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만 있어서 그런가 큰 일을 치를 줄 모르네.”
얼마 전 가족 행사가 있어서 이모와 만났는데 지난 해 아빠의 환갑잔치를 하지 않고 우리 가족끼리 여행을 다녀와서 서운하다는 말을 했다. 잔치라는 큰 일을 치르기에 여자들은 배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모가 무심코 뱉어버린 말에 그 동안 "아들이 없어 불쌍한 집”이라는 문장과 싸워온 나의 시간들에 허탈함을 느꼈다. 이모의 말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알았는데도 나의 멘털은 흔들리고 있었다. 지난해 아빠의 환갑에는 ‘딸 낳으면 비행기 태워준다’는 말이 증명해 보이고 싶어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다녀왔고 그 문장에서 해방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명절 때면 나와 여동생을 앉혀 놓고는 “너네 아빠가 제일 불쌍한 사람이여, 아들 없는 집은 네 아빠밖에 없잖여. 니들이 잘 해야 한다. 니 아빠가 참 딱허다.” 라는 말씀을 매번 하셨다. 할머니가 낳은 6남매 중에 둘째 아들이었던 아빠만 아들 없이 딸만 둘인 집이었다. 그러면 나는 발끈하여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할머니, 요즘은 남자랑 여자랑 다 똑같아요. 그리고 내가 아들 노릇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2009년에 나는 꽃 자수가 곱게 새겨진 분홍색 코트를 할머니께 선물하면서 남자들과 똑같이 대우받고 일하게 되었다고 당당히 말씀드렸다. 할머니가 가장 아끼던 큰 아버지의 첫 째 아들보다 그 일을 먼저 해냈다. 할머니 말에 제대로 반박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는 신입사원 연수원으로 향했다.
아침 7시에 집합이라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는데 이미 버스의 절반이 차 있었다. 처음 입어보는 정장 바지가 불편했지만, 잘 다녀오겠다고 부모님께 문자를 했다. "너는 우리 집의 자랑이야"라는 답장과 함께 버스는 출발했다. 한 달간 매일 새벽 6시 다 같이 함성을 지르며 구보를 했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 동기들을 가뿐히 해내는 것 같았다. 처음 해보는 구보가 낯설었지만 이 정도는 가뿐하다는 듯 뛰었다. 새벽부터 밤 12시까지 이어지는 프로그램이 이어졌고 다음 날 과제를 발표하려면 1-2시간은 준비를 더 해야 했다. 하루에 2-3시간만 자면서 합숙 생활을 하다 보니 입술 주변에 포진이 얼굴을 내밀었다. 피곤한 가운데지만 같은 목표로 모인 동기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돈독해지고 있었다.
5일 밤을 지낸 뒤, 여자 신입사원들만 강당으로 모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우리 차수는 한 조에 20명씩 모두 10조, 한 조에는 4~5명의 여자들이 있었다. 우리 약 50여 명은 강당에 모였다. 각 조에 한 명씩 지도선배라고 부르는 현업 선배들이 배치되었는데 그 중 3명의 여자 선배들만이 강당에 앉아있었다.
"여러분, 편히 이야기할게요. 지금 조별로 조장이 뽑힌 걸 보고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지금 10조 모두 조장이 남자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나요? 왜 모두 다 남자들이 조장이 된 것이죠? 남자랑 동등하게 경쟁해서 들어왔는데 벌써 뒷배경이 되고 싶은 건 아니겠죠? 여러분들이 남자들보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지만 회사는 여자를 원하지 않아요. 국가가 30%의 의무 할당을 정해놓지 않았다면 여러분들 중 절반은 실력은 없지만 희생정신이 있는 남자들로 채울 거예요."
갑자기 예상치 못한 전개에 여자 동기들은 숙연해졌다. 동등하다고 생각하고 치열하게 문턱을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우리는 반보 뒤에 서 있는 구경꾼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회사는 여자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에 어릴 적 수없이 들어왔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남자랑 다르지 않게 사회라는 곳에 내 자리를 찾아서 똬리를 틀었다고 생각했는데, 입사한 지 5일 만에 나는 다시 ‘여자’로 분류되고 있었다. 더 이상 ‘여자’로, ‘아들 없는 집의 딸내미’로 구분되지 않게 되었다고 믿었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늘 아빠가 불쌍하다고 말했던 할머니가 “그만 포기 혀~ 할미가 뭐랬니?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고 했잖여.” 라고 귓가에 속삭이시는 것 같았다. 다시 오기가 발동했다.
조장은 연수 기간 한 달 동안 1차, 2차로 나눠서 선출했다. 할머니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듯 이 사회도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적극적으로 조장에 지원했다. 그렇게 나는 20명을 이끄는 조장이 되었다. 2차 때에는 나 말고도 3명의 여자 조장이 더 나왔다. 막상 해보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저 일정의 앞 뒤로 5분 정도 시간을 할애해서 소식을 전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남자들과 다르지 않게 열정적으로 그 일을 해내고 싶었다. 2주 뒤 동기들 사이에서 나는 대단한 야망을 가진 여자로 포지셔닝되어 있었다. 단지 나의 소임을 다했을 뿐인데 배경이 되지 않는 나는 튀는 여자 동기였던 것이다. 그때 나는 이것이 평생 끝나지 않을 싸움이라는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때로부터 12년이 흘렀다. 그때의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나 보다. 나는 아직도 딸’만’ 둘 인 집의 장녀로 구분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모의 말을 듣고 여동생에게 전화해서 한 바탕 울고서야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