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심장이라는 사물(2)>이 다시 태어나는 산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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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심장이라는 사물(2)>이 다시 태어나는 산통
심장이라는 사물 2
- 한강
오늘은
목소리를 열지 않았습니다./1)
벽에 비친 희미한 빛
또는 그림자
그런 무엇이 되었다고 믿어져서요./2)
죽는다는 건
마침내 사물이 되는 기막힌 일/3)
그게 왜 고통인 것인지
궁금했습니다./4)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84쪽)
/번호는 제가 임의로 적어놓았습니다.
[청와 론]
1. <인간>에서 <동물(생물)>로
2)에서 <나>는 <벽에 비친 희미한 빛 / 또는 그림자 / 그런 무엇>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무엇>이 무엇일까요?
<나>는 <누구>라고 해야할 <인간>입니다. <무엇>이라고 해야할 <사물>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런데 <스스로 발하는 뚜렷한 빛>도 아니고 그저 <벽에 비친 희미한 빛>에 불과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실체>도 아니고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그림자>에 불과한 <사물>과 같은 <무엇>이 되었다는 겁니다.
2. 그 결과
그래서 <오늘은 / 목소리를 열지 않았습니다>/1)라고 합니다.
<목소리를 여는 것>과 <목소리를 내는 것>은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목소리를 여는 것>은 그저 목소리가 나오도록 발성기관을 이리저리 놀리는 것을 말합니다. <목소리를 내는 것>은 자기의 주의주장을 표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목소리를 열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을까요? 주의주장을 말하는 것은 <인간>로서의 행위입니다. <나>는 이미 <사물>과 같은 <그런 무엇>이 돼버렸기 때문에 <즉물적(卽物的) 행동>밖에 할 수 없게 된 겁니다. <오늘은> 그것마저도 하지 않은 거지요.
3. <동물(생물)>에서 <사물(무생물)>로
<죽는다는 건 / 마침내 사물이 되는 기막힌 일>/3)
동식물이 신체적 생리활동과 감정적 소통을 못하게 되면 사물이 되는 겁니다.
그나마 생물로서의 삶에는 아직 자의적 행동이라는 자유가 남아있습니다. 이제 그 <벽에 비친 희미한 빛>마저 꺼져버리면, 그림자나 그림자의 주인이나 서로 동일한 물리화학적 존재(무생물, 사물)가 돼버리면, 그 얼마나 <기막힌 일>이겠습니까?
4. 없는 다리가 아파요~
<그게 왜 고통인 것인지 / 궁금했습니다.>/4)
저의 아버지께서 재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 때문에 슬픈 것일까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다시는 뵐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슬픈 걸까요?
아름다운 책 한 권 소개합니다. <<KBS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마음>>(이영돈 지음, 위즈덤하우스, 2006년)이라는 책입니다. 철도원 김행균 씨가 한 아이의 생명을 구하면서 왼쪽 다리를 잃고, 환지통(幻肢痛)의 아픔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89쪽)
<없는 다리의 통증(환지통)>은 <뇌가 만들어 낸 통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있는 다리의 통증>은 다리가 아픈 걸까요? 그것 또한 다리가 아프다고 뇌가 만들어내는 걸까요?
고통이 실제(實際)로는 존재(實在)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정신적 괴로움(苦)과 육체적 아픔(痛)이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만들어 내는 작용일 수 있다는 겁니다.
5. <죽는다는 건> 재론(再論)
<죽는다는 건>의 의미를 또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인간과 생물이 사물이 되는 현상을 두고 <죽는다>고 하는데, 죽어야만 죽은 게 아니라, 살아도 죽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인지장애>를 앓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고령의 나이와 심각한 <인지장애>가 함께 있는 분들을 뵐 때,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사람이 언어적 사고와 언어적 표현을 못하게 되면 동식물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식물인간>이라는 말, 잘못 쓰고 있는 말입니다. <뇌사상태>이든 <식물인간 상태>이든 기능으로는 <식물>에 비할 수 없습니다. <식물>과 <사물> 사이에 있는 겁니다. 식물은 고도의 판단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회적 삶>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갑에 의해 을이 도구화 되고 남성에 의해 여성이 대상화되는 것도 사람을 <사물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에서 통렬히 비판했습니다. 이미 최제우 선생님은 그것을 <옮김(移)>이라고 했습니다. <인격살해>라는 겁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서로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이 <불감증>으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매일 보면서도, 서로를 <사물>로 대하게 되는 겁니다.
6. <죽는다는 건> 삼론(三論)
<사물>에게는 물리화학적 법칙이라는 것만 탑재돼 있습니다. <생물>과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은 <죽어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을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보는 매우 편협한 시각입니다.
<생물>은 <사물의 특수한 형태>일 뿐입니다. <사물>이 아닌 그 <무엇>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생물의 특수한 형태>일 뿐입니다. <생물>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이 아닙니다. 결국 <인간>은 <사물의 특수한 형태일 뿐>입니다.
<인간이라는 생물>은 <생물이라는 사물(무생물)>에 포함되는 겁니다. 즉 <무생물>이라는 <말>은 <생물>의 입장에서 <인간>이 이름 붙인 겁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돌>도 <물>도 <공기>도 모두 <기(氣)라고 하는 생명>이라는 겁니다. 제가 늘 <말>을 정의할 때 가져오는 만해 한용운 선생님의 <말>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생명>만 생명이 아니라, 활동운화(활동, 운동)하는 모든 것을 <생명>이라 합니다. 그리하여 <사물(무생물)>도 <생물>도 <인간>도 모두 다 넓은 의미의 <생명>입니다. 우주가 활동운화하는 <생명>이라는 겁니다. 수소분자 하나가 활동운화하는 <생명>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정의한다고 해서 <우주>가 고장이 나거나 <수소분자>가 병이 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병든 인간>과 그로 인해 <병든 지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7. <죽는다는 건> 결론(結論)
우주가 <생명>이라면 우주가 <죽는다는 건> 물리학에서 말하는 <열죽음(heat death)>일 겁니다. 그런 것이 있는지 없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우주가 죽기 전에 우주의 모든 사물들은 <생생불식(生生不息)>할 따름이라고 봅니다. <생명>은 <매 순간 죽음으로써 다시 태어나 사는 겁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생명>이 스스로를 창조적으로 발현해 나가는 과정이 생명 활동이라는 겁니다.
그와 같은 거대 이론에 관심 없다면, <저의 아버지의 삶>을 가져와 봅니다. 아버지는 사시는 동안 <완고하신 아버지>로 제 안에 살아계셨습니다. 아버지의 삶은 꺽쇠(<>)에 묶이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삶 또한 <생생불식>하시는 겁니다.
아버지의 만년에 아버지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그럴 수밖에 없으셨던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가족을 지키셔야 했던 아버지>, 그래서 <근면과 검소를 제게 물려주신 아버지>로 다시 살아오셨습니다. 지금은 <보고 싶어도 뵐 수 없는 아버지>, 그래서 <그리운 아버지>로 제 안에 살아계십니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한용운, 님의 침묵)
저는 아버지의 침묵의 소리를 듣기에, 아버지는 그렇게 제 안에 다시 태어나신 겁니다. 이제 아버지는 제 안에서 저로 사시다가, 제가 만나는 모든 <생명>에게로 그렇게 <다시 태어나실 겁니다>. 이 글이 아버지를 다시 태어나시게 하는 <출산>인 겁니다.
<마침내 사물이 되는 기막힌> 고통은 <생명이 다시 태어나는 산통(産痛)>이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