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톱 교향곡 제2악장, 쟁투로 이어지는 변주
밥통성찰록
짜고 치는 고스톱의 핵심에는 쟁투의 재미가 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벼들어 끝장을 보고 기어이 내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극단적 마음가짐에서 쟁투의 재미가 나온다. 기복이 모든 생명에게 기본적인 성질이라면 그 기복에 경쟁심 또한 당연히 내재해 있겠다. 이기고 지는 놀이를 만들어 놓았는데 이기고 지는 것이 전혀 없지만은 않겠다. 이기고 지는 우승열패의 재미가 곧 쟁투의 재미이다.
가위바위보에서부터 전쟁에 이르기까지 우승열패의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방식이다. 문제는 그 우승열패의 경쟁심이 극단으로 흐르느냐 그렇지 않고 균형을 잡을 수 있느냐 하는 데 있다. 극단으로 흐른다는 것은 우승열패의 결과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는 뜻이고, 상대를 적대적으로 대하게 된다는 뜻이다.
경쟁심이 발동하겠지만, 다시 안 볼 사람도 아닌데 적대적으로 대할 수도 없고, 하여 상대를 속이거나 해를 입히는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면 우승열패의 미의식은 잠재되고 길흉화복의 미의식이 발현된다.
누가 우월한지 누가 승리할 것인지 우승열패의 결과를 알고 있는데 그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면, 승패의 결과라는 운명을 안다는 것이 무의미하다. 누군가 미리 정해진 운명을 알고 있으면서 그것이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꿀 수 없다거나 바꾸지 않는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그와 같은 상황이 짜고 치는 고스톱과 같다.
쟁탈의 재미 또한 어쩔 수 없는 삶의 한 방식이다. 거대한 공룡 같은 우리 문명이 이미 짜고 치는 고스톱과 같은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다. 아름답고 추하고, 착하고 악하고, 옳고 그르고, 모든 이분법적 극단들이 우리가 짜놓은 거대한 틀이다. 짜고 치는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을 각성이라고 한다. 그 각성의 내용이 부당한 줄 알았으면 끊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수운 최제우 선생님은 각비(覺非)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했다.
짜고 치는 부당한 고스톱 판에 끼어있는 줄 알았으면 판을 털고 일어나거나 새판을 짜야한다. 자유롭게 새판을 짜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짜고 치는 판에 부당하게 붙잡아 놓는 협잡꾼들이 있다. 그 판에서 생명이 유린되고 있다. 그들의 생명 유린에 맞서서 새판을 짤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상대가 극악스러울 때는 싸움이 새판을 짜는 한 방법이 되기도 하겠지만, 적대적이고 파국에 이르는 상대와의 싸움이 아니고 상대의 부당함과 맞서 싸우는 각성의 싸움이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은 병 주고 약 주는 고스톱 판으로 새판 짜서 다시 쳐야 한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지역사회에서, 국가사회에서, 국제사회에서 수없이 많은 부당한 제도와 관행이 행해지고 있다. 부당한 관행을 비판하기는 쉽다. 부당한 관행을 고쳐 정당한 관행을 새로 마련하기는 쉽지 않다. 그 부당한 관행을 행하고 있는 놈이 자기 자신이라면 더욱 그렇다. 짜고 치는 맛에 찌들어 그 맛에 사로잡혀 버린 거다. 병에 걸리고도 병에 걸린 줄 모르고 사는 거다.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병이 깊어진 뒤이겠다. 자기를 부정할 수 있는 용기, 자기를 극복할 수 있는 싸움을 벌이는 데 거룩한 고스톱의 재미가 있겠다.
(출근 길 버스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