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 뒤면 30대로 진입하는 29살 이지경은 홍보 에이전시에서 일하고 있다. 학사 전공은 컴퓨터공학도이지만 물불 가리지 않고 되는대로 이력서를 내다가 결국 홍보 에이전시에 자리를 잡고 일하게 되었다. 어떤 일이든 차분히 배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다른 동료들에 비해 배움이 더디었다. 하지만, 특유의 “납작 엎드리기”기법으로 지난 3년을 그럭저럭 보냈다. 경쟁이 치열했던 면접에서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왜 컴퓨터공학과 출신인 자신이 뽑혔는지는 아직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였다. 추측해 보건대 면접 마지막에 면접관 석을 향해서 큰절을 한 것이 먹힌 것이 아닌가 싶었다. 면접을 그럭저럭 보고 나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기에 잽싸게 예의를 갇혀서 큰절을 했다.
“면접관님들. 면접 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큰절 받으십시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웃을 때 주름이 가던 면접관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박장대소했다. ‘에이 망했다. 이건 오버였어.’라고 씁쓸한 마음으로 일어선 이지경은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부지런히 다시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2주 뒤 예상을 뒤엎고 최종합격자로 연락을 받아서 어안이 벙벙했었다.
이지경은 3년 동안 막내의 역할을 성실히 해왔다. 근 몇 년간 경기가 어려워 사람을 잘 뽑지 않는 것도 막내를 계속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이지경은 취업하기 전 여러 군데에서 열정페이로 인턴을 했고 4년 내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입사가 늦어진 편이었다. 그래서 나이로는 이미 대리를 달기에 충분한 상태에서 막내가 되었기에, 최대한 막내처럼 보이기 위해서 노력했다. 다행히 부모님은 어린 시절부터 윗사람에 대한 예의를 아주 중요하게 강조해왔기 때문에 몸에 밴 습관으로 겉으로는 아무 무리 없이 막내 생활을 잘 해내고 있었다.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한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의 이름까지도 알 知(지), 공경 敬(경)을 써서 공경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귀가 닳도록 가르쳤다.
그런 이지경에게 첫 입사 날은 언제나 기억이 생생했다. 온라인 프로모션팀으로 배정을 받은 이지경은 팀원들과 인사를 하기 위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배가 뽈록 나오고 머리에는 기름기가 흐르는 50대 중반의 정곤대 부장이 이지경을 팀원들에게 소개했다.
“자자, 오랜만에 신입사원이 우리 부서에 배치됐어요. 여기는 이지경씨. 낯설 테니까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도록 해요.”
“어? 신입 맞아요? 연륜이 있어 보이시는데. 혹시 중고 신입?”
갑작스러운 발언에 ‘개념을 밥 말아 먹었나’ 생각했지만 이지경은 그런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웃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철이 없기로 소문난 나하나 대리는 다른 사람의 반응은 안중에도 없는 듯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나하나가 철이 없는 게 아니고 철이 없는 척하는 고수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때 미용실을 찾은 지 꽤 오래되어 보이는 끝이 갈라진 푸석한 머리에 화장기가 거의 없는 얼굴을 한, 매우 피곤한 표정의 진정해 차장이 나하나 대리에게 일침을 놓았다.
“나대리. 예의를 좀 갖추지 그래. 일만 잘하면 됐지 중고 신입이든 아니든 뭐가 중요해.”
“에이, 차장님. 그냥 농담한 걸 가지고 왜 그러세요? 와! 이제 저 막내 벗어난 거네요. 대리인데 막내 역할 하기 너~무 힘들었단 말이에요.”
이지경은 오가는 대화 속에서 어떻게 반응을 해야 예의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신경을 쓰느라 표정이 자연스럽지 못했지만 그래도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날 만큼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정곤대 부장은 말을 다시 이어갔다.
“아, 이지경씨가 93년생일 텐데. 나하나 대리랑 동갑이겠네. 친구끼리 잘 좀 챙겨줘."
"부장님, 저는 빠른 93예요! 제 친구들은 모두 92이니까 저도 92처럼 살았다고요! 동갑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죠?"
맙소사. 정곤대 부장은 이지경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이를 공개해버렸다. 이지경은 입사하기 전에 인턴과 아르바이트의 경험을 통해서 한국 사회에는 나이가 서로의 관계를 정의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특히, 사회에서 가장 불편한 사이는 상하 관계가 확실한데 둘 사이가 동갑이거나 후배의 나이가 더 많은 경우였다. 이지경은 일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서로를 불편하게 만드는 한국 사회의 나이 얘기가 지긋지긋했다. 정곤대 부장은 조직 내에서 나이 많은 막내의 자리가 얼마나 불편한지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지경은 나하나 대리에게는 더욱더 예의를 갖춰서 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게 만드는 길이었다.
이지경씨는 평소에 빠른 생일이 이 사회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사람들의 족보를 꼬이게 만드는 말도 안 되는 악습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나하나 대리가 어쨌든 동갑이 아니라고 선을 그어주는 것이 반가울 따름이었다.
정곤대 부장은 팀원들에게 다른 공지 사항들을 전달하고 난 뒤에 나하나 대리한테 이지경의 자리를 안내하고 세팅하는 것을 도와주라고 이야기했다. 나하나 대리는 툴툴거리면서 시스템 팀에 전화를 걸어서 이지경의 자리를 세팅해줬다. 이지경에게는 매우 불편한 첫 출근 날이었다.
그날 이후 최대한 적응을 하기 위해서 막내로서 할 수 있는 한 예의를 갖추고 깍듯하게 선배들을 보필했다. 허드렛일은 항상 이지경이 도맡아 했다. 하지만 이지경은 이제 슬슬 막내 생활에 지쳐가고 있었다. 곧 30대에 진입한다고 생각하니까 언제까지 막내 노릇을 하면서 밥벌이를 해야 하는지 억울했다. 옆 부서의 동기 최보미는 작년에 벌써 후배를 받았다. 후배가 온 이후로는 양손에 커피를 들고 출입문 앞에서 동동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 했다. 온라인 프로모션팀에는 인력이 충원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변화가 있는지 하고 늘 오매불망 막내를 기다리며 출근을 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이 온라인 프로모션 업무는 조금씩 손에 익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