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선생 비선생 시명선생(說先生 非先生 是名先生)
밥통성찰록
皆吾師 개오사
往年一時講大學 왕년일시강대학
今運塔車達貨物 금운탑차달화물
涉世處事常學問 섭세처사상학문
師從萬人去行路 사종만인거행로
모두 다 제 스승입니다
지난 날 한 동안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지금은 탑차를 운전하며 화물을 배달합니다.
세상 살아가며 매사에 처하는 나날이의 삶이 배움과 물음의 연속입니다.
세상 사람을 스승으로 여기며 가던 길 가렵니다.
1. 모처럼 <청와빌라>(저의 내면 풍경)를 엿보다
101호 깍쟁이에게 선생이란 서로의 필요에 의해 고용된 직업인일 따름입니다.
102호 범부에게 선생이란 그림자를 밟아서도 안 되는 경외의 대상입니다.
201호 건달에게 선생은 두목과 동격입니다. 그래서 하라면 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합니다.
202호 장부에게 선생은 군왕과 동격입니다. 그렇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합니다.
301호 샌님에게 선생이란 똥차와 같은 걸림돌입니다.
302호 군자에게 선생이란 부모와 같은 디딤돌입니다.
401호 도사는 모두에게 선생노릇을 하려듭니다.
402호 성인은 모두를 제 선생으로 모십니다.
1. 질문
<'강사'와 '교사'와 '스승'과 '선생'의 차이는 언뜻 쓰이는 단어의 차이 정도로 보일 수 있지만 그 내면의 깊이는 사뭇 다르다고 해석한 것을 어디선가 읽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차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제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이 저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해 주었습니다.
2. 대답 : 전제
강사 교사 스승 선생 등을 모두 포괄해서 뭐라 하면 좋을까요? 가르치는 사람? 이렇게 묶어서 이야기 하면 벌써 강사 교사 스승 선생 등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한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강사 교사 스승 선생 각각을 어떻게 정의할까요? 어떻게 정의해도 좋겠습니다만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1)여래가 설하는 세계는 (2)세계가 아니므로 (3)세계라고 이름 짓는다.>
<금강경>(여법수지분)의 논법을 가져와봤습니다. 무슨 말이지요? (1)은 <도덕경>에서 말하는 '명가명'(名可名)에 해당합니다. (2)는 '비상명'(非常名)에 해당합니다. 말과 사물이 어긋나므로, 말로는 사물의 실상을 나타낼 수 없지만, 말이 아니고서는 사물의 상을 전할 수도 없기에, 사물의 이름을 임시로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사물의 이름을 방편(方便)이라 하고 그 방편으로 쓰는 말은 가명(假名)이 되는 겁니다.
가명일 수밖에 없으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애매모호한 말, 개념이 불분명한 말을 그대로 사용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논어>(자로편)에서 '반드시 이름을 바르게 해야한다'(必也正名乎)는 정신을 가져옵니다.
정명(正名)은 상명(常名)과 다릅니다. 상명의 상은 불변을 의미한다면, 정명의 정은 변화를 의미합니다. 즉 '바로잡아간다'는 말입니다. 상명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천지만물의 이치를 헤아려 이치를 바로잡아가는 것이 곧, '정명'인 겁니다.
이제, 강사, 교사, 스승, 선생이라는 가명들이 분분한 것에 대한 이치를 바로잡아보겠습니다.
3. 대답
강사나 교사나 스승이나 모두 선생이라고 하겠습니다. 강사도 선생이고 교사도 선생이고 스승도 선생입니다. 그러면 선생은 뭐 하는 사람이냐고요? 길이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쓰자면, 누구나 길 가는 행인인 셈이지요. 선생은 길잡이쯤 되려나요? 행인들의 관계를 따져 선생의 세 특성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길을 가르치고(행인1) 길을 배우는(행인2) 관계
2) 길을 묻고(행인2) 길을 안내하는(행인1) 관계
3) 함께(행인1, 2) 길을 묻고 길을 내는 관계
행인1이 선생이겠지요. 행인2는 학생이라고 해둡니다. 행인1과 2의 관계가 조금씩 다릅니다.
1)은 준비된 선생과 수동적 학생의 관계입니다. 지금의 학원 선생과 수강생의 관계라고 보면 좋겠네요. 학교에서도 이와 같은 관계의 공부가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이 관계는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교육 내용을 주고받는 신분적 계약 관계입니다. 이 관계에서는 일차적으로 교육 내용과 방법이 중요합니다.
2)는 준비된 제자와 준비된 스승의 관계입니다. 배우려는 자의 열정과 배우려는 자를 품고 길러주는 덕성의 만남이 절묘합니다. 수행자 또는 구도자가 스승에게 법문을 청하는 절실함이 이러하겠습니다. 이 관계는 지도자의 영향 아래 추종자가 인간적 됨됨이를 형성해 가는 영향수수 관계입니다. 이 관계에서는 수양된 인격과 인덕이 중요합니다.
3)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묻고 배우기를 즐기는 준비된 학생들의 관계입니다. 길 가면서 먼저 묻고 먼저 배워 먼저 깨달은 이가 있지만 뒤에 길 가는 이와 더불어 학문의 길을 가는 동학이 되는 관계이겠습니다. 수행의 길에서는 도반의 관계라 보면 좋겠습니다. 이 관계는 선배와 후배가 스스로 도운 바를 서로 나누는 호혜평등 관계입니다. 이 관계에서는 각자 자기 됨됨이와 세상 이치에 대한 통찰력을 돌이켜 보는 자기성찰이 중요합니다.
4. 정리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선생 : 학생 = 교원 신분(교사, 강사, 교수) : 학생 신분(초중고대)
2) 선생 : 학생 = 스승 : 제자
3) 선생 : 학생 = 선배 학생 : 후배 학생 = 선생 : 후생
1)의 관점에서, 학생이 다른 자리, 다른 상황에서는 선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 학생이 대학교에서는 학생이지만, 사회에서는 댄스 강사라고 해보자고요. 선생이 학생에게 댄스를 수강합니다. 선생과 학생 신분이 바뀌었지요? 이건 단지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느냐 하는 신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2)의 관점에서,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평생 동안 이어지는 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그저 표현상 1)의 관계를 2)로 표현하기도 하더군요. 1)이 2)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3)의 관점에서, 학생은 학문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학문이란 세상살이에 대해 묻고 배우는 일입니다. 선생도 학생도 모두 학생인 점에서 같습니다. 학문의 길을 걷는 데 선후가 있기에 선배로서의 학생과 후배로서의 학생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것을 선생과 후생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후생이라는 말은 <논어>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2)의 스승은 높은 곳에 있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스승이라 칭하기에도, 남에 의해서 그렇게 불리기에도 스승이라는 말은 너무 높아만 보입니다. 높더라도 너무 높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승노릇에 절어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아야겠습니다. 거기에 3)의 학생(학자, 학인, 공부하는 사람)의 길이 있겠습니다.
2)이면서 3)이면 좋겠습니다. 2)의 됨됨이이면서 3)의 자세를 지닌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1)은 저절로 따라오지 않겠는지요. 선생질을 하고 있는지, 스승노릇을 하고 있는지, 선배로서 길동무가 되어줄 따름인지 돌이켜 볼 일이군요. 자기에게 적용하는 자기성찰이 갈 길이겠습니다.
선생은 선생이 아닐 때 선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선생의 길을 학문의 길, 학인의 길, 학자의 길, 학생의 길이라 하겠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시로써 맺습니다.
師父 사부
說破貫通理 설파관통리
陰陽生克論 음양생극론
牛耳深解人 우이심해인
爲林與咸俱 위림여함구
靑蛙過則謅 청와과즉추
喧擾飯桶說 훤요반통설
反芻師宗旨 반추사종지
自己省察道 자기성찰도
스승
설파 조동일 선생님께서는 사물의 근본이치를 탁월하게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음양이 생성하고 극복하는 이치를 논하셨습니다.
쇠귀 신영복 선생님께서는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성찰하시는 분입니다.
더불어 숲이 되자고 하셨습니다.
저 청와는 되는 대로 지껄여대기나 했습니다.
밥통 같은 이야기를 시끄럽게 떠들어댔습니다.
가만히 선생님들께서 하신 말씀의 깊은 뜻을 되새겨봅니다.
자기성찰이 가야할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