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던가, 강의를 마치고 학과사무실에 들렀는데, 누군가 학과사무실 작은 화이트보드에 저렇게 '낙서'를 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원작은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입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전문
처음에는 화이트보드에 쓰여 있는 글이 '낙서'겠거니 했습니다. 다음에는 안도현의 시에 대한 '해석'일 수 있겠거니 했습니다. 나중에는 이것도 한 편의 '시작품'이겠거니 했습니다.
2. 별과 걸레
낙서와 작품의 거리에 대해 다음 시를 감상하는 것으로, 낙서 같은 시를 화이트보드에 써놓았던 학생과 안도현 님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밤하늘에 별이 있다면 방바닥에 걸레가 있다. - 안도현, <너와 나>, 전문
허공에 휘영청 펼쳐진 것이 하늘인가요? 그렇다면 방바닥은 땅바닥인 셈입니다. 그 거리가 얼마나 먼가요? 별과 걸레의 느낌만큼이나 거리가 멉니다.
'있고 / 있다'가 아니라, ‘있다면 / 있다’라고 했습니다. 저 ‘있다면’에 두 가지 느낌이 들어 있습니다. 우선은 대조적인 느낌입니다. 다음은 유비적인 느낌입니다.
저는 세상 천지만물을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음양'이라는 관점입니다. 다만 음양은 음 속에 양이 들어있고, 양 속에 음이 들어있다는 사상이라, 음과 양이 서로를 생성하면서 극복하는 생극적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런데 세상 천지만물을 둘로 나누어 '버리면' 그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은 닫혀 버립니다. 구조주의에서, +/--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처럼, 어떤 성질이 있고 없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대조라면 하늘과 땅이 말 그대로 천지차이라는 뜻이 됩니다. 유비라면 천지가 거기서 거기라는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요?
하늘이 방바닥이 되고, 별이 걸레가 되는 겁니다. 심했나요? 바꿔 보면 어떻게 될까요? 방바닥이 하늘이 되고, 걸레가 별이 되는 겁니다.
별은 어둠이 있어야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있고, 걸레는 더러움이 있어야 그 존재가 드러납니다. 별은 우리의 마음 자리를 밝혀주고, 걸레는 우리의 몸 자리를 깨끗이 해줍니다. 밝음이 오면 별은 물러나고, 손님이 오면 걸레는 물러납니다. 안팎으로 우리에게 별과 걸레는 그렇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걸레에서는 현실적 더러움만 가져오고, 별에서는 낭만적 동경만 가져옵니다. 걸레라는 별이나 별이라는 걸레나, ‘너라는 나'나 '나라는 너’는 같으면서 다른 것이겠습니다. 다르다고만 보면 쉽고, 같다고만 보면 말이 안 됩니다. 같으면서 다른 ‘너와 나’가 연관된 전체이고 숭고한 전체라는 겁니다. 나누어 보되, 깊이 있게 나누어 보자는 거라면 어떨까요?
‘낙서와 시작품’, ‘별과 걸레’, ‘개똥과 약’, ‘돈과 돌’, ‘신과 나’, ‘밥과 똥’, ‘수다와 침묵’, ‘욕과 칭찬’, ‘그리움과 미움’, ‘점과 우주’, 모두 다 그러면서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닐까라고?
3. 시로써 맺습니다.
勿蹴煉炭灰 물축연탄회 爲孰燒身乎 위숙소신호 勿爲帉幯汚 물위분절오 耀他功弗居 휘타공불거
Don't kick the briquette ash. For whom have you burned yourself? Don't say the rag is dirty Rags only make others shine, but do not live intoxicated with one's own accomplishments.
연탄재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를 위해 너 자신을 불살라 보았더냐? 걸레가 더럽다 말하지 마라 남을 빛내주면서도 그 공적에 살지 않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