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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entcOllectOr Jul 08. 2021

#10 나는 ‘너’의 열렬한 독자

이야기의 일생



누구나 어느쯤에 몸속에 이야기가 가득 차는 시기가 온다.

순간순간 모인 단어들이 더 이상 놓여있을 공간이 없어지면 그 단어들은 문장이 되어 흘러나온다.

누군가의 몸속엔 슬픔이 많아서 흘러나온 문장은 눈물을 부르고 다른 누군가에겐 우스웠던 기억이 코미디 프로 코너 같은 문장으로 터져 나오기도 한다.



아무리 말이 없는 사람도 자신의 어느 부분은 감출 수 없이 흘러나와 몇 줄의 메모가 되기도 하고 메신저 프로필의 짧은 한 문장 더 짧은 한단어가 되기도 한다.

같은 단어도 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다른 주파수를 가져 뻗어나가는 거리가 다르고 다른 울림을 가져 누군가의 몸속으로 얼마나 깊이 박힐 수 있는지가 다르다.

지문처럼 인간마다 가진 이야기들은 다 달라 이야기로 상대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또 듣고 싶고 계속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면 우린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 자꾸만 만나야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에 만나기로 하면 기대감에 설렌다.

이야기를 하는 목소리마저 좋아지게 되면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점차 그 사람과 이야기의 주제와 전개 방식도 닮아간다. 서로의 이야기에 겹치는 부분이 많아지고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 결국 같은 이야기를 둘이서 나누어하게 된다.

영원히 한 이야기를 함께 할 줄 알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하지만 상대 또는 내가 변하면 몸안에 쌓이는 이야기가 달라지고 상대는 그 변화를 예민하게 알아챈다.

심장에서 나온 이야기가 전처럼 전개가 빠르지 않고 폐에서 나온 이야기는 여유를 잃어버리고 성대는 건조한 이야기를 뿜어내면 상대는 당황한다. 더 이상 자신이 좋아하던, 듣고 싶어 하던 이야기가 아니면 실망하고 속상해한다. 다시 듣고 싶은 이야기가 흘러나오길 바라며 보채고 원망하기도 한다

실망이 계속되고 서로에게 해주는 이야기들이 이전의 온기를 잃어버리면 그들은 이야기를 멈추고 만다.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없으면 그들은 멀어지고 존재를 잊어간다

아픔의 시간이 지나고 일상이 다시 말랑하고 평화로워지면 그 이야기들은 더 이상 생각나지 않고 인생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 이야기들을 잊은 게 차라리 축복처럼 여겨지고 상처의 극복처럼 느껴진다.



그럼 그 이야기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사라진 것일까?








나와 함께 사는 너의 이야기들



 A는 최근 직장동료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직장에서 마주치는 일상 속에 있던 사람 R

업무, 날씨, 점심메뉴 같은 일정한 이야기들을 주기적으로 주고받던 하지만 진정한 대화를 나눈 적은 없다고 여겼던 사람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은 인생의 허망함이라는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그 슬픔도 얼마지 않아 온도를 잃어가는 일정한 거리가 존재하는 그런 사이였던 사람

다른 사람들처럼 차차 그의 죽음을 잊어갔고 어느새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느 날 A에게 생긴 직장 내 트러블

퇴근 후 집에 앉아 멍하게 있던 A는 문득 R을 떠올립니다.

R이 전에 이와 비슷한 상황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었는데..


뭐라고 했더라........



시간과 함께 형체를 잃어가는 그의 말을 기억해내려고 애써봅니다.

교감이 있다고 생각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이 순간 문득 생각나는 R의 흔적을 찾아 방 안을 둘러보고 사무실 책상 위를 둘러보죠.

세상  모든 것의 유통기한이 있다고 믿는 A는 그의 말도 유통기한이 다 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방 책상 서랍에서 창틀에서 방문 손잡이에서도 그의 말을 한 점씩 찾아냈고 사무실 책상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말은 조각조각으로 여전히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고 기억하려 애쓰는 사람에게는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이야기 조각을 찾아서 주워 든 A는 시간이 지난 그의 말에서 위로를 얻습니다.

분명 당시에는 무뚝뚝한 투박한 말이었는데 시간이 지나 상황이 변한 그녀에겐 따듯한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느끼며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R을 새롭게 떠올렸습니다.

무덤덤하게만 느껴졌던 R의 화법도 나름의 배려가 있었음을 느끼며

유통기한을 다한 말이 아직 온도를 가지고 있음이 신기하고 감동스러웠습니다.



한 사람이 사라지면 그 이야기의 주인이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그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기억하고 그리워합니다.

사람의 주인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건 그 사람이 들려준 이야기 때문입니다.


흔히 그 사람이 사라지면 이야기가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은 기억을 퇴색시키고 몸을 잃은 이야기는 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직접들은 소중한 이야기들은 책속에 저장된 훌륭한 이야기들을 압도하며 주변 곳곳에 저장되어있습니다.





B에겐 엄마의 말이 그랬습니다.

어릴 때부터 정리를 잘 못해 늘 방이 어지러웠던 B는 인생에서 엄마에게 가장 많은 들은 이야기는 밥 잘 챙겨 먹어라와 청소 잘해라였습니다.

그 말들은 너무나 익숙해져서  어느 틈엔 안녕하세요나 수고하세요처럼 들렸고 사춘기에는 즉각적으로 짜증이 일어나게 하는 버튼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B는 이제 그런 말들엔 무감각해질 대로 무감각해져 그런 말들은 고막에 넣어주지도 않았죠.

그러던 어느 날 독립해 서울에 혼자 살고 있던 B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합니다.

무늬 없는 흰 봉투…

까만 줄만 그어져 있는 오랜만에 보는 정말 편지지…

낯선 글씨는 사랑하는 나의 딸에게로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나의 딸이어서 좋았고 네가 자라 나에게 친구가 돼주어 더 좋다고….

글의 중간 부분부터는 어김없이  청소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청소가 잘된 깔끔한 집엔 복이 찾아오는 법이라고. 현관은 훤하게 치워두고 해바라기 그림도 하나 사다 놓으라고.

B는 처음받은 엄마의 편지가 약간 쑥쓰러우면서도 청소하라는 말을 하려고 편지를 쓴 건가하며  의아해하고 말았습니다. 그날밤 전화로 편지 잘 받았고 청소 잘할게라고 건성으로 말하고 그 편지는 잊어버렸습니다.



그 편지는 B가 엄마에게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그 뒤 엄마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엄마의 흔적을 정리하던 B는 냉장고에 담긴 엄마의 마지막 김치를 먹다가 목놓아 울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엄마의 김치도 없어져 버리자 B는 엄마의 모든 것을 찾아 헤매다  '잔소리'를 떠올립니다.

그때까지 B에겐 잔소리란 무시해도 되는 말 짜증만 나게 하는 쓸모없는 말이었습니다

잔소리 좀 그만 하라고 짜증을 수백 번도 더 냈었죠.

그 말이 이렇게 그리워질 수도 있던 건 그 안에 담긴 진심 때문이었습니다.


흔하고 소중한 말들



그녀의 엄마는 굳게 믿었던 거죠.

우리 딸은 다 좋은데 정리정돈을 잘 못하니 내가 자꾸 이야기해줘서 고쳐줘야지.

만나서 말하면 그만 하라고 짜증을 내니 내가 안 치워줘도 깔끔하게 지내도록 편지에 써줘야지. 어디선가 들은 풍수 이야기도 해줘서 복 받게 해 줘야지.


자식들이 모두 떠나간 횅한 집에서도 엄마는 항상 딸을 생각하며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떠올렸습니다.

이제는 서울에 살고 있는 딸의 집이 걱정인 엄마는 자신이 가서 치워주고 싶지만 그것도 싫어하는 딸이기에 편지를 썼습니다. 엄마에게 청소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보고 싶다의 다른 말이었고 사랑한다의 또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그런 이야기들은 보통 잔소리란 이름으로 묶여 불리며 쓸모없는것으로 취급을 받지만 그 안에 든것은 따뜻한 알맹이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야기들이 그 사람의 알맹이었던 것을 그 사람의 깊은 마음이었던 것을 모르고 그저 지겨운 이야기로 치부해버린 것이 후회됩니다.


이제 B에겐 청소 잘하라는 이야기는 그냥 인사말 잔소리가 아닙니다.

어디선가 그리운 사람의 인사말이고 자꾸만 눈물이 나게 하는 소중한 문장입니다.

B는 그 편지를 아주 소중히 싸서 서랍에 넣어두었습니다. 종이가 헤지고 볼펜 잉크가 닳아 사라지는 것이 아숴워서요.




흔히 인생의 기로에서 힘들고 춥고 외로운 순간에서 우리는 과거 우리에게 한순간의 진심을 주었던 사람의 말이 보고 싶고 그리워집니다.

이제는 곁에 없는 소중한 순간들이 찰나였음을 깨닫고 후회하기도 하고 애달파하기도 합니다.



어느새 이런 말들이 나의 자산이 되고 나의 기록이 되어 함께 인생을 걸어가게 됩니다.







전에 들었던 아픈 이야기들




인생의 힘든 순간에 찾아낸 고마운 말들이 나에게 힘을 주지만

과거의 말들이 아직도 남아 현재의 나를 주저앉히기도 합니다.

그런 말들은 길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기도 하고 쓰레기 봉지 안에 들어가 있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몸에 박혀있기도 합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들은 가슴 아픈 말들은 버린다고 쉽게 버려지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게 치워둔다고 떠오르지 않는 게 아니어서 더 생명력이 강할지도 모릅니다.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그것밖에 못해??

너한테 기대한 내가 바보지!!



순간의 너무 잔인한 솔직함 또는 분노와 증오를 표현하기 위해 가끔 우리는 너무 과격하고 가장 날카롭게 상대를 찌를 말을 찾아내는데 열중합니다.

그 분노의 시간이 지나 화해를 하게 되기도 하고 내 말이 너무 심했다 사과하기도 하지만

이미 뿜어진 증오의 말들 또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번 뱉어진  그말들은 순간의 불길이 연소해 그 형체를 잃어도 재가 되어 몸속에 빨려 들어가 존재합니다.

그 재는 싹을 틔워 격렬한 순간에 또 다른 증오의 말로 몸 밖으로 배출됩니다.

내가 받은 증오는 내가 타인에게 증오를 뱉어도 되는 자격을 준 것처럼 여기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순간에 사람들은 비난을 하는구나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선 나도 타인을 비난하고 질타해도 된다는 그릇된 사회화로 그 말들은 영원한 소멸의 기회를 잃게 됩니다.



그 어떤 이야기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이 세상엔 어떤 이야기가 더 많이 있는걸까요?

따뜻한 말…또는 증오의 말….?


이미 세상에 나온 그 무시무시한 말들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다시 생명을 줄지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왜 이렇게 심장이 따끔거리지?





가볍고 무서운 이야기들



몇 년이 흘렀네요.

강남의 한 빌딩에서 근무하던 G는 퇴근이 가까워오던 시간 갑작스러운 들은 소식에 온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몇 층위에서 근무하던 한 직원의 추락 소식.

고층에서 떨어져 바로 사망한 그 직원의 사인은 자살로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G는 단순히 주변에서 들은 자살소식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 죽음에 자신도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에 심장이 내려앉았습니다.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던 남자 친구와의 트러블로 자살을 택한 그 사원을 G는 개인적으로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소문 속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식후 커피타임에 한동안 등장하던 주인공.

사람들은 다들 그녀를 몰라도 흥미롭게 그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디서 흘러나온 건지는 몰라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 할 사적인 이야기들과  민망한 상황들을요. 아마도 그녀를 뛰어내리게 한건 남자 친구와의 문제들만은 아닐 것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가십의 무서움은 이야기를 옮기는 사람들이 의도된 고의나 악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G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가십을 듣고 호응하고 그 주인공을 상상해보기는 하지만 그것에 큰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가십은 흥미를 위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누군가와 어울리기 위해 하는 가볍고 공기 중에 사라질 의미 없는 말들입니다.

하지만  가볍고 알맹이가 없는 말들은 공기 중에 잘 휩쓸려 멀리 퍼져나가고 여러 사람의 귀에 잘 꽂힙니다.


모두가 딱히 그녀의 불행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녀의 불행이 자신의 불행을 희석시켜주는 것도 같았고 내가 저런 상황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잘못된 안도감속에 위안을 얻기도 했었습니다.

누군가의 불행으로 나의 행복을 부풀리는 행동은 이야기를 옮김으로써 일어나기 쉽습니다. 단지 몇 마디를 옮기고 단지 몇 줄의 글을 남기기만 하면 되니까요. 내가 직접 그 사람에게 말을 할 필요도 직접 등을 떠밀지 않아도 되니까요.


G는 사람의 이야기는 동물이나 식물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예측이 불가능하고 목적성도 없지만 그렇기에 쉽사리 남을 헤칠 수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동물의 언어는 목적성이 분명합니다. 꿀벌은 먹이를 찾아내면 동료들에게 여기 먹이가 있어란 말을 보내고 새들은  이쪽으로 방향을 바꾸라고 울음소리를 냅니다. 먹이를 찾고 나면  먹이의 장소를 알리는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예측이 가능해집니다.

하지만 사람은 먹을 것을 찾아내도 비트코인 이야기를 할 수도 누군가의 험담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은 다양한 이야기를 할 선택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타이밍과 메시지를 선택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진 고등동물이지만 순간 떠오른 가십을,  의도된 험담을 제어할 브레이크를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살면서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는 가벼운 이야기가 얼마나 무거울 수 있는지를요.



G는 그 직원의 자살 이후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잎이 돋아나고 자라 가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자신은 몰랐던 식물들의 이야기가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단 생각을 합니다. 자신의 흥미를 위해 남을 헤칠 줄 모르는 조용하고 부지런한 그들의 여린 잎과 꽃 속에 담긴 이야기를 들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름다운 말들이지 않을까 하면서요.


궁금해 너의 이야기가…





나는 너의 열렬한 독자




70억 명이 이야기하고 있는 지구는 너무나 시끄럽습니다.

그중 나의 귀에 마음에 꽂히는 이야기는 너무 소수여서

나머지는 소음이 되고 나는.. 우리는... 오늘도 듣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 지구를 헤매고 있습니다.

쓸모없이 느껴지는 말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몇몇은 속 깊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는 걸 경험했습니다.

교감 없이 경청 없이 영혼 없이 하던 나의 말들이 부끄러워지던 순간이 생겼습니다. 그 이야기 조각들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어느 나뭇가지에 걸려있을걸 상상해봅니다.

나의 이야기가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쓸모없는 것이 돼 버릴 것이 후회되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무한하나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으로 생각해 마구 했던 것이 속상합니다.



한때 나의 애정과 관심을 담아 보내던 이야기의 주인공을 이제 더는 만날 수 없을 때

단절을 겪을 때 더 이상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들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그냥 상처로 남아 우리 몸을 여기저기 흉지게 만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 거절당한 이야기들이 내 키를 키우고  다리를 튼튼하게 해서 더 힘차게 걷게 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잘린 상처는 상대에게도 흉터를 남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잊혀졌을지라도 상대에게도 난 여전히 흔적을 남기고 있음을요.

그 시절  나의 이야기들은 비록 기회와 인연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버려졌지만 그 안에 담긴 설렘과 용기는 소중하지 않은 것이 아님을  또 다른 거절을 경험하며 상대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사랑처럼 상처도 닿아있다


지구의 70억 인구 중 당신이라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음은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잊히고 버려진 많은 이야기들이 누군가 그 사람 자체였고 사랑이었고 가치관이었습니다.

그것이 꺼지지 않는 생명력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구 상에 뿜어 내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자신의 것이 아닌 식상하고 뻔한 말들로 채우지 않기를!

상대를 위한다는 포장으로 상대를 아프게 하는 말이 아니기를!

누군가를 위한 위로가 너무 뻔한 말 같아 멈추지 않기를!

나 혼자 외친 이야기들은 그저 시끄럽기만 한 지구의 소음으로만 남게 되지 않도록 기운을 담아 뿜어 올리길 바랍니다.



지금은 내 옆에 없지만  그래서 모습도 희미해졌지만

어느 날은 너의 이야기 한 조각이 나에게로 내려앉길

나는 여전히 너의 독자

열렬한 독자입니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이야기의 주인들을 떠올리며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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