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해 차장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는 어제 제사 문제로 한바탕한 실랑이를 벌였던 시어머니 장옥자가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정해는 갈등을 감당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나이가 마흔을 훌쩍 넘었는데 언제까지 제사 일정에 동동거리는 일들에 진절머리가 났다.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의 조상의 제사였지만 갈등을 피하려고 지난 15년 동안 최대한 일정을 맞췄다. 하지만 1년 중 제사 3개가 몰려 있는 10월이 가장 고비였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기도 하지만, 일하는 자신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당연히 진정해를 오라 가라 하는 시어머니의 태도를 견디기 어려웠다.
어제는 부장이 오늘 있을 사장 보고를 준비해달라고 해서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10월에 있는 3번의 제사 중 마지막 제사였다. 앞의 두 번의 제사는 무리를 하고 송사리 과장에게 부탁해서 그럭저럭 넘겼다. 하지만 사장님 보고를 준비하는 만큼 이번에는 제사 핑계를 대는 것이 어려웠다. 가뜩이나 위로 올라갈수록 진급의 경쟁이 심해지는데 제사 때문에 못 한다고 한다면 회사 내에서 ‘여성’이라는 약점이 확연히 드러날 것이 뻔했다. 한번 인식이 되면 바꾸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날은 남편 남의평에게 일찍 퇴근해서 시어머니를 도와드리라고 했다. 제사 시간만은 맞추려고 집중해서 보고서를 완성하고 있었다. 보고서를 최종 저장하고 휴대폰을 보니 10통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남편에게는 문자가 와 있었다. 그때 만약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면 갈등이 덜 했었을까?
[문자] 엄마가 화가 많이 났음. 내가 열심히 설명했지만 통하지 않네. 참고해요.
진정해는 어이가 없었다. 참고하라니? 남일 보듯이 한 발 떨어져서 몸을 사리는 남편 남의평이 미웠다. 보고서를 집중해서 쓰느라 에너지는 모두 소진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제사를 건너뛰고 곧바로 집으로 가는 행위에 도전해볼까 하다가 더 큰 불상사를 막기 위해 택시를 타고 옆 동네에 위치한 시댁으로 향했다.
시간은 12시.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물론 진정해를 위해서 열려 있는 문은 아니었다. 영혼들이 잘 들어오라고 열어 둔 것이었다. 조용히 남의평이 자신의 조상들한테 제사 지내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봤다. 시어머니는 진정해한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제사상만 보고 있었다. 제사를 마치고 다음 날 출근도 해야 하니까 서둘러 인사하고 집으로 오려고 했다.
“애미, 너. 조상보다 그 보고서가 더 중요하냐?” 시어머니 장옥자는 앙칼진 목소리로 진정해를 불러 세웠다. 남편은 아이를 달래듯이 시어머니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에이, 엄마 왜 그래. 사회생활 하다 보면 급한 일이 있을 수도 있지.”
“누가 일하라고 등 떠밀었어? 남편 내조하고 조상 잘 모시고 그런 것에 만족도 못 하고. 네 남편이 벌어 주는 돈으로 알뜰살뜰 살면 되는 거지.”
“못살아요.” 진정해는 케케묵은 감정들을 쏟아내고 싶어졌다. 그동안 순종하는, 아니 복종하는 자세로 참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며 인내했는데 더는 참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뭐?”
“못산다고요. 지후 아빠가 벌어주는 돈으로는 유지가 안 돼요. 지후 학원비도 감당이 안 돼요.”
남의평은 장옥자 옆에 서서 눈을 깜박이며 그만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신호를 무시해야 할 때였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어머, 애 말하는 것 좀 보게. 조상들 앞에서 너 이게 무슨 버르장머리냐? 준비 다 해 놓으니까 그제야 와서는. 이러니 내가 화병이 안 나고 배기냐? 아이고. 아이고. 의평이 아버지. 내가 이러고 살고 있다우.”
장옥자는 10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하소연하면서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진정해의 매서운 눈에는 가짜 울음인 것이 다 보였다. 건조한 눈에서는 눈물이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저도 이제는 얼굴도 모르는 조상님들 제사는 지내지 않겠어요. 저 가볼게요.”
그때 진정해의 뒤에서 순식간에 폭력이 날아들었다. 장옥자의 두툼한 손이 현관으로 향하는 진정해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진정해는 잠시 참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했다. 이번에는 참는 것이 유리했다. 똑같은 대응을 하면 천하의 쌍년이 되어 자신의 말에 설득력이 사라질 것이다. 진정해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지도 않고 신발을 신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지후는 늦게까지 공부를 하다 책상에서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지후를 살짝 깨워 침대에 눕히고 드레스룸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그렇게 수수방관한 남의평에게도 화가 나서 살을 맞대고 잘 수가 없었다.
그동안 참은 것이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왜 진정해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는가? 이렇게 한순간에 허무하게 깨져버릴 평화였는데 말이다.
그것이 어제의 전쟁이었다. 당분간 진정해를 찾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뒤집고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니 장옥자가 거실에 앉아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어제 손찌검에 대한 사과를 하러 왔어야 했지만, 거실에 앉아서 집으로 들어서는 진정해를 보는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분이 덜 풀려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진정해는 최대한 차분하게 대응할 작정이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게 대하기로 했다.
“어머니, 언제 왔어?”
진정해는 오늘 이미 회사에서 어미가 자기 마음대로 안 되어 상황에 대해 익숙해져 있어서 반말이 튀어나와도 당황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옥자는 오늘 종일 화병으로 앓아누워 있었기 때문에 뉴스를 보지 못했다. 진정해와의 담판에서 분위기를 잡으려고 TV도 켜지 않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진정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애미 너 이제 미쳤냐? 지금 막 나가자는 거냐.”
항복을 받으려고 진정해 집을 찾은 것인데 상상치도 못한 진정해의 반격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반말을 내뱉은 진정해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잠깐, 혹시 뉴스 안 봤어?”
진정해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진정해의 계속되는 반말에 장옥자는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다행히 아직 중학생 지후는 학원에 있는 시간이었다. 남의평도 아직은 퇴근길일 것 같았다. 진정해는 말문이 막히는 장옥자를 지나쳐서 리모컨을 찾아 뉴스를 틀었다. 방송사마다 현재의 이런 현상을 속보로 띄우고 이 사태에 대해 특집방송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제야 상황이 이해되었는지 시어머니의 표정을 조금 수그러들었다.
“반말하고 싶다고 반말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 제발 오해하지 말아.”
시어머니는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감정이 풀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 황당한 사건을 듣고 나자 장옥자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집에 가보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대화를 할수록 반말을 듣게 되는 본인만 손해였다. 진정해는 이럴 때는 장옥자가 계산이 빠른 사람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왠 지 알 수 없는 현상이 피곤한 전쟁을 피하게 해준 것 같아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