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밀도 Oct 27. 2024

4장. 봉인된 기억(5)

그날 옥상에서 동제와 마주하고 난 뒤, 나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오는 모든 빛을 차단하고 틀어박혀 있었다. 이따금 아빠가 와서 정신 차리라고 화를 내고 윽박지르기도 했지만 나는 꼼짝하지 않았다.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숨을 쉬는 것도 괴로웠다. 그러다 허기가 지면 가사 도우미가 방 안으로 넣어두고 간 음식을 허겁지겁 먹었다. 그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잠을 잤다. 암막 커튼을 친 방안은 낮인지 밤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시간의 개념을 잃어버렸다. 아빠와 권 비서님, 가사 도우미가 현관문을 오가는 소리로 시간을 인식할 뿐이었다. 시간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알고 싶은 의지도 사라졌다. 자명이 만들어준 악몽의 메타버스는 모두 무너져 내렸는데, 나는 현실의 악몽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눈을 뜨고 숨을 쉬는 것 자체가 악몽이었다.


손톱과 수염, 머리카락의 무게가 느껴졌다. 내 몸에 발산하는 악취에 익숙해져 갔다. 가사 도우미는 이제 음식을 문 앞에 두고 1층으로 내려갔다. 내 악취를 견디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정민 학생, 친구가 찾아왔어요. 멀리서 왔으니 잠깐 들어가도 되죠?”


문 앞에서는 가사 도우미와 저음의 목소리가 대화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한 달을 씻지 않고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어요. 냄새가 좀 역할 텐데.”

“괜찮습니다.”


둘은 작게 속삭이며 대화했다. 동제의 목소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침대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긴장한 상태로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잊었다고 생각했던 행동의 기억들이 수치스러웠다. 나를 죽이러 왔을까? 내가 성제의 목을 졸랐던 것처럼 동제는 내 목을 조르기 위해 온 것일까? 혹은 내 뒤에서 다시 머리를 가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를 빨리 죽여주기를 기다렸다.


“기회를 주러 왔어. 성제한테 사과할 기회.”


성제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제야 성제에 대한 연민과 미안함이 터져 나왔다. 괴롭히던 순간에는 이를 악물고 버티는 성제에게 분노가 치밀었는데 이제는 너무 미안해서 죽고 싶었다. 이불은 뒤집어쓴 채 온몸을 들썩거리며 눈물을 쏟았다. 동제는 내 책상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내 울음이 잦아들자 동제는 말했다.


“다시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일어나 앉아.”


나는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을 들은 것처럼 자세를 고쳐 앉았다. 워커를 신지 않는 동제의 발이 어색했다. 어둠 속에서 동제의 눈만은 번뜩였다. 동제의 손에는 자명에게 받았던 VR기기와 동일한 모델이 들려 있었다. 내가 받았던 것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으니 저건 새로운 기기였다. 


“여기 성제의 기억이 들어있어. 너한테 소개해준 프로그래머가 성제가 죽기 전에 넣어줬어. 너희 아빠가 다른 피해자들의 기억은 사 갔지만 성제 기억은 얻지 못했어. 감히 어떻게 성제의 기억을 요구하지? 뻔뻔스럽게. 네 뇌파 속 기억이 불안전했던 것도 그 이유야. 비어있는 성제에 대한 너의 기억을 여러 기억으로부터 짜깁기했겠지. 그래서 사실 일이 더 수월하게 풀리긴 했지. 안 그랬음 꽤 오래 걸렸을 테니까. 성제가 너희 때문에 반병신 되고 매일 악몽을 꿨어. 지옥을 본 것처럼 꿈에서 깨면 바들바들 떨었어. 너 같은 악마 새끼들은 성제가 안 보여도 신경 쓰지도 않았을 거야. 그날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놓고 말이야. 성제는 스스로 목숨을 포기할 아이가 아니었어. 근데 너희가 선물해준 악몽에서 도망치려고 자살 기도를 한 거지. 세상이 정말 좆같아. 차라리 바로 죽었으면 성제한테 고통이 없었을 텐데, 자살 기도를 하고 죽어가는 성제를 내가 바로 발견해서 사흘을 버티다가 죽었어. 사경을 헤매는 성제의 기억을 간신히 저장해놨어. 그렇게 내 동생을 영원히 잃을 수 없었으니까. 특별히 사과할 기회를 줄게. 성제도 사과는 받아야 하지 않겠어?”


동제의 말은 거부할 수 없었다. 한 편으로는 어떤 방식으로든 성제에게 사과하고 나면 이 지옥이 조금 나아질 수 있었다. 성제의 세계가 자명이 만들어준 저 기기에 모두 존재했다. 성제는 그 안에서 매일 자유롭다고 동제는 말했다. 나는 동제가 주는 알약을 말없이 삼켰다. 아무리 실존하는 성제가 아니라고 해도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은 없었지만 달리 피할 방법도 없었다. 나는 무언가를 선택할 자격도 없었다. 나는 익숙하게 VR을 장착했다.


오랜만에 먹은 흰 약은 잠들어 있던 모든 감각을 깨웠다. 어두웠던 나의 악몽과는 다르게 눈앞에 초원이 펼쳐졌다. 성제의 세계는 동화 속에 나오는 마을 같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초원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작은 언덕을 넘어 평평한 들판에 이르자 사람 몸 크기만 한 하얀 마시멜로들이 곳곳에 굴러다녔다. 뛰다가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 안전한 세계로 보였다. 눈앞에 보이는 마시멜로를 만져봤다. 말랑하고 몰캉하고 부드러웠다. 달콤한 향기도 풍겨 오는 것 같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부드러움에 마음이 동하여 용기를 내어 쓰다듬었다. 둔하게 움직이던 하얀 마시멜로 사이로 갑자기 날카로운 가시가 튀어나왔다. 하마터면 튀어나온 가시가 나의 눈을 관통할 뻔했다. 따뜻했던 마시멜로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했다. 뒷걸음질 쳐서 도망치려다 다른 거대한 마시멜로에 부딪혔다. 푹신한 마시멜로는 나를 탄력 있게 밀어냈다. 눈앞까지 튀어나왔던 가시는 조금씩 크기를 키우더니 마시멜로를 비집고 나왔다. 가시가 제 존재를 강하게 드러내는 순간 마시멜로는 팝콘처럼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가시는 커다란 나무에서 나온 줄기였다.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시지만, 돌도 뚫어버릴 것 같은 강철처럼 보였다. 자칫하면 엄청난 무기로 변할 수 있었다.


단단하고 위협적인 가시들이 뻗어 나온 나무 가운데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색 옷을 입은 성제였다. 멀리서도 성제의 눈빛은 또렷하고 강렬했다. 강렬한 눈빛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던 연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무가 뒤에서 성제를 보호해주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빨리 사과를 하고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혀끝에서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단어를 망설이다가 겨우 뱉었다. 내가 미안하다고 말할 자격도 없는 것 같아서 그 순간에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성제야, 미안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날카로운 나무줄기 하나가 내 얼굴로 날아와 생채기를 냈다. 볼에 액체 같은 것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나무줄기는 물러서지 않고 나를 향해 달려왔다. 잡히면 꼼짝없이 나를 묶어둘 것 같았다. 내 악몽의 메타버스에서처럼 다시 나무에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이 고통을 다 열었지 않았는가?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 하지만 멀리 도망갈 수는 없었다. 이곳은 나의 메타버스가 아니어서 변수 개체도 보이지 않았고 나에게는 불리했다. 결국 나무줄기들이 나를 잡아 몸통을 꽉 조여 작은 나무에 묶어 놨다. 성제는 그런 나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다가왔다. 학교에서와는 입장이 전혀 달라진 상태로 우리는 마주했다. 성제의 눈빛에 따라서 나무줄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나의 숨통을 조여 왔다. 숨을 쉴 수 없어서 캑캑거리며 성제를 불렀다. 줄기들이 성제의 지휘에 따라 느슨해지고 조이기를 반복했다. 그런 내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보다가 나무들 사이로 자유롭게 빠져나가더니 내 시야에서 벗어났다.


나는 다시 내 악몽의 메타버스에서처럼 나무에 매달려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다. 성제가 나의 사과를 받은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성제가 사라지고 나자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파란 하늘은 시꺼멓게 변해서 비바람이 몰아쳤다. 비바람이 몰아치자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너무 추웠다. 나무줄기가 갑자기 나를 풀어주면서 나는 땅바닥에 철 퍽하고 떨어졌다. 빨리 도망가야 했다. 그제야 성제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사방이 어둡고 흐려지니까 성제는 더욱더 하얗게 빛나 보였다. 성제는 조금씩 나에게 다가왔다. 그런 성제가 두려워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나의 사과를 받아들였다는 뜻일까? 


“서…성제야.”

“이제야 사과하고 싶다고?”

“네가 그렇게까지 될 줄을 몰랐어. 미안해.”

“두려움에 떠는 나를 지켜보는 게 재미있었겠지. 그때는 내가 어떤 반응도 못 했지만 오늘은 내 답을 알려줘야겠네?”


성제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사실 성제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었다. 우리는 항상 일방적으로 성제를 괴롭혔고 성제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이렇게 서로 눈을 마주치며 성제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친절이 묻어있던 동제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인제 보니 둘은 닮은 점이 많았던 형제였다.


성제는 한발씩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피했다. 성제는 그럴수록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성제가 손을 들어서 내 목을 잡았다. 성제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정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나는 피할 자격이 없었다. 성제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나의 목은 성제에게 잡힌 채 위로 올라갔다. 성제는 나를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이대로 그냥 숨을 멈춰도 상관없었다. 내 몸은 반사적으로 발버둥 치고 있었다. 이 고통은 곧 끝나겠지. 나의 숨통을 끊어줘. 어느 순간 나는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한기가 느껴져서 눈을 떠보니 나는 나무에 묶인 채 허허벌판에 있었다.


죽지 않았다면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성제를 불러봤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성제는 다시 내 앞으로 와서 내 목을 잡고서 강하게 쥐었다. 그리고 나는 또 정신을 잃었다. 몇 번이나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매일 반복되었던 악몽처럼 내가 마지막으로 성제에게 했던 가해가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동제의 말대로 성제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성제는 나의 사과를 받아줄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악몽처럼 반복되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졌다. 나는 단지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 이렇게 꼼짝하지도 못한 채 반복되는 고통은 견딜 수 없었다. 그날 옥상에서 동제를 밀치고 옥상으로 뛰어 내려야 했다. 그럼 모든 것이 사라졌을 것이다. 나는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서 모든 것을 끝내기로 했다.


EXIT 버튼을 누르고 나가려고 손목을 더듬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뭐지? EXIT 버튼이 없다. 동제가 나를 꺼내주려나? 내 의식을 집중해서 동제를 불러보았다. 접속 중인 내 현실에서의 몸이 반응해주길 바라면서 몸을 움직여 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현실도 메타버스에서도 움직임에 대한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다. 내 목을 다시 조르기 위해 성제는 다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에 빠져나갈 방법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악몽에서 벗어나서 기억을 되찾으려고 발버둥 쳐왔는데 다시 나무에 묶여 있는 신세가 되었다. 악몽보다 더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난 채 말이다.


다시 나는 정신을 잃었다. 성제의 메타버스에서 정신이 돌아왔을 때, 나는 온 힘을 끌어서 발끝을 움직였다. 분명히 현실에서의 내 몸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동제의 음성이 들렸다.


“애를 많이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이제 소용없어. 지금 접속해 있는 곳은 탈출구가 없거든.”


동제의 목소리가 어두운 메타버스에 울려 퍼졌다. 나는 아직 내가 여기 있고 동제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고 꺼내 달라는 의미로 손가락과 발가락을 까딱였다.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책임도 지지 않고 죽을 수도 있으니까. 미안하지만 그것만은 절대 허락할 수 없어. 알고 있지? 너는 죽을 자격 없다는 거. 성제에게 영원히 사과를 빌어. 받아줄지는 모르겠지만. 굿럭.”


안돼. 이대로 나를 두고 가면 어떻게 해. 더 몸부림치려는데 성제의 목이 어느새 다시 턱 밑에 있었다. 다시 나는 캑캑거리다 기절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저 멀리서 희미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최대한 집중을 했다. 동제와 가사 도우미의 목소리였다.


"피곤해서 잠들었나 봐요. 저는 가보겠습니다."

"학생. 차라도 마시고 가지. 먼 길 왔다면서.”

“저는 괜찮습니다. 정민이나 잘 챙겨주세요."

“에구, 고마운 친구네. 조심해서 살펴 가요.”


동제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동제. 나를 이렇게 놔두고 가면 어떻게 해. 이렇게 하려고 온 거였다. 나를 이 속에 가둬놓으려고. 내가 스스로 죽을까 봐 겁이 났냐? 이 겁쟁이 같은 새끼야!


“학생은 이름이 뭐예요? 혹시 사장님이 누구 왔느냐고 하면 알고 있으려고."

"성제요. 이성제. 정민이랑 학교 다닐 때 친했다는 거 아실 거예요."


시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거기 누구 없어요? 나를 좀 꺼내줘요. 이제 다 끝내고 싶어. 그냥 다 포기하고 죽고 싶어. 이건 너무 하잖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성제의 메타버스 세계로 들려온다.


쾅. 


                    

이전 18화 4장. 봉인된 기억(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