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인식의 틀이 나를 가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언가에 대한 틀이 생기면 생길수록 그 사고 안에 갇히는 느낌이랄까.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기 전에는 부조리라는 현상은 존재했겠지만은 그 자체로 받아들일 뿐, 내 삶을 둘러싼 부조리에 대해 생각해 보질 않았었고, 카뮈의 이방인을 읽기 전에는 이방인으로서의 감정은 느꼈겠지만은 내가 나로 존재하지 못하고, 누군가에 의해 판단되고 해석되어지는 세계에 대한 불편함을 갖질 않았었다. 삶의 목표가 나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데 있기에 얼마간은 내가 '인식'할 수 있음에 일종의 지적 허영심을 느꼈고, 스스로의 생각에 도취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 문득 그런 사고의 틀이 꼭 필요한가에 대한 의문점을 갖게 되었다.
시계는 시간을 '측정'하는 정밀 기구이다. 13세기 이후 '폴리옷이 달린 굴대 탈진기'가 등장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기계식 시계'의 탄생이 이루어지고, 15세기에 태엽이 동력으로 등장하여 공공시계가 가내용 시계로 발전하였으며, 17세기에는 시계제작의 전문화가 이루어져 수공업자들이 부품별로 분화되었다. 이렇듯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된 시계는 산업혁명과 과학 혁명을 견인하는 가교역할을 하게된다.
산업혁명 이전엔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는 것조차 어려웠으니 시계는 분명 정말 기계 기술의 극치였다. 시계 제작은 물리학과 역학의 이론적 발견이 실용화된 최초의 산업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응용역학의 전반적 발달에서 첨단을 달리며 과학 기구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처럼 점차 정확성이 담보된 기계식 시계로의 발전은 우리 삶에 필요한 많은 욕구를 충족시켰다. 하지만 오히려 그 새로운 틀로 인해 무언가가 재단되어지지는 않는지 생각해 본다. 정확도가 떨어지는 시간 속에 존재할 때는 경계에 대한 구분이 모호하기에 누군가를 판단하고 재단하는 잣대로 시간을 사용하지 않지 않았을까. 그 정확한 시간이라는 틀 속에 나를 끼워 맞추며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초점이 흐린 안경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대상에 대한 윤곽이 흐릿하기에 내가 보는 대상이 실제 대상이 맞는 지 확신에 찬 어조로 이야기할 수 없으니 어느 정도 유연해질 수 있듯이 정확히 구분되어 지지 않는 세상에서의 삶이 오히려 얼마 간은 편안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