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꿈에 어제 꿈에 보았던 <파란 돌>
한강 시 읽기, 파란 돌
파란 돌
- 한강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1)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2)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3)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4)
나도 모르게 팔 뻗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5)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6)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7)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8)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9)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10)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33-35쪽)
/번호는 제가 임의로 적어놓았습니다.
[청와 론]
1. 거울에서 우물로, 우물에서 냇물로
이상이 '거울'을 통해 나타낸 것은 <낯설은 자의식의 세계>입니다. 현재 시점의 낯선 자기자신을 진찰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윤동주가 '우물'을 통해 나타낸 것은 <자기를 객관화한 세계>입니다. 과거 시점의 객관적 자기자신(그 사나이)에 감정이 이입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강이 '냇물'을 통해 나타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냇물은 일단 시에서 현재진행형으로 흐르고 있는 '십 년'이라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십 년'이라는 특정 시간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십 년'으로 표현된 자기내면의 특정 시점일 뿐이지, '냇물'의 흐름은 자기 삶 속에 함께 흐르고 있는 개인사, 가족사, 사회사, 지구사, 우주사 전체를 망라합니다.
그것이 확장되면서 채워지는, <냇물의 시간>입니다. 누구나 우주사라는 시간 속에서 개인사를 살고 있다는 겁니다.
2. 냇물 속
냇물 속은 내면의 세계입니다. 각자의 내면 세계는 서로 같으면서 다릅니다. 같은 시간의 흐름(근현대사)을 공유했어도, 그 시간의 체험은 각자 다르게 내면화됩니다.
그렇게 흘러가는 자기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면' 어떤 모습일까요?
들여다 보는 순간 이미 그 내면의 어마어마함에 막막해집니다. 그래서 특별한 어떤 시점, 어떤 관점, 어떤 이유 또는 어떤 사건이 필요합니다.
그 특정한 맥락이 없는 자기의 내면세계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존재합니다. 즉 내면세계는 체험의 축적과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과 기억을 자기화(내면화)하는 활동을 통해 자기를 새롭게 낳는 일들을 자기도 모르게 진행을 합니다.
그것을 저는 <무한한 가능성의 창조적 발현>이라고 합니다.
<십 년 전 꿈에 본 / 파란 돌>1)
'십 년 전 꿈'이 특정 시점이네요. '꿈'이란 장치는 자기의 내면세계로 들어가는 계기인 겁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3. 파란 돌
<난 죽어 있었는데 /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 아, 죽어서 좋았는데 /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2)
'죽음'이 실제 죽음이든, 임사체험이든, 꿈 속을 죽음이라 표현한 것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죽어서 좋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환하고 솜털처럼 가벼웠다는 겁니다.
이제 거꾸로 꿈 속의 죽음을 통해, 꿈 밖의 삶인 현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는 거지요.
그 삶은 어둡고 무거웠다는 겁니다.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삶이 아니었던 겁니다.
<투명한 물결 아래 / 희고 둥근 / 조약돌들 보았지 / 해맑아라, / 하나, 둘, 셋>3)
어쨌든 그 꿈 속에서 죽은 채로, 자기 내면을 들여다 봅니다. 오랜 세월 닳고 닳은 해맑은 조약돌들,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잊고 살았던 자기 시간들, 자기 모습들을 하나 둘 만나게 됩니다.
<거기 있었네 /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 그 돌>4)
<희고 둥근 해맑은 조약돌>은 현실에 대해 아무런 의식 없이 깨끗하고 무난하고 맑고 밝게 살아가는 죽음 같은 삶의 기억들입니다.
<파란 돌>은 현실에 대해 자기 빛깔을 가지고 무겁고 깊은 밤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삶의 기억입니다.
4. 파란 돌로 <앓음답게> 다시 태어나려면
<나도 모르게 팔 뻗고 싶었지 / 그때 알았네 /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 그때 처음 아팠네 /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5)
삶은 <무한한 가능성(자기내면)의 창조적 발현(현실적 활동)>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 내면에 고요하게 숨 죽이고 있던 <자기 내면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죽어있는 것처럼 <고요하게> 숨 죽이고 있는 <그 삶>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에 들어가 <그 삶>과 만나야 합니다. 해맑은 삶에 안주하려는 것으로부터 아픈 삶일지라도 자기 삶의 역사를 파르스름하게 빛내주는 자기 안의 <알>인 <파란 돌>을 움틔워야 하는 겁니다.
5. 거듭남 또는 알움다움
<난 눈을 떴고, / 깊은 밤이었고, /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6)
아직은 <깊은 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동주의 싯구처럼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를 해야 합니다.
<아직 거기 / 눈동자처럼 고요할까>10)
<십 년 전>일지, 더 오랜 견딤이었을지, 빛이 달라졌을지, 사라졌을지, 얼핏얼핏 보였을지 모를 자기 안의 <파란 돌>이 <지금 여기>로 살아오고 싶다는 겁니다.
말없는 눈동자처럼 고요하게.
참으로 <앓음다움>을 통해 <알움다움>으로 거듭나고 싶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