금씩 움직이며 나를 안내했다. 저 반대편 어둠 속에서 누군가 밧줄로 나를 유인하고 있었다. 유인한다면 원하는 대로 끝까지 따라가 주겠다는 마음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이제 마지막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겁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 문 끝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집중해서 밧줄을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불현듯 눈앞에 있던 밧줄이 사라졌다. 뒤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공간이 바뀌어 있었다. 나는 어느새 좁은 골목길에 홀로 서 있었다. 사방이 어두운데 가로등이 놓여 있어서 주변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낡은 벽 옆에는 벽으로 바싹 붙게 주차한 봉고차 한대가 서 있었다. 봉고차가 주차된 벽은 페인트칠이 벗겨진 회색 벽이었다. 벽의 높이는 2미터가 훌쩍 넘어 보였다. 주차가 되어 있는 벽의 반대편에는 검은 철제문이 열려있었다.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벽 위에서 무언가 날아와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소리가 난 쪽은 바라봤다. 벽 위쪽에서 사람의 얼굴이 들어갈 만한 크기로 매듭지어져 있는 줄이 벽에 걸쳐져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 줄을 던진 것이었다. 누군지 확인하려고 벽 끝에 있는 검은 문을 열고 벽의 안쪽으로 향했다. 벽의 안쪽에는 아무도 없고 계단 3개 높이의 단상만이 놓여 있었다. 줄은 묵직한 돌에 묶여서 고정되어 있다. 주변을 더 살피기 위해 나는 단상으로 올라갔다.
컥컥.
벽 아래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벽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머리통이 보였다. 누군가 밧줄에 매달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다급한 마음에 줄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버둥거리는 사람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위쪽에서 당기다가는 목을 더 조이게 만들 수도 있었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도 그 사람을 언제까지고 잡고 있을 수 없었다. 이 끈을 끊어야만 한다. 변수개체를 찾기 위해 서둘러 주머니를 뒤졌다. 제발 뭐라도 잡혀라. 그래. 오늘도 잭나이프다. 일단 줄을 끊어냈다. 끊어내고 아래를 다시 내려다봤다. 바닥에 기산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아, 내가 다니던 학교의 교복이다. 나는 다시 벽의 바깥쪽으로 가서 남자를 살폈다. 목에는 줄이 패인 상처가 나있었다. 남자를 흔들어 깨웠다. 시발, 나다. 마지막 문 안에도 내가 고통받고 있었다. 대체 문 안에는 다 이 따위 내 모습밖에 없는 건가? 대체 내 기억에 무엇이었기에 이 따위 악몽들만 펼쳐지는 거지? 가해자 이 개새끼들. 대체 나한테 어떤 짓을 했단 말인가? 끌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개새끼야 숨지 말고 나와.”
어두운 골목길에 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메아리로 돌아온 내 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다시 벽에는 컥컥거리며 발버둥을 치는 내가 매달려 있었다. 이미 한번 몸이 매달렸던 정민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다시 벽 안쪽 단상으로 올라가서 줄을 끊어냈다. 먼저 쓰러진 정민의 위로 또 따른 정민이 쓰러졌다. 시발. 이 개자식들. 욕을 다 끝낼 틈도 없이 다시 정민이 버둥거렸다. 다시 끊는다. 정민이 쌓여가고 있었다. 가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괴로워서 버둥거리는 정민을 모른척할 수가 없었다. 힘이 빠질 때쯤 이제는 새로 매달리는 정민이 나타나지 않았다. 당산나무에 소원을 빌기 위한 돌탑처럼 정민이들은 축 처진 채 내 앞에 쌓여있었다. 나는 벽에 기대에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시발, 이따위 꿈이 다 뭔데. 내 기억이 뭔데. 분노할 틈도 없이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누군가 전력 질주를 하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도망치려고 일어났다가 그 새끼를 얼굴을 마주하려고 다리를 벌려서 버티고 기다렸다. 비열하게 웃는 입만이 헉헉거리며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역시 얼굴은 누군가 지우개로 뭉개져 지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했다. 그는 내 앞에 멈춰 섰다. 손을 뻗어 내 목뼈를 있는 힘껏 잡았다. 나는 컥컥 대며 차가운 벽으로 밀렸다. 나는 두 손으로 그 자식의 손을 빼려고 안간힘을 썼다. 간신히 발로 그 자식의 배를 가격했다. 그 자식은 꽉 쥐고 있던 내 목을 놓치고 뒤로 넘어졌다. 다시 나의 목을 조르려고 나에게 돌진했다. 나도 이번엔 손을 뻗어 상대의 목을 잡았다. 우리는 서로의 목을 잡고 대치했다.
“너 대체 누구야.”
목이 조여 와서 겨우 말을 내뱉어 보았다. 하지만 그 자식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우리는 서로 버티며 대치하고 있었다. 나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승부를 봐야 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나는 한 손으로는 그 자식의 목을 놓치지 않고 잡은 상태에서, 왼손의 밴드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가로등 아래 버려져 있는 쓰레기더미 옆에 버려진 거울이 보였다. 상반신을 비출 수 있는 거울이 벽에 세워져 있었다. 원래 거울이 있었나? 변수 개체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앗 잠깐, 근데 왜 내가 내 목을 조르는 것처럼 보이지? 다시 그 자식 얼굴을 봤다. 여전히 얼굴이 뭉개져서 입만이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다시 거울을 봤다. 시발. 뭐야. 왜 내 얼굴이. 정민이는 이미 마주쳤잖아. 나는 순간적으로 있는 힘껏 그 자식의 목덜미를 잡아끌어 거울 앞으로 얼굴을 끌어내렸다. 거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나에게 목덜미를 잡힌 상태의 그 자식의 얼굴이 정면으로 거울을 향했다. 영락없는 내 얼굴이었다. 거울 속 나는 나를 보면 비웃고 있었다. 나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삐- 알림이 울렸다.
안 돼. 아냐. 내가 아냐. 내 얼굴, 아니 그 자식의 얼굴을 비추던 거울이 깨쳤다. 와장창. 거울이 기대어 있던 벽, 쌓여있는 정민, 어두운 골목길 모두가 무너져 내렸다. 늦기 전에 EXIT를 눌러야 한다. 탈출해야 한다. 일단 탈출을 하고 이 상황을 정리해 보자.
하지만 탈출은커녕 끝도 없이 밑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아직 꿈속인가? 나는 아직 문 안에 있는가? 내가 EXIT를 열었나? 내 방인가? 수많은 물음이 나를 압박했다. 나는 여전히 계속 추락하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바닥으로 끝없이 추락 중이었는데 거대한 거인이 추락하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나는 공기의 저항을 느끼며 그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심장이 멎을 뻔했다. 동제였다. 왜 동제가 내 메타버스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변수 개체인가? 추락하는 나를 구하러 온 변수 개체임이 분명했다. 나는 마지막 희망으로 손을 뻗어 보았다. 끝도 없는 추락 속에서 나를 구해줘. EXIT 할 수 있도록 도와줘. 동제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낯설다. 화가 난 건가? 동제를 화나게 했던 일은 없었는데 이상했다. 동제 옆에 누군가 서 있었다. 아,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봉인되었던 모든 기억의 빗장이 풀렸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기억이 한순간에 풀려 버렸다. 시발. 성제의 얼굴이었다. 네가 왜 거기 서 있어? 왜 동제 옆에 서 있는 거야. 그토록 원하던 진실을 감당하지 않고 그대로 죽어 버리고 싶었다.
동제의 검은 워커가 나를 향해 낙하하고 있다. 마치 내가 바닥에 기어 다니는 벌레처럼 보이는지 나를 짓이기려 한다. 눈을 감았다. 나를 죽여줘. 이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