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난 혐오

가난에 대한 오해를풀고 싶다

by 고밀도

우리 사회에 점점 혐오가 일상화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특히 일상에서 혐오로 인해 수치심까지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돈’으로 시작된 ‘가난 혐오’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돈에 대한 많은 관심과 이야기를 하는 시대를 보내고 있다. 최근 쏟아지는 뉴스의 키워드들을 보면 집 값, 동학/서학 개미, 비트코인 열풍 등 돈과 관련이 되어 있고, 점점 ‘돈’으로 사람들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데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무주택자와 다주택자, 서울러와 서울러가 아닌 사람들, 고소득자와 저소득자, 임대분양과 민간분양 등 돈을 기준으로 경계를 만들고 서로를 혐오한다.


이 과정에 돈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여과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우리 사회가 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들으면서 나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파트는 임대가 많대요. 추천하지 않아요.”

“저소득층한테 계속 지원금을 주면 계속 놀고 먹고 할 것 같은데……”

“자기들이 노력하지 않고서 왜 같은 대우를 바라는 거지?”


요즘 이런 말들을 댓글 뿐 아니라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난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 ‘가난’을 경험한 나의 견해이다. 어린 시절 임대아파트로 삶의 디딤돌을 디뎠던 필자에게는 그런 ‘가난 혐오’를 들으면 변명을 해주고 싶어진다. 그 중 딱 두 가지 정도의 오해만 풀어보고자 한다. 그러면 내가 느끼는 수치심이 조금은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소망에서다.


먼저, 게을러서 가난하다는 오해이다.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느냐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하지만, 주어진 삶의 환경과 기회가 다르기 때문에 노력해도 잘 넘어지는 삶도 있다. 필자가 어린 시절 살던 도시는 공업도시였다. 나와 내 친구들의 부모님은 대부분 2,3차 산업에 종사하던 노동자였다.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부지런히, 오히려 다른 방법을 몰라서 열심히 일을 했지만 IMF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고향 친구들과 만나면 이제는 그때를 추억으로 회상하며 부모님들이 겪었던 고충을 나누곤 하는데 상황이 상당히 비슷하다. 늘 일만 하시던 부모님들이 정보와 교육의 부족으로 IMF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몰랐기에 그 이후 10-20년을 영문도 모른 채 뒤쳐져 버려 다시 바로 서기 위해 허덕이거나 성실로 쌓았던 것이 와르르 무너져 복구하는데 청춘을 보내야 했다.


두 번째, 기회가 동등하다는 오해이다. 어떤 이들은 생계를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므로 정보의 사각시대에 있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결혼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의 한 호텔을 찾았다. 호텔 창 밖을 내다보는데 뼈아픈 기억을 가져다 준 대학교캠퍼스가 보였다. 공업도시에서 평생 자란 내가 처음으로 서울로 향하던 날이었다. 부모님은 나에게 서울이 얼마만큼의 거리인지, 내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려주신 적이 없었다. 부모님은 내가 논술고사를 보러 가는 날도 생계를 유지하느라 바쁘셨고 나의 원서를 챙길 만큼의 여유도 없으셨다. 98년도의 덮쳤던 IMF의 여파는 몇 년간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보의 사각지대에 있었다. 서울이라는 곳을 가볼 여유도 가볼 기회도 없이 공업도시 안이 내 세상의 전부였다. 조금 더 철저하지 못했던 필자의 탓도 있지만 나는 서울이 그렇게 먼 곳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논술 시험 종료 15분으로 앞두고 겨우 캠퍼스에 도착했다. 3분의 1만 채운 나의 시험지는 그렇게 제출되었고 나는 쓴 패배감을 맛보았다. 시험을 망쳤다는 것보다는 ‘왜 아무도 나에게 서울이 이렇게 먼 곳이라고 알려주지 않았지?’ 대체 나는 지금까지 어디에서 살고 있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내 머리를 세게 강타했다. 기회의 불평등이었다. 비단 이런 경험뿐 아니라 내 삶의 전반의 기회는 그들의 기회와 같지 않았다. 내 인생의 로드맵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사람이 부재했다. 당장 은행에 내야 하는 대출이 급했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아빠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보험 설계사였던 엄마는 외국계 회사들의 영역 확장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가난’은 우리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한 사람의 책임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결코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지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이크 샌델 교수님 또한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에서 ‘능력주의 덫’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를 동등한 기회 앞에 얻어낸 결과인가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 인종, 유전자 등 모두 동등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가난’이라는 문제를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혐오’가 아닌 ‘공동체의 문제’로 끌어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리셋하고 싶은 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