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나오는 '배세(北世)'의 세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라는 탐진치 삼독에 휘둘리는 속세를 말합니다. 이를 불가에서는 사바세계, 사법계(事法界)라고 합니다. 유가에서는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에 따르는 삶이라 합니다.
돌이켜볼 것도 없이 저는 한 평생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분노라는 놈, 화라는 놈이 저를 지배해 왔습니다. 무어 그리 화가 났던지, 그놈의 화를 술로 풀려고 했습니다. 술이 화를 풀어줄 것 같은가요? 오히려 화에 기름을 붓는 격입니다.
3. 산 모퉁이 바로 돌면 심산(心山) 있거늘
속세를 벗어나려 무진 애를 썼습니다. 고2 때까지 친구 누나가 전도사로 있는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학생들이 그렇지 않을까요? 삶의 고뇌와 문제는 놓아두고라도 바른 신앙의 자세에 대한 생각조차 쉽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어른들이라고 다를 바 있었겠는가마는, 저는 그래도 좀 낫겠다 싶어서 주말 학생예배가 아닌 수요일 성인예배에 참예했습니다.
이렇다 할 대답을 찾지 못하다가 만난 것이 '동학(東學)'이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1년 있으면서 동학에 심취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저에게 있어 속세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도피처였습니다. 그것을 시에서 '심산(心山)'이라고 했습니다. 속세를 벗어나 있는 이상세계, 이를 불가에서는 이법계(理法界)라고 합니다. 도가에서는 무릉도원이라 하지 않았겠나요? 그때 저는 제가 이법계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단단히 하고 있었습니다.
4.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시에서 '무소애(無所碍)'라 한 것이 무애입니다. 무애란 거리낄 것이 없다는 겁니다. 무애에는 두 세계가 있습니다.
첫번 째 무애의 세계는 속세에서 살되 속세와 다른 세상을 동시에 사는 이중세계입니다. 이를 불가에서는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라고 합니다. 산속이 아니라, 속세에 더불어 살아도 속세의 문제들에 빠져들지 않고 휘둘리지 않고, 홀로 고고하고 고매하고 고상하게 사는 겁니다. 그러면서 다른 이들을 구제해주겠노라 합니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 대학 강단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느 새 저는 친구 누나처럼 '전도사'가 되어있었습니다. 동학을 종주(宗主) 삼아 불가와 유가와 도가, 우리 민족의 한사상, 거기다 기가(基家, 기독교)까지 끌어다가 넘치는 이야기들을 학생들에게 쏟아부었습니다.
제 깐에는 속세의 모든 문제에 대해 제가 가지고 있는 이상으로 다 해석하고 해답까지 제시해 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정말 거리낄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제 생각이 곧 최종결론이라고 여겼었는데...
5. 무얼 그리 갈래갈래 깊은 산 속 헤매나?
한 학생이 저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남겼습니다. 강의시간에 삶의 문제와 그 삶을 잘 해결해 가는 방식에 대해 그렇게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다가,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줄 담배를 피우는 제 모습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 모습은 그저 삶에 찌든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이런 걸, 금강저라 하는데... 저의 망상을 산산조각 내는 내리침이었는데... 그때 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니가 나를 어떻게 안다고? 나를 함부로 평가해? 그걸 공개적으로 글을 올려?'저는 그 글을 슬그머니 삭제해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그 학생이 한 동안 소동을 피웠습니다. 수십년이 지나도록 그 학생에게 전하지 못한 말을 여기서 전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어찌어찌하여 저는 지금 시장통에서 과일을 파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장인어른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박서방이 다 내려놓고 지금 하는 일을 하겠다고 결단한 것은 정말 쉬운 결단이 아니여. 나는 박서방의 다른 것보다 그 점을 가장 높이 사네."
두번 째 무애의 세계는 속세의 쓰임에 따라 사는 여행지입니다. 저는 이것을 향유세계(享有世界)라고 합니다. 목적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 목적이 지금 여기를 부정하는 것일지라도,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늘 지금 여기에 내재돼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여기의 세계가 목적을 위해 살아지는 도구적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을 하고자 억지로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행위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저절로 무엇을 이루어가는 겁니다. 그것을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라고 합니다. 그것을 불이(不二)의 세계라고 합니다.
6. 담배는 끊었는데 술은 어찌할꼬?
술은 좋아하는데 술이 없는 곳으로 가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살겠다지만, 술이 있게 되면 언제든 술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담배가 없으면 안 피우겠지만, 옆에서 누가 담배를 피우면 술 한 잔 할라치면 한 대 생각 간절하겠지요. 속세를 떠난 세계, 거기까지가 이법계라는 겁니다. 속세에 묻히면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겁니다.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술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담배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옆에 술이 있거나 옆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이제 아예 술과 담배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저만 그러면 되는데, 술을 마시면 어디가 어떻고 이래서 저래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고 술을 끊는 게 어떻겠냐고, 이래저래 금주 금연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한 술 더 떠서 운동전도사 건강전도사가 되었다고 할까요? 좋아라 하는 사람만 있겠나요? 싫어라 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자신이 오른 경지, 거기까지가 이사무애법계라는 겁니다.
끝까지 밀고 나가보겠습니다. 술자리에 가면 술을 마십니다. 술과 술자리 모두 즐깁니다. 술이 취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요? 잔잔하고 고즈넉하게, 그렇게 빙긋이 웃으며 술자리를 즐길 수 있다면 술이 좀 취한다 한들 어떻겠는지요? 주정을 좀 부린다 한들 빙긋 웃던 그놈이 허파에 바람 든 놈처럼 히죽거리고, 속없이 물러터진 웃음 짓게 되는 거겠지요. 그러다 보니 하나둘 난봉을 피우던 술꾼들이 어느새 술들을 그렇게 마시게 되었다든가 어쨌다든가요. 한데 어우러져 제가 사는 세계에 휘둘리지도 않고 자기 세계에 매몰되지도 않는, 그 무엇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면서 제가 사는 일상의 세계에 쓸모 있게 살아지는 삶, 그것을 사사무애법계라 하나 봅니다. 너무 멀리까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