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말판독 제17장
몸말판독 제17장 <'기억'과 살다>
'기억'과 '위안부'와 '책무'의 따옴표를 다시 판독하다.
2023년 1월 4일
1. 어머님 뵈러 가는 전철 안에서
얼마 전 선배님이 번역하셨다면서 주신 , <'기억'과 살다>라는 책을 들고 나섰습니다.
전철을 타고 가면서, 그 책의 작은 따옴표와 한 판 했습니다.
제목에서부터 <'기억'과 살다> 그놈이 있네요.
부제에도 그놈이 있는 거예요.
(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강덕경의 일생)
옮긴이 서문의 첫문장 속에는 이중 작은 따옴표가 있는 거예요.
('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 강덕경의 일생')
어라?
예사롭지 않은 작은 따옴표에 대한 수사가 진행됩니다.
음~ 요거는 강조니까
음~ 저거는 그래 따온 말이라서
으으음~ 이것은? '소위', '이른 바' '일반적으로' 할 때 쓰는 건데?
'기억'이 그런 줄, '위안부'가 그런 줄,
'책무'가 그런 줄...
그 때부터 새삼스럽게 옮긴이와 지은이의 깊은 생각에,
작은 따옴표 하나?
고작 니가 관심 있는 게 그거였어? 랄 때 책을 접어야 했습니다.
2. 어머님 댁에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책장을 넘기는데 어느 한 쪽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던 거예요. 강덕경 할머니 사진이 나오는 쪽에서는 정말 '흐허어어엉'하는 소리를 내면서, 그때부터 내내 울었어요.
3. 계속 울면서 귀가해서
'엄마(군대 갔다 온 후로 '어머니'라고만 했는데), 엄마 사랑해요~'<어라! 작은 따옴표 안에 그놈 또 하나 들었네?>라면서 전화 드렸어요.
안해도 안아주고 막내딸도 안아주고...
4. 13년 만에 책을 손에 들었습니다. 책동네, 글동네 얼씬도 안 하겠노라 되지 않은 다짐을 했더랬었는데, 그렇게 저렇게 '다시' 여기 브런치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2026년 3월 24일
1. '다시' 떠오른 작은 따옴표
그 따옴표 속에서,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는 저자와 책의 역자인 윤명숙 선배님의 치열한 재판독의 '책무'를 새삶스럽게 느낍니다.
2. 기록 방식: '닫힌 텍스트'에서 '흐르는 잔여'로
1) 겹겹이 충적되는 기록
하나의 정답(공식 역사)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의 판독(증언, 감상, 분석)을 층층이 쌓아가는 작업입니다.
윤명숙 선배님의 '책무'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뭉클한 대목입니다.
먼저, 초기 사건(잔여와 흔적) 위에 후세대의 판독들이 어떻게 침전되어 가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며 재판독이 이루어집니다. 그 판독의 '기록'은 고정되지 않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두꺼워지는 지층이 됩니다.
지금 여기의 '기록'은 아래층의 '기록'을 부단히 재판독합니다. 그것이 아래층의 '기록'이 박제가 되지 않고, '기록'되지 않은 사건의 잔여들을 떨림으로 다시 지금 여기로 되살아 오게 하는 '판독자'의 '책무'입니다.
다음, 그 '기록'은 부사적 '기록'으로, '기록' 방식의 층위를 확충합니다.
2) 부사적 기록법: 기록자에서 공명자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라는 명사적 '기록'을 넘어, 그 사건이 "어떻게 존재를 흔들었는가"라는, 명사적 '기록'에 쌓이지 않은 '질감'을 '기록'합니다. 그것이 '어떻게'라는 물음으로 접근하는 사건 수사법입니다. 그것은 몸말에 대한 판독 기록입니다.
이런 방식입니다. 피해자의 고통 수치나 연대기적 나열 대신, 그분이 남긴 미소의 잔향, 목소리의 떨림, 침묵의 길이 등등 사건의 흔적들을 촘촘히 남깁니다. 이는 논리적 이해를 넘어 정동적 연결을 가능케 합니다.
잔여와 흔적 속에서, 존재의 삶이 어떻게 타자의 판독 속에서 압착되고, 뒤틀리고, 흔들려 왔는지...
앓음이 알음으로, 알움으로, 안음으로, 어떻게 전이되는지, 고착되는지...
그 삶에 내가, 우리가 어떻게 얽혀있는지...
3. '사과(사죄)'와 '용서'의 종결성에 대해
종결적 사죄와 용서에서 비종결적 판독으로
진정한 사죄는 "이제 사과했으니 끝났다"는 종결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대신, 타자의 앓음이 알움(새삶)으로 전이될 때까지 나의 판독 주권을 낮추고 기다리는 '자기에 대한 재판독의 예의(알움다움)'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과'를 받는 것이 목표도 목적도 아닙니다. 그것은 피해자의 시간입니다.
그러면 용서란, 언제부터라는 선형적 시간 속에서 종결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 또한 앓음다움이 알움다움으로 전이되는 피해자의 시간입니다. 그 알움다움은 끝내 안음다움이라는 용서에 이르지 않을 수도 있고,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용서는 피해자와 침묵의 시간을 함께 견디는 피해자의 시간입니다.
5. 피해자와 가해자:
따로따로에서 얽힌 뭉치로
'나'는 있다고 하니까 있는 겁니다. 그게 판독입니다. 없다고 하면 없게도 되겠지요. 그 또한 판독입니다. 그것이 언어라는 꿈, 깨어날 수 없는 언어몽입니다.
언어로 하는 판독은 늘 오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오독의 잔여가 다음 삶(판독)의 불씨가 됩니다.
언어는 늘 오독일 수밖에 없기에, 그 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잔여가 다음 삶을 추동하는 에너지가 됩니다. 따옴표는 그 '틈'을 보존하려는 처절한 사투입니다.
언어와 오독과 잔여는 삶의 실패가 아니라, 삶의 동력입니다.
그 있는 듯 없는 나를, 불가에서는 연기라 했고, 그걸 또 공이라 했고, 저는 그걸 얽힘이라 합니다.
'위안부'를 어떤 위상에서 판독하느냐에 따라, 내가 그 '위안부'의 피해자와 같은 처지일 수도 있고, 가해자와 같은 상황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기억'과 '기록'의 '책무'가 종결될 수 없다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사건은 종료될 수 있어도, 판독은 종결될 수 없습니다.
사죄와 용서로 사건을 종결시키는 것은, 사건에 대한 재판독이 계속 이루어지지 않으면, 얽혀있는 폭력에 대한 은폐이고 스스로를 무혐의 처분하는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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