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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밀도 Apr 11. 2021

01. 증강 노인이 되기로 결심하다

노인 재정

재정

"(뉴스) 속보입니다. 정부에서 “증강 노인 프로젝트”를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몇 년간 극비로 연구된 증강 노인 프로젝트의 결과로 전세계 유일무이한 ‘증강 주사’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2025년 고령화 사회를 넘어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대한민국은, 유례 없는 생산인구 부족 문제와 노인층에 대한 연금 지급 문제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에 정부는 노인들의 생산활동을 다시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증강 노인 프로젝트’에 지금까지 예산 10조원을 투자했습니다. 올해 유의미한 연구 결과가 확인됨에 따라 정부는 적극적으로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습니다."     


시곗바늘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9시 30분을 향해 간다. 재정은 영 입맛이 없어 아침을 건너뛰고 털썩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지친 상태로 집으로 돌아와서 습관처럼 TV를 켰다. 간밤에 딸 지민이 언급했던 ‘증강 노인 프로젝트’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온다.     


이어 기자와 뉴스 앵커가 한 테이블에 앉아 증강 노인 프로젝트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시작한다. 재정은 자세를 고쳐 앉은 뒤, TV의 볼륨을 키웠다. 어제 지민이가 증강 노인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피곤하고 기력이 달려서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유난히 무거운 몸을 소파에 의지하고 있노라니 노인이 되어버린 자신을 되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왔을 뿐인데, 재정에게는 커피 믹스를 타 먹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뉴스) 지난 10년간 정부의 핵심관계 부처들이 TF를 구성하여 연구한 성과입니다. 세계 최초로 진행되는 이 프로젝트는 오랜 시간 초고령화 사회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유럽, 미국 등지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TF의 연구 내용을 간단히 설명해 드리면, 성장 호르몬을 각성시키는 주사를 개발한 것입니다. 단, 부작용 없이 효과를 볼 수 있으려면 성장 호르몬 수치가 중요합니다. 평균적으로 60대에 진입하면 신체에서 생성하는 성장 호르몬이 20% 이하로 떨어집니다. 20%이하의 성장 호르몬 조건에 맞는 만 65세 이상의 노인에 한하여 증강 주사를 맞을 수 있습니다. 성장 호르몬 수치가 20%이하로 떨어져야 증강 주사와 컨플릭 (Conflict)반응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약 성장 호르몬이 활성화되는 경우라면 오히려 암세포가 생기거나 커지는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파란색 셔츠에 붉은 넥타이를 한 기자는 차근차근 설명한다. 실제로 시력은 나쁘지 않지만, 지적인 이미지를 위해 액세서리처럼 안경을 착용한 기자는 가장 큰 변화는 두뇌활동의 활성화라고 했다. 재정은 그 말에 귀가 솔깃했다. 65세 생일이 지나고 나서부터였을까, 먼 옛날의 일들은 쓸데없이 사소한 일들도 기억이 나는데, 부쩍 차 키나 휴대폰을 어디 두었는지 깜박하는 일들이 잦아졌다. 5살이 된 ‘한이’가 더욱 힘이 넘치고 있어 체력이 부족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체력만 잘 관리해주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난주에는 한이를 데리러 어린이 집으로 가는 길에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이 안 날만큼 멍해져 한 참을 제자리에 서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지만 치매가 벌써 온 것인가 싶어 두려움이 엄습했다. 젊은 시절, 버거운 일상을 버티기 위해 가족들 몰래 몸에 쏟아 부었던 알약들의 부작용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딸 지민은 재정의 이번 일로 한이가 위험해질 상황을 만날까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가볍게 이야기 했던 증강노인 프로젝트를 신청해보자고 적극 설득하고 있었다.      


재정은 새로운 것을 시도한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기억나지 않았다. 뉴스는 특집 코너를 마련해서 20분이나 증강 노인 프로젝트에 대해서 소개했다. 아침 뉴스에 특집 코너를 마련한 것은 이제는 생산활동을 하지 않고 아침잠을 잃어버린 노인들을 겨냥한 것이리라. 하지만 프로젝트라는 말이 너무 거창해서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때 휴대폰을 찾아 두리 번 거리다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툭 떨어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재정은 단축번호 ‘1번’을 꾹 눌러 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한참 지난 뒤에야 받았다.    

 

"어이, 어쩐 일이야?"     


"그냥 잘 지내나 하고 전화했어."     


"그냥은 무슨, 무슨 일이 있구먼. 잠깐만. 지금 밭이어서 장갑 좀 벗고."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더니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이는 어린이 집 보냈고?"     


"응, 요즘 부쩍 체력이 달리네. 나도 늙었나 봐. 기억력도 신통치 않아."     


"그러게, 그냥 여기 내려와서 같이 산이나 보자니까. 뭐 당신은 도시를 좋아하니까. 근데 무슨 일이야?"     


진수와 재정은 30년을 넘게 부부로 같이 살았다. 재정이 어느 정도 카피라이터로 인정받았을 무렵, 규모가 큰 클라이언트를 담당하게 되었다. 진수는 클라이언트 회사의 막내이자 연락 창구였다. 재정은 히트 카피를 여러 건 성공시킨 인정받는 카피라이터였지만 깐깐하기로 소문난 클라이언트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선배들과 밤을 새워 새로운 카피를 계속 만들어 냈다. 그래도 수정사항이 끊임없이 발생하여 다른 어떤 프로젝트보다 클라이언트와 연락을 자주 주고받았다. 차갑고 지랄 같은 성격을 가진 클라이언트의 담당 부장과는 다르게 진수의 눈빛은 따뜻했다. 진수는 재정을 위해 자신의 상사 욕을 같이 해주며 밥도 사고 술도 사줬다.     


“재정 씨, 카피가 너무 제 스타일이에요.“     


진수는 소주 2잔에 취해서는 혀가 꼬인 채 말을 했다.   

    

“하.. 그럼 뭐해요? 컨펌할 사람이 마음에 들어 해야지. 그렇게 깐깐한 클라이언트는 처음이에요.”    

 

“저도 그런데…… 저도 처음이에요. 제 이상형 만난 거……” 


진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앞에 있는 접시로 얼굴을 포개고 잠이 들었다. 새로운 카피를 만들어 내기 위해 일상을 쥐어짜고 있던 날, 진수는 재정에게 다가왔다.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재정과 진수는 결혼했다. 깐깐하던 재정의 클라이언트이자 진수의 상사는 통 큰 축의금을 냈다. 그렇게 시작한 둘은 30년을 꼬박 채우고 서로 합의하여 결혼의 마침표를 찍었다. 졸혼. 그것은 진수와 재정에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별다른 이벤트 없이 평범했던 저녁, TV에서 ‘졸혼’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마침 재정은 수박을 썰어놓은 통을 꺼내어 TV를 탐색할 참이었고, 진수는 소화가 되지 않아 소파에 잠시 쉬다가 산책하러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TV에서 졸혼한 부부의 인터뷰를 보자, 둘은 마치 그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처음부터 앉아 있던 사람들처럼 몰입해서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탄성을 질렀다. 그렇게 재정과 진수는 60분을 집중해서 봤다. 다큐멘터리가 끝나자마자 서로 무언가 통했다는 듯이 눈이 마주쳤다. 둘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졸혼을 실행에 옮겼다. 진수는 은퇴 전 회사에서 꽤 인정받는 직원이었다. 중간중간 성과급을 두둑하게 받아둔 덕에 노후 자금을 성실히 준비했고, 지금은 둘 앞으로 나오는 연금을 공평하게 나눠 쓰고 있다. 재정은 도시를 떠날 수 없었고, 진수는 이제 도시라면 넌덜머리가 난다며 지방의 작은 주택을 구해서 서울을 떠났다.      


"요즘 당신도 뉴스는 보지? 정부에서 한다는 ‘증강 노인 프로젝트’ 말이야. 나 신청해볼까? 어제 지민이가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네. 그게 치매가 오면 아예 효과가 없대. 나 요즘 자주 깜빡해."     


"칠십도 안 된 사람이 무슨 치매야. 치매 걱정 때문이라면 좀 더 생각해보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바로 해 봐. 그때 당신 하고 싶은 거 다 못했잖아. 나도 늘 마음의 짐이었어. 아마 지민이도 그래서 하라고 하지 않았겠어? 나도 신문에서 봤는데, 정부가 돈 다 대주는 대신 취업해야 한다며. 그 옛날처럼 멋진 카피 한번 만들어 봐."     


재정은 진수 말을 듣고 있는데 이유도 모르는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메마른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눈물이라니 당황스러워서 들키지 않으려고 TV 소리를 크게 올렸다. 진수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 ‘박재정 과장’이라는 이름을 잃고 ‘지민이 엄마’가 된 상실감을 약으로 버텼던 날들을. 메마르고 갈라진 재정의 피부로 흐르는 눈물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결심했다. 새로운 도전을 해보겠다고. 증강 노인이 되어서라도 자신을 다시 찾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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