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생몽사, 아름답게 취해서 살고 싶은 겁니다.
<이제 다시 詩作입니다>
醉生夢死 취생몽사
靑蛙 朴秀慶 청와 박수경
覺醒又夢中 각성우몽중
不得祈福生 부득기복생
放下萬乘欲 방하만승욕
兩岸狗屎田 양안구시전
술에서 깨어본들 꿈속이로다
덧없어라 복을 비는 인생아
부질없다 만 수레의 욕망도
이 언덕 저 언덕 모두 개똥밭일레
[청와 론]
1. 원전의 의미와 현재의 의미
'취생몽사'의 출전은 이천 정이가 형인 명도 정호에 대해 쓴 <명도선생행장>입니다. <명도선생행장>에서 말하는 '취생몽사'는, 정명도가 공맹의 가르침이 아닌 불교, 도교를 경계하면서, '재주가 뛰어나고 지혜가 있어도 견문에 이설들이 달라붙으면 취생몽사한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옵니다.
현재는, 술에 취하여 자는 동안에 꾸는 꿈속에서 살고 죽는다는 뜻으로, 아무 하는 일 없이 한 평생을 흐리멍덩하게 살아감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 쓰는 말이라고 합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에서, 마시면 기억을 잃게 된다는 술 이름으로 더 유명해졌습니다.
2. 술만 술이 아니라
저는 술을 좋아라 합니다. 수없이 취했다 깼다 하는 삶을 살다가 이제는 아예 술에 먹혀 사는 꼴이기도 합니다.
그건 그렇고, 취하는 건 술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비근하게, 도취(陶醉)라는 말은, 어떤 사물에 취하다시피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취하다'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깨어서 대할 때와 달리, 취해서 대할 때는, 얼이 빠지고 넋을 빼앗겨 자기(감정과 의지) - 자신(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취하다'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인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몰입하다' '열중하다'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풍경에, 향기에, 행복감에, 자기 생각에 취하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정말 헤어나오기 힘든 상황에 처하게도 되지요. 그것을 '중독'이라고 합니다. 고통이 따르는 줄 알면서도, 고통스러운데도 불구하고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술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상황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욕망에 취해버리게 되는 거지요. 기쁨과 즐거움은 마약입니다.
3. 삶이 그렇다는 겁니다.
꿀을 노리고 날아드는 나비, 나비를 향해 긴 혀를 내두르는 개구리, 개구리를 향해 강하하는 솔개, 솔개를 겨냥하는 사수, 모두 자기 삶에 열중하고 있는 거지요.
그 자기 삶에 좋은 일만 있기를, 복 많이 받기를 빕니다. 사랑과 성공과 행복, 정의와 평화와 번영, 그와 같은 목표들을 설정해 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살고 있는 거지요.
그것이 <취생(醉生)>이라는 겁니다.
자기자신을 응시하는 자기가 깨어나는 것이 각성(覺醒)입니다. 술에서 깨어났다 해도, 술자리를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그것이 꿈 속인 셈입니다. 결국 꿈 속에서 죽음에 이르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몽사(夢死)>라는 겁니다.
4. 어찌 하오리까?
누군가는 술에 더 빠져버립니다. 믿음이라는 술입니다.
누군가는 술통을 깨 버립니다.
깨침(깨우침, 깨달음)이라는 걸 해버립니다.
그 믿음과 깨달음이 우리를 저 언덕 너머로 데려다 줄 수도 있을 겁니다. 이 언덕이 개똥밭인데 저 언덕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취생몽사>를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이는 것도 '선택'입니다. 우리 삶은 취생몽사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세상살이가 중독일 수밖에 없다면, 자기자신이 그러고 있는 줄 깨어서 따스한 미소로 바라보는 성찰의 길로 나아가려 합니다.
삶의 그 무엇엔가 휘둘리면 즐거움을 빙자한 중독이고, 허덕이면 초월을 빙자한 결핍입니다. 중독과 초월 사이에 향유가 있습니다.
삶의 목표가 저 먼 곳에, 저 높은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멀고 높은 대단한 것은 아닐지라도, 지금 여기를 누리는 향유는 '아름다운 목표'일 수 있습니다.
세상 이치의 근본을 캐면서 '알음답게',
가는 길이 어렵고 힘든 길일지라도 '앓음답게',
자기자신이나 누군가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따스한 마음으로 '안음답게',
결국 자기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인 (씨)알을 창조적으로 발현시켜 '알움답게',
그렇게 <아름답게 취해서> 살고 싶은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