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1세대입니다.

불확실성에 흔들리는 사람들

by 고밀도

*이 글은 정치적 신념과 전혀 상관없는 한 개인의 이야기입니다."


“불고기 하나, 빅 하나, 콜라 하나 테이크 아웃”

주말 롯데리아 매장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담임 선생님께는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마감까지 일을 하면 밤 10시 30분이었고, 집에 가서 숙제를 하고 자면 꽤나 피곤하여 다음 날 학교에서는 졸음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17세 소녀로서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10대들처럼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 꽤나 뿌듯했던 터였다. 마치 선진문화를 가장 빨리 받아들이는 트렌드 리더가 된 기분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은 내 주위로 몰려와서 롯데리아에서 일하는 공고 오빠들에 대해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단지,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처음 맞았던 여름방학이 너무 지루하고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롯데리아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기 1년 전인 1998년, IMF가 터졌다. IMF가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뉴스에서 겁을 주는 멘트를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중견기업의 가구공장에서 명예퇴직을 당했다. 명예퇴직이라고는 하지만 전혀 명예롭지 않는 하루아침의 해고였다. IMF가 터지기 바로 직전인 1997년에 엄마 아빠는 적금을 차곡차곡 모아 약간의 대출로 번듯한 첫 집을 마련했던 터였다. 대출을 처음 받아본 부모님은 불안감에 밤낮으로 예민했다. 아빠는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고, 목수의 전공을 살려 인테리어 사업을 시작하셨다. 하지만 IMF라 사람들은 집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부모님이 돈 문제로 심하게 싸우셨던 날, 나는 고등학교 원서 제출 직전에 학교를 바꿔서 지원서를 냈다.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소수의 특별 반을 만들어 관리해준다는 사립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한 것이다. 교복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집에서 가까워서 공부할 시간도 벌 수 있었고, 학원을 다니지 않는 나에게는 적합한 선택이었다. 같은 공립고등학교에 지원서를 냈던 베프 J는 단단히 심통이 났었다.


드디어 1999년,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입학을 하자마자 특별 반 예정이었던 80여 명을 따로 불러 교감선생님께서 공지할 내용이 있다고 했다. 이해찬이라는 새로운 교육부 장관이 입시정책을 전면적으로 바꿨다고 했다. 이제는 공부를 잘할 필요 없이 한 가지만 잘하면 된단다. 새로운 교육과정의 실행책으로 야자 대신 전혀 특별하지 않았던 특별활동반을 의무적으로 해야 했다. 특색이 없는 독서반이 가장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덧붙여 사전에 약속되었던 별도의 반을 만들지 못할뿐더러 이제는 학교 남아서 공부하는 것은 금지되었다고 했다. '아, 고등학교에서 야자는 당연한 것 아니었나?' 4시 이후에 학교에 남아 있으면 안 된다니 각자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라고 했다. 부모님께 학교에서 이제 일찍 끝난다고 말씀드렸더니, 똑똑한 양반들이 어련히 많이 고민하고 시도하는 거겠지 생각하셨다.


나의 고등학교 생활은 중학교 때보다 훨씬 여유로웠다. 4시에 수업을 마치면 우리는 학교를 우르르 빠져나왔다. 학교 앞에는 종합학원에서 보내 대형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절반 정도는 입시학원으로 가서 시간을 보냈고 나와 남은 친구들은 시내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 주어진 자유에 우리는 신이 났다. 무한리필의 마카로니 샐러드를 제공해주는 닭갈비 집은 우리의 아지트였고, 늦은 오후에 손님이 없는 시간이라 5천 원만 내면 3시간은 서비스를 넣어주는 노래방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신나게 놀다 집에 들어가면 IMF의 여파로 분위기가 좋지 않은 집안 분위기를 마주했다. 부모님은 하루하루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나의 학교 생활에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봄과 여름이 지나고, 나는 두 번의 성적표를 받아 들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처음으로 성적표를 받고 부모님께 보여드리지 않았고 엄마의 사인을 날조해서 학교에 제출했다. 성적표가 언제 나오는지 엄마 아빠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보다 대출 이자가 얼마 나오는지가 더 중요한 나날들이었다. 집에서 저녁시간을 보내는 것이 편치 않았던 첫여름 방학, 미국 드라마를 보고 불현듯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 교육부에서 선진국처럼 입시의 전쟁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는 거잖아. 나도 그럼 미국의 틴에이저처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립하면 되잖아?’라는 생각이었다. 시급은 1850원. 하지만 나는 유니폼이 있었다. 나도 소속이 된 곳이 생겼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나도 갈 곳이 생겼다. 그렇게 방학 때에만 해봐야지 시작했는데 나는 1여 년의 아르바이트 생활을 계속했다.


돌이켜 보면 갑자기 닥친 변화 앞에 나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고 계획할 수 없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갑자기 고3이 되자 정책이 실패했다면서 우리에게 야자를 강요했고 지난 시간들을 채우라고 했다. 우리는 의견이라는 것을 탑재하는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또 엉덩이를 붙이고 공부를 했다. 오랜 시간 교과서와 책상을 떠나 있었던 나에게는 좌절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능을 보던 날, 영어 듣기 평가를 듣는 순간이 되어서야 내 미래가 그려져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주말 점심 롯데리아의 계산대 앞의 붐비던 손님들은 빨리 정리할 수 있었는데 내 눈 앞의 가득 찬 영어 문제는 풀어 내려갈 수 없었다. 수능이 끝나고 세상은 우리를 이렇게 정의했다. ‘단군이래 최저학력, 이해찬 1세대.’ 나는 새로운 시도라는 정부의 정책으로 1년을 더 공부해서 대학에 가야 했고 제 자리를 찾기까지 많은 시간을 방황했는데 나의 그 시절은 그저 한 단어로 정의가 되었다.


요즘 뉴스에 ‘이해찬’ 의원의 얼굴이 자주 나온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새로운 세계를 만들겠다고 서민들을 위한다는 새로운 정책들을 내놓는다. 하지만 새로운 정책으로 불확실성이 생긴다. 계획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난다. 불확실성에 앞에 가장 큰 피해자는 약자라는 생각이 든다. ‘작은 변화에도 인생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생기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20년 전과 똑같이 우리를 뒤흔드는 그들은 흔들림 없이 여전히 잘 살고 있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 내야 해서 인생이 흔들리는지 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두 번 흔들리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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