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잔을 들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눈치가 빠른 이지경은 자세를 낮추고 조용히 자리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사무실은 고요했지만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사태를 파악하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시계는 벌써 10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정곤대 부장은 회의를 시작하자고 했다.
"10시 회의를 일단 하도록 하지."
화가 난 듯한 표정과 말투로 성큼성큼 걸어서 회의실로 들어갔다. 팀원들도 정곤대 부장을 따라서 회의실로 들어갔다. 온라인 프로모션팀 6명은 곧 시작될 A 기업 홍보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나대리, 준비한 계획안 발표하지?"
나하나 대리는 평소답지 않게 난감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갔다. 조금 전 기세등등하게 커피를 다시 사 오라고 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발표를 시작할까 해."
이지경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나대리가 미쳤나 봐. 아무리 정곤대 부장의 이쁨을 받고 있지만, 이거 너무 선을 넘은 거 아냐?’
"Sorry, I am going to explain this in English."
지난 3년간 이지경의 회사는 영어를 쓰는 미팅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이지경은 나하나의 태도를 보면서 의도를 유심히 살폈다. 잘난 척을 하는 것인지, 간밤에 술이 깨지 않은 것인지 집중해서 살펴보았다. 다른 팀원들과 정곤대 부장은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고 조용히 보고를 듣기 시작했다. 나하나 대리는 생각보다 유창하게 영어로 발표를 했고, 정신도 멀쩡하다 못해 아주 맑아 보였다. 갑자기 아침부터 영어를 듣고 있자니 이지경은 유심히 나하나를 살피던 것도 잠시 졸음이 쏟아졌다. 발표를 마무리하는 ‘Thank you’라는 말에 정신이 들어서 이지경은 언제나 습관처럼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내뱉었다. 이지경은 분명히 그렇게 말을 내뱉었는데…
자신의 귀에 ‘수고했어!’라는 어미가 들렸다. 순간 이지경과 팀원들은 얼어버렸다.
"아니 그게 아니고 수고했다고. 훕"
이지경은 자신의 입을 막았다. 부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세다 말세. 예의를 집에서 모두 놓고 왔나 봐."
그리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지경은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지경 미쳤어? 왜 그래.’ 그때 pc를 정리하던 나하나 대리가 말을 걸었다.
“지경씨도 그래? 나도 그래. 지금 존댓말이 나오지 않아. 내 의지대로 안된다니까. 지경씨, 나한테 말 좀 걸어 봐.”
이지경은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고, 나하나 대리가 미심쩍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꺼냈다.
"아. 나대리. 갑자기 무슨 일이야? 어머나! 진짜였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렇지? 지경씨도 그러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자리로 돌아오니 옆 부서에도 난리가 났다. 부장들은 화를 내고 있었고 아래 사람들은 땅만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곤대 부장은 바로 사장님 보고 일정이 잡혀서 자리에 없었다. 다른 팀원들은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부서에서는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열심히 이 상황을 친구나 동료들에게 전하거나 인터넷으로 열심히 검색하면서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회의를 하러 갔던 정곤대 부장은 10분 만에 사색이 되어서 돌아왔다. 정곤대 부장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여기 다 모여봐. 뭔가 잘못됐어. 나도 사장 앞에서 반말밖에는 안 나왔어. 사장이 노발대발 난리가 났어. 난 이제 완전히 찍힌 거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아는 사람 있어?”
사람들은 말을 아끼고 있었다.
“아까 나대리하고 이지경씨가 반말했을 때는 어이가 없었는데 사장 앞에 갔는데 어미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야. 무슨 바이러스라도 도는 거 아니야? 진정해 차장 얘기 좀 해봐.”
진정해 차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정곤대 부장을 바라봤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진정해 차장의 입만 보고 있었다. 진정해 차장은 어젯밤 제사 일정으로 시어머니와 한바탕을 했고, 분노가 가라앉지 않아서 잠을 거의 들지 못했기에 더는 복잡한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반말이니 어쩌니 해도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자신이 입을 열기만으로 바라고 있었다.
“아 그게 저기, 일단 상황을 어떤지 지켜봐야지. 홉!”
진정해 차장은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진짜였다. 사람들의 말이 진짜였다. 정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문장의 어미가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도 놀란 눈으로 진정해 차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나 봐. 이게 내 마음대로 안 되네.”
옆에서 지켜보던 송사리 과장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도 입을 열어 보았다.
“아니, 진 차장. 이건 말이 안 되지 않아? 헐! (아니, 진 차장님. 이건 말이 안 되지 않아요?)”
이지경은 혼자서 머리를 저었다. 그때 사람들의 휴대전화에 속보 문자가 날아들어서 일제히 울렸다. 사람들은 서둘러 휴대전화를 들어서 확인했다.
[속보] 어미가 조절이 안 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 갈등은 자제해주시고 정부가 신속히 상황을 파악해서 조치하도록 하겠음.
정곤대 부장은 이 상황이 비단 우리 회사에만 해당하는 일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 수 없는 불가항력의 힘이기 때문에 사장님 앞에서 실수가 만회되리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아까 나하나 대리와 이지경에게 화를 냈던 것이 미안했는지 사과를 했다.
“아, 나대리. 지경 씨. 미안해. 아까는 오해했네. 일단 오늘은 모두 말을 아끼도록 하지.”
“응 알았어.”
이지경은 늘 습관대로 상대의 말에 곧바로 반응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반말로 대응이 되어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일부러 반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막상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오늘 말을 하지 않고 버텨야겠어.’ 이지경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지경은 혼란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근데 부정적인 감정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 왠지 정곤대 부장과 나하나 대리에게 반말했다는 생각이 들자 일종의 쾌감도 느꼈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사람들이 말을 아끼느라 조용한 환경에서 일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편안함을 느끼는 부분도 있었다. 다른 날보다 퇴근길은 길이 더욱 꽉 막혔다. 혼란스러웠던 하루여서 그런지 많은 직장인은 퇴근을 평소 보다 서둘러서 한 모양이었다. 큰 사거리를 지나야 길 좀 뚫리는데 신호대기가 끝이 없었다. 저 멀리 사거리의 커다란 전광판에는 갑작스러운 ‘존댓말 실종 사건’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었다. 뉴스 진행자조차도 존댓말로 보도를 할 수가 없어서 사거리에는 반말이 널리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전광판을 올려다보면서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뉴스진행자는 프로답게 반말을 쓰고도 정중한 느낌이 들도록 뉴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오늘 뉴스를 보도하겠다. 정부는 하루아침에 대한민국 전역에 걸쳐 일어난 이 황당한 사건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빠르게 대응을 하고 있지만, 아직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것이 일종의 바이러스일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더 정밀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말을 아꼈다. 김종대 기자가 시민들을 인터뷰했다. 김종대 기자. 나와라.”
오늘 혼자 있거나 노인들끼리 모인 곳에서 생활하느라 지금 이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 몇 명의 노인들은 인도에 서서 전광판을 바라보며 노발대발하고 있었다.
“말세여 말세. 저저 뉴스 좀 보게. 예의를 어디다 팔아먹었냐! 하극상이 따로 없어. 대한민국이 망할 징조여! 쯧쯧!”
전광판에는 오늘 발생한 사태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을 취재한 영상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안녕? 난 김종대 기자다. 오늘 일어난 황당한 현상을 겪은 시민들과 인터뷰를 해보았다.”
60대로 보이는 남자는 베이지 잠바에 골프 웨어 브랜드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화가 난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이건 중국의 농간이야.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 분열을 일으키려는 시도가 확실해. 그놈들은 그런 바이러스를 만들고도 남을 놈들이야.”
다음 인터뷰는 귀와 코에 피어싱을 여러 개하고 벙거지를 눌러쓴 20대였다. 그는 건들건들 서 있었다. 뒤에는 인터뷰하는 자신들의 친구가 신기한지 두 명이 왔다 갔다 하면서 웃고 있었다. 그는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를 했다.
“나는 이런 거 xx(삐-) 좋아. 평등한 문화 좋지 않아? 꼰대들만 열 받지 나는 바이러스고 아니고 간에 그냥 이대로 살아도 좋을 것 같은데? 이거 완전 미국 스타일 아니야?”
길에서 인터뷰가 흐르는 영상을 보면서 나이 든 사람들은 탄식을 했고 젊은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환호를 하기까지 했다. 이지경은 차가 밀려 옴짝달싹 못 하는 도로에서 이것이 꿈이 아닌지 자신의 볼을 꼬집어 봤다. 확실한 현실이었다. 오늘 일을 곱씹을수록 이런 현상은 막내인 자신에게 그다지 나쁠 것 같지 않았다. 긍정적인 사고가 몸에 밴 이지경은 갑자기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이 사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