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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밀도 Apr 11. 2021

02. 아슬아슬한 일상

청년 지민

지민



"어제 다 결정된 것 아니었어요? 알겠어요. 내일 아침 다시 회의 소집하고 수정하겠습니다."     


지민은 밤 10시가 넘어서 상사의 전화를 받았다. 조금 전 클라이언트가 연락해서는 카피 중간에 있는 ‘앞으로 나아가는’이라는 문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단다. 자신들의 기업 이미지는 다소 보수적인데 그 문구는 자칫 진보적인 느낌을 줄 것 같다는 이유였다. 지민은 한이 옆에서 오랜만에 눈을 붙이고 마음 편히 잠들고 싶었는데, 짜증이 나듯 몸을 일으키고 아이패드에 몇 가지 대안들을 적어두었다. 출근길에 조금 더 생각해서 아침 일찍 문서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지민은 새벽 출근이 불가피하여 늦은 시간이지만 엄마 재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자고 있었어? 미안해요. 나 내일 급히 새벽 출근. 내일 조금만 서둘러 와 줘요.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 여기서 주무시는 건데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네. 내일 6시까지만 와주면 돼."     


알았다고 말하는 재정의 목소리에 피곤함이 묻어났다. 지민도 클라이언트의 일정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일상에 고단함이 밀려왔다. 이번 프로젝트는 내일 아침까지 카피가 확정되어야 납기를 지킬 수 있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더구나 이번 주는 하루 연차를 내고 엄마 재정과 함께 병원을 찾기로 했다. 증강주사를 신청해 놓은 것이다. 요즘 들어 재정은 작은 것에서부터 깜박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엄마 재정은 항상 바빴지만, 기억력 하나는 끝내줬다. 재정의 기억력 앞에서 지민은 요령을 피울 수 없었다. 스쳐 가는 대화 중에 언급되었던 친구들의 이름도 몽땅 기억했다. 이런 지민은 엄마 재정에게 갑갑함을 느꼈다. 재정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재정은 자신을 키우는 것도 회사 일처럼 처리했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그때의  재정에게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지민의 가방에서 담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재정은 회사에서 인정받던 스킬로 직장과 집안 모두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엄마 재정은 가장 중요했던 평생의 클라이언트 지민을 가볍게 생각했다. 12살 지민의 가방에서 담배를 발견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 시나리오는 재정의 계획에 없었다. 딸 지민은 엄마인 자신을 닮아서 스스로 자기 앞가림을 잘하는 아이라고 믿었다. 다른 엄마들처럼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잘 따라가는 지민에게 항상 고마웠다. 하지만 지민이는 예상 밖의 허를 찌르는 클라이언트였던 것이다. 결국 재정은 자신의 커리어를 뒤로하고 지민이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기로 했다. 진수 못지않게 회사에서 인정을 받는 재정이었지만 지민의 어긋남이 자신의 욕심때문인 것 같은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지민은 재정이 회사에 출근하지 않던 첫 달에는 늘 집에 없던 엄마가 집에 있으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내 곧 적응했다. 지민은 어긋났던 길에서 금방 제자리로 돌아왔고 아직도 엄마에게 의지하는 딸로 살아가고 있다.     


지민은 급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동이 트기 전부에 집을 나섰다.  가까스로 클라이언트에게 제시할 카피 수정 회의가 끝나 가는데 한이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왔다.

     

‘보통 어린이집 전화는 엄마에게 가는데 무슨 일이지?’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한이 어머님, 미리내 반 교사예요.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한이 할머님께서 오시지 않으셔서요. 이렇게 연락 없이 늦으시는 경우가 없으신 분이라 걱정이 돼서 전화를 드렸어요. 여러 번 전화드려도 안 받으시네요."   

  

“아, 그래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제가 확인해볼게요.”     


하필 이렇게 바쁜 시즌에 골치 아픈 일들이 몰려온다. 지민에게만 해당하는 인생의 알고리즘이 있는 것일까? 자신의 인생을 코딩한 사람은 실력이 형편없을 것이라고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지민은 민첩한 손놀림으로 엄마 재정에게 전화 수십 통을 걸었다. 지금 집으로 향하면 납기를 지킬 수 없다. 급격히 피로감이 몰려와서 종이컵에 커피 믹스 두 봉지를 넣어 들이키고는 전화를 계속 걸었다. 33번째의 전화벨이 울렸을 때 엄마 재정은 전화를 받았다.     


“아…여보세요…?”     


“엄마! 어디야? 한이 데리러 안 갔어?”     


“… 한이?”     


정적이 흐른다.   

  

“엄마!!! 무슨 일이야?”     


“어머나, 내가 지금 뭐 하고 있지? 지민아 끊어봐. 한이한테 갈게. “     


“휴……”     


오늘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 같았다. 탕비실에서 만난 팀장은 지민을 보자, 뒤돌아서기 무섭게 엄마 등골 빼먹는 대신 일을 잘하라며 농담을 던졌다. 지민은 저 입을 언젠가는 꿰매 놓고 몸값을 올려서 이직하겠다고 다짐했다. 남들은 지민을 철없이 엄마에게 의지한다고 하지만 지민의 마음도 편한 것은 아니었다. 지민은 눈치가 빠른 편이라 그 당시 회사를 그만두고 난 뒤의 엄마의 변화도 누구보다 가장 빠르게 알아챘다.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의 여성에서 언제가 부터 어깨가 말리고 멍한 눈빛, 푸석해진 피부의 재정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지민은 자신이 엄마를 변하게 한 것 같았다. 길에서 엄마를 만나면 자랑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엄마를 공식석상에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엄마를 숨기고 싶어서 말썽을 일으키지 않으려 완전한 모범생으로 행동했다. 그래서 지민은 항상 재정에 대한 부채감이 존재했다. 엄마를 변하게 했다는 죄책감, 엄마를 부끄러워했다는 미안함. 지민은 그런 부채감을 떨쳐버리고 부모님의 그늘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결혼을 서둘렀다. 하지만 결혼이 자유를 선물하지는 못했다. 예상치도 못했던 여러 역할들이 요구되고 지민의 자유가 박탈당해도 늘 타인처럼 보고만 있던 남편을 견딜 수 없었다. 다시 자유를 찾아 이혼을 결심했다. 한이의 돌잔치를 마치고 이혼을 실행에 옮겼다. 지민은 늘 자유의 뒤를 쫓아다녔다. 지민이 복직을 앞두고 어쩔 수 없이 재정에게 한이를 부탁한 순간 자유가 또 사라졌다. 이제는 엄마의 커리어를 빼앗고 자신의 꿈을 펼친 죄로 엄마의 미래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정 과장!”     


김팀장은 지민을 불러 긴급한 자료를 지시했다. 사내에서 예민하기로 유명한 김팀장은 자기자신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스스로를 세상에서 제일 뒤 끝이 없고, 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하지만, 가볍게 지나칠법한 작은 단어에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많고, 때로는 폭발하여 여러 번 사무실을 시끄럽게도 만들었다. 그래서 김팀장이 부르는 소리에는 민감하게 반응해서 움직여야 했다. 지민은 커피를 다시 한잔 빼 들고 자리로 돌아와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시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재정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한이 찾았어.“     


“응 다행이네. 무슨 일 있었어? 엄마 이런 적이 없어서 나 엄청 걱정했어.”     


“나도 당황스럽네. 정신 차려보니 내가 한이 데리러 가는 길에 있는 공원에 서 있더라고. 너 전화 받고 갑자기 정신이 들더니 다리에 힘을 풀려서 겨우 갔어.”  

   

“엄마, 요즘 잠은 잘 자는 거야? 일단 지금 너무 바쁘니까 이따 집에 가서 얘기해요. 최대한 일찍 끝내볼게"     

“서둘지 마. 한이랑 집에 얌전히 있으니까."     


‘엄마에게 정말 치매가 온 것일까?’ 지민은 엄마 재정의 기억력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그저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증강 노인 프로젝트’에 확신이 생겼다. 아는 선배가 그런 프로젝트가 있다고 말해주었을 때는 아직은 초기라 위험한 실험이니 지켜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증강 주사를 맞아서라도 이런 상황을 피해야만 했다. 치매 증상이 시작되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어도 기준 미달이 된다고 한다. 재정이 찬성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말이라도 해봐야지 싶어서 가볍게 이야기는 해놓은 상태였다. 지민은 재정에게 그 말을 조심스레 꺼냈을 때에 재정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긍정의 시그널은 아니었다. 혹시 노인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느낌이라서 기분이 별로였던 것인지, 부작용이 우려가 되어서인지 알지 못했다. 이제는 의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을 해야 할 단계였다. 만약 증강 주사가 효과가 있다면, 재정은 다시 일을 시작할 것이고, 한이는 좋은 이모님을 구해서 맡기면 될 것이다. 그럼 지민은 자유로움을 얻을지도 모른다. 이모님을 구한다는 것은 직업을 뺏은 게 아니고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거니까. 엄마 재정에게 드는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겠지.     


"정 과장은 집에 가서 힘쓸 일 없으니 좀 더 마무리를 부탁해도 되겠지? 애인이 생기면 그때 이해해줄게. 나 먼저 들어가”     


지민은 입술을 꽉 깨물고 웃으며 인사했다. 김 부장은 분명 남편과 섹스 리스로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스스로가 원해서 한 이혼인데 사람들은 지민을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볼 때가 많다. 때로는 가벼운 농담을 지껄이기도 한다. 다음 달 평가 시즌만 아니었다면 머리채를 잡아줬을 것이라고 지민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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