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클라라와 태양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점점 삭막해지고 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이웃과 인사하는 것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었다. 어른들의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천진난만한 아이들만이 인사를 하고는 제 부모가 머리를 쓰다듬어주길 기다린다. 그것이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작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고 정을 나누는 것은 둘째치고 층간 소음 문제로 싸우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말이 나온다. 코로나 19는 이 상황을 더욱 가속하고 있다. 서로 얼굴조차 마주하지 못하는 단계로 진입했다. 가족들조차도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려면 서로가 진짜 가족임을 증명하는 결혼식 사진이나 가족관계증명서를 들이밀어야 한단다.
그뿐인가? 4차 산업 혁명의 기술은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환경마저 허락했다. 덕분에 우리의 생활은 편리해지고 빨라졌지만, 현대인들의 휴머니즘을 찾는 많은 시도가 벌어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에게서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는 사례가 드물어서 사람들은 그런 인간적인 모습에 손뼉을 치고 더 많은 인간다움을 느끼길 갈망한다.
과연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인간다움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클라라는 어떤 것이 인간다운 것인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게 만든다. 요즘 인간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종족인 인간들끼리는 서로 모르는 척 관심이 없거나 생각이 다르면 헐뜯기도 주저하지 않지만, 다른 종족인 동물들에게는 의외로 따뜻한 온기를 나눠주기도 한다. 유기견, 유기묘를 돌보고 그들의 딱한 사정에 측은지심을 느껴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데리고 와서 가족처럼 아껴주며 살아가는 일이 흔하다. 사람들은 그런 따뜻한 마음에 감동을 한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사람들이 로봇 애완견과의 애착 관계가 각별하여 로봇이 수명을 다할 때는 진심으로 슬퍼하며 장례식을 치른다고 한다.
우리 마음속에서는 인간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 인간다움은 사실 우리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의 정의’가 아니다. 인간다움에는 ‘인간이 가장 기대하는 이상적인 모습’의 기대감을 투영되어 있다. 인간들이 인간다움을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들이 계속되면서, 우리는 다른 종족인 동물이나 기계로부터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인간다움의 상징인 따뜻함을 찾으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시의 가족과 클라라를 보면서 우리가 어느 쪽에 더 따뜻한 마음이 있다고 느꼈는가를 보면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조시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중요한 부품을 훼손해도 기꺼이 행동하는 클라라인가? 조시를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워 조시의 모습을 그대로 본뜬 로봇을 만들고 있었던 엄마인가? 조시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는 클라라를 우리는 응원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영혼이 없는 클라라에게서 도리어 따뜻한 온기를 느낀다. 클라라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인간의 그것과는 다르고 부속품과 오일로 움직여지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그 어떤 인간들보다 클라라에게서 인간다움을 느낀다.
수명이 다 된 클라라는 야적장에서 홀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묵직한 깨달음을 준다. 에이에프인 클라라가 인간인 조시를 대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클라라는 자신이 조시를 대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우연히 만난 매니저에게 말한다. 조시의 특별함은 인간인 조시 안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었다고. 클라라의 이 깨달음을 인간들에게 치환해본다면 인간다움의 중요성이 명확해진다.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무언가를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들 안에 특별함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 인간을 사랑할 때, 인간이 동물을 사랑할 때, 인간이 로봇마저 사랑할 때 ‘특별함’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인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 클라라가 인간의 언어를 완벽히 구사했다면 이렇게 말해주었을 것이다. “사랑, 그것이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니까요.” 이것이 클라라가 알려주는 인간다움의 비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