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경은 늦잠을 자고 말았다. 잠결에 이지경을 깨우는 알람을 꺼버린 것이다. 이지경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감지 않는 머리로는 나갈 수 없었기에 겨우 머리만을 감았다. 출근길에 이용하는 지하철 대신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 몰고 출근하는 크게 마음먹고 산 자동차를 타고 출근길에 올랐다. 지하철까지 달려갈 시간이 부족해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만 회사 건물에는 주차할 수 있는 직급이 되지 않아서 오늘은 하루에 1만 원이나 하는 유료 주차장에 차를 맡겨야 할 것이었다. 그래도 일단 출근 시간 안에 세이브만 할 수 있다면 기꺼이 지불할 의사가 있었다. 이지경에게 지각은 개념 없다는 것의 동의어였다. 이지경은 시동을 걸고 조수석에 놓여 있는 굵직한 헤어 롤을 앞머리에 말고 출발했다. 그날따라 4차선 도로 중에 2차선을 막아 두고 공사를 하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서 몸은 핸들을 뚫고 앞으로 나가기 직전이었다. 곧 차선을 바꿔야 하는데 끼워 주지 않는 차들에 거친 욕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아이고 참, 나도 좀 갑시다. 다들 자비가 없네.”
차가 꽉 막혀서 차선을 바꿀 수 없었다. 이번에 차선을 바꾸지 못하면 부산까지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노메이크업에 크게 롤을 만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방법이 없어서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 양해를 구했다. 보통 이렇게까지 창문을 열어 손으로 양해를 구하면 양보를 해주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바로 옆 차선에 있는 남자는 같이 창문을 열더니 다짜고짜 반말부터 했다.
"야, 화장이나 하고 출근할 것이지 개념 없이 왜 끼어들어."
예상치 못한 무례함이었다. 쌈닭이 되어서 싸우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저 자비 없는 남자와 싸움을 시작하면 회의 시간을 맞추지 못할 것 같았다. 이지경은 올라오는 감정을 꽉 누르고 혼잣말로만 속삭였다.
"저 새끼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
하지만 이지경은 재빨리 겉으로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눈인사로 사과의 제스처도 보냈다. 이지경이 바짝 엎드리자 상대는 더욱 기고만장하게 노려봤다.
"아침부터 재수 없게!"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재수 없다는 문장을 내뱉고 창문을 닫아버렸다. 이지경은 욕을 들어먹은 대가로 차선을 변경할 수 있었다.
"누구는 욕 못하는 줄 알아. 내가 몇 살인 줄 알고 반말하고 지랄이야."
이지경은 혼자 있을 때도 좀처럼 욕을 내뱉지 않았다. 항상 누가 지켜보는 것처럼 자기 검열을 하는 타입이었다. 오늘은 이지경으로서는 아주 수위가 심한 ‘지랄’이라는 욕까지 퍼붓지 않을 수 없었다. 이지경은 험난한 도로를 뚫고 겨우 회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세이브하기 5분 전! 그때 날아든 문자. 동갑이지만 빠른 생일로 대접받길 바라는 나하나 대리였다.
[문자] 지경씨, 회의 때 마실 커피 6잔 부탁!
이지경은 한 손으로는 헤어 롤을 풀고, 한 손으로는 문자를 확인했다. 10분 일찍 커피 심부름을 알려줬다면 여유롭게 와도 됐을 텐데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아침부터 도로에서 혼을 다 쏟아낸 터라 지경의 안에서 화가 들끓어 올랐다.
‘자기가 직접 사면 어디가 덧나냐? 이렇게 출근하기 전인 사람한테 굳이 시켜야겠냐고! 빨리 누구라도 들어오면 좋겠다.’
회사 근처에 팀원들이 좋아하는 구수한 빈을 파는 커피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손님 두 사람이 휴대전화를 보느라 앞을 보지 못해서 서로 부딪혔다. 이지경이 봤을 때는 두 사람 모두에게 책임이 있었지만, 왼쪽에서 진입하던 건장한 40대 남자는 자신의 덩치를 믿는지 먼저 성을 냈다.
"아이씨, 눈을 어디에 달고 다니는 거야. 앞이 잘 안 보이면 집에 얌전히 있던가. "
반경 3m 내의 사람들은 모두 들릴 만한 소리로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상대편도 만만치는 않았다. 관리를 잘해서 살이 붙지 않고 날렵하고 젊은 시절 한가락 했을 것 같은 내공이 넘쳐 보이는 70세 할아버지였다.
“이 어린놈의 자식이. 너는 애미 애비도 없냐? 버릇없는 말본새 봐라."
"어이. 할아버지! 나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내가 당신 자식이라도 돼?"
"뭐? 이 쌍놈의 새끼가.”
“이 노인네가 미쳤나? 욕하고 지랄이야.”
둘의 유치한 대화를 어느새 몸싸움으로 이어졌고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나와서 둘을 갈라놓았다.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20대의 체대 출신의 남성이 아니었다면 둘을 말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지경은 사람들이 붐비는 지옥철에서 하루에 한 번씩은 이런 싸움을 꼭 목격했다.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온기를 발산하는 지하철에서는 서로 발을 밟혔다고, 왜 몸을 밀치냐고 싸우다가 꼭 "어디서 반말이냐"라는 레퍼토리가 꼭 나왔다. 이것이 동방예의지국의 현실이었다. 커피와 함께 출근했기 때문에 지각에 대한 염려는 멀리 보내고 당당히 출근했다. 이지경은 주문한 커피를 들고는 팀원들이 앉아있는 테이블 뒤에 놓아두었다. 커피를 사왔지만 누구 하나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하나 대리는 자리에 없었다. 보나마나 눈 화장을 하러 화장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이지경은 자리에 앉아서 가방에 있는 수첩을 꺼내려고 하는데 낯선 물건이 만져졌다. 드림캐처였다. 힘든 출근길에 예상치 못한 물건을 발견하니까 조금은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밝은 데서 보니 취해서 산 물건 치고는 디자인도 나쁘지 않았다. 하얀 깃털이 10시, 2시 방향으로 달려 있고 원형의 나무 링에 하얀 실로 촘촘하게 모양을 잡고 있었다. 이지경은 가방 안에 3개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지경 또 쓸데없는 걸 여러 개도 샀네.’
이런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할 때면 열심히 상품을 설명하는 상인과 눈이 마주쳐서 필요도 없는 요술 장갑을 사기도 했고, 추운 날 길에서 시들어가는 채소 파는 노인들을 보면 이지경은 참지 못하고 모두 싹쓸이해오기도 했다. 이왕 샀으니 잘 활용하지 싶어서 자리 오른쪽에 있는 파티션에 드림캐처를 압정으로 고정시켰다. 바람이 불지 않는 자리라서 흔들거림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신비로운 느낌을 풍기면서 사무실 자리의 분위기를 전환해주었다. 남은 드림캐처 하나는 차에 두고, 또 다른 하나는 집에 가서 창문 주변에 걸어 놓으면 딱이라고 생각했다. 하루의 시작인 아침이니 기분 나빴던 것은 잊고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때 나하나 대리가 자리에 돌아오면서 이지경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 자기야. 오늘 날씨도 추워졌는데 아이스로 사 오면 어떻게 해."
겨우 평화를 찾았던 이지경의 마음은 다시 분노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기분을 절대 드러내지 않고 시종일관 친절한 태도로 대하는 이지경이었다.
“아…. 대리님, 그럼 다시 사다 드릴까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지만 그래도 한번 친절한 대응을 해봤다. 설마 다시 사 오라고는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예스’라고 말할 리가 없었다.
“그래, 자기야. 아직 회의 때까지 시간이 남아있으니까 따뜻한 것으로 좀 부탁해.”
악, 정말로 사 오라고 할 줄은 몰랐다. 화가 난 이지경의 마음은 열 받아서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맨날 자기야 거슬려. 그리고 맨날 왜 저렇게 반말을 해대는 거야. 예의 없이 반말하는 인간들이 너무 싫어!’
‘다시 사다 드릴까요?’라고 질문한 등신 같은 자신을 탓했다.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시야에 들어온 드림캐처를 한 번 손으로 툭 건드려서 흔들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
“그냥 이 세상이 막내고 뭐고 다 평등하면 좋겠다. 이런 꼰대들의 존댓말 다 없어져 버리라지! 그럼 나도 나하나한테 네네 거리지 않아도 될 텐데!"
흔들리는 드림캐쳐를 보면서 이지경은 카드지갑을 집어 들고 카페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