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프로모션 팀원들은 대형 클라이언트의 프로젝트가 완료되자,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2주간은 거의 점심도 자리에서 샌드위치로 해결하기 일쑤였다. 숨도 안 쉬고 일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온라인 프로모션은 고객들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수치화되어 나오기 때문에 대응할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프로모션 진행 기간에는 거의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한다고 보면 된다. 예상치 못한 오류에 대응하고, 반응이 생각보다 미지근하면 플랜B를 준비했다가 목표치를 끌어 올려야 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유난히도 변수가 많아서 1년 치의 노화가 진행된 것만 같았다. 이지경은 지난 3년의 경험으로 지금 이 시기를 즐기지 않으면 후회한다는 것을 알았다.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당분간은 칼퇴근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저녁 약속을 신나게 잡기로 했다. 그래 봤자 일주일 뒤면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했다. 일 외에는 취미 생활을 하지 않은 정곤대 부장의 몸이 근질근질하여 일을 스스로 받아오거나 만들어 낼 것이었다. 정곤대 부장은 회사 일이 얼마나 재미있냐면서 일 벌이기를 좋아했다. 그것이 정곤대 부장의 생존 방식이었다. 아이들은 장성해서 큰아들은 군대에, 둘째 아들은 해외에서 유학 중이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와이프는 동남아를 돌아다니면서 골프 여행을 즐기는 중이라고 했다. 퇴근해도 집에서 반겨줄 사람이 없어서인지 퇴근도 일찍 하지 않는 편이었다.
이지경은 익숙한 동네 신촌으로 향했다. 신촌에는 늘 젊은 사람들이 넘쳤다. 이제는 이 골목을 걸으면 스스로 노땅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런 젊음의 기운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신촌뿐이었다. 신촌 곳곳에는 옛날 남친들과 거닐던 거리나 상점들을 지나친다. 그럴 때면 누군가에게 충분히 사랑받던 젊은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기는커녕 자신도 아껴주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이지경의 친구들도 지경과 만날 때는 당연히 약속장소는 신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 팀에 막내가 들어왔는데 진짜 당돌하다? 말만 안 놨지 그냥 맞먹어. 깍듯하게 존댓말 하는 게 더 무서운 거 알지?”
패션 회사에서 MD로 일하는 고지선은 열을 내며 말했다.
“난 그런 막내라도 있으면 좋겠다. 지금 3년째 막내야. 이번에도 신입 배치 안 되면 1년 더 막내 생활해야 돼. 이제 커피 캐리어 그만 좀 하고 싶어.”
이지경은 정말로 간절히 막내 생활이 끝나길 원하고 있었다. 커피를 배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이런 허드렛일을 나하나 대리한테 명령받아야 하는 것은 유쾌하지 않았다. 나하나 대리는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커피 심부름을 시키거나 자기가 할 일을 미룰 때도 예의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떠넘겼다.
“지경아, 근데 꼭 너보다 어린 후배로 받아라. 이번에 우리 블라인드로 채용해서 나보다 나이 많은 신입 들어온 거 알지? 정말 불편해. 일 주기도 불편하고!”
상장한 지 얼마 안 되는 게임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안다정이 조언을 건넸다. 후배의 나이를 선택할 수는 없으니 의미 있는 조언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야! 나이 많은 신입이 어때서!”
이지경과 친구들은 서로가 가진 ‘막내 자리’에 대한 고충으로 열변을 토하며 술을 마셨다. 화내다가 웃다가 울다가 많은 감정을 쏟아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익숙한 돼지껍데기 가게에서 신나게 떠들어대다가 9시부터 파도타기하듯 하품을 하고 있었다. 곧 서른이 되는 이지경과 친구들은 마음은 밤새도록 놀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육체가 그 피로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10시가 넘자 모두 스스로 택시를 잡아타거나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학생 때는 끝까지 서로를 챙겨주고 집까지 서로 데려주겠다고 우겼지만, 지금은 안전하게 집에 도착하고 난 뒤 연락하는 어른이 되었다.
이지경은 간만에 친구들과 만나서 기분이 좋았다. 흥분된 기분에 평소 주량보다 넘치게 소주를 마셨더니 혀가 꼬이고 조금 비틀거렸다. 취기가 오르자 실없는 사람처럼 계속 웃으면서 걸었다.
이지경은 2호선 지하철을 타러 입구로 향하는데 입구에서 모자를 푹 눌러쓴 꼬마 아이가 바닥에 물건 몇 개를 펼쳐 두고 물건을 팔고 있었다. 모자에 얼굴이 가려지고 쪼그려 앉아 있어서 나이는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아직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체구였다. 이지경은 이 시간에 아이가 혼자서 물건을 팔고 있는지 걱정부터 되었다. 특유의 오지랖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대충 손으로 뜯어낸 택배 상자 종이 위에는 비뚤비뚤하게 "소원을 이루어 주는 드림캐처 팝니다."라는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 파란색 비닐 위에는 3개의 드림캐처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지경은 딱한 마음이 들어서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얘, 엄마·아빠 어디 가셨니? 왜 이 시간에 위험하게 이러고 있어?”
이지경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혀가 꼬부라지는 소리로 아이에게 말을 걸었지만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이지경은 아이가 팔아야 하는 물건을 모두 구입하고 아이를 빨리 이 위험한 밤의 거리에서 벗어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꼬마야. 이거 다 얼마야? 내가 모두 다 살게."
"정말요? 오늘 모두 팔기 어려운 줄 알았어요. 효력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아이는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지경은 생각보다 아이의 목소리가 걸걸해서 놀랐지만, 물건을 열정적으로 파느라 목이 쉬었다고 생각하여 더욱 측은한 감정을 느꼈다.
"효력? 아 소원!"
이지경은 바닥에 놓여 있는 손글씨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아직은 순수한 마음이 남아 있는 아이 같아서 아이를 응원해주고 싶었다.
"네, 소원을 들어주는 드림캐처예요."
"하하 알았어요. 다 줘. 다 줘. 누나가 다 살게."
"3만 원이에요. 하나에 만 원씩"
아이는 또박또박 가격을 이야기했다.
"어디 보자.... 여기!"
현금을 잘 가지고 다니지 않는 이지경씨는 가방을 뒤져서 간신히 꼬깃꼬깃한 3만 원을 찾아냈다. 얼마 전 택시비를 내고 남은 돈이었다. 아이는 3만 원을 한 장씩 잘 펴서 돈을 잘 살펴봤다. 진짜 돈인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이지경은 야무진 아이인데 늦은 시간까지 고생하다니 매우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지경은 가방에 드림캐처 3개를 넣고 일어섰다. 그때 이지경의 뒤로 사람들이 뛰어서 지하철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곧 막차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이지경은 그제야 정신이 번뜩 들어서 순식간에 지하철 입구로 들어갔다. 아이는 손을 뻗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이지경을 놓쳐 버렸다. 아이는 고개를 흔들며 체념한 듯 자리를 정리해서 유유히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