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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톱 교향곡 제2악장, 운명에 의한 변주

밥통성찰록

by 청와

‘제 아비를 죽이고 제 어미를 범할 운명’이라는 신탁이 나오는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이 있다. 제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제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서자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이야기한 <홍길동전>이 있다.


운명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점이 두 이야기의 공통점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죽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고, <홍길동전>은 죽기 전까지 어떻게든 서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관한 이야기라는 차이점이 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의 아버지는 누가 죽인 걸까? 오이디푸스인가? 신탁에 그렇게 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고 했지 않은가? 오이디푸스는 신탁의 운명을 거부하고자 했으니 신이 살인교사를 한 것은 아니고, 오이디푸스를 좀비로 만든 셈이다. 그런 면에서 참 나쁜 신이다.


<홍길동전>에서 누가 홍길동에게 서자라는 질곡을 씌워준 걸까? 길동이 아버지 홍판서인가? 어머니 시비 춘섬이인가? 신분제를 정한 조선사회, 중세사회에 잘못이 있다. 그런 면에서 참 나쁜 사회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운명에 대해 불만을 품고 투덜거리며 살다 간다. 101호 깍쟁이의 선택이다.

2. 운명에 대해 복종이 미덕이라며 세뇌 당한 채로 살다 간다. 102호 밥통의 선택이다.

3. 운명을 거역하며 고난한 생을 살다 간다. 201호 건달의 선택이다.

4. 운명의 테두리 안에서 삶을 개척하며 살다 간다. 202호 장부의 선택이다.

5. 운명을 부정하며 숨어서 살다 간다. 301호 샌님의 선택이다.

6. 하늘이 명한 도리를 닦으며 살다 간다. 302호 군자의 선택이다.

7. 사주팔자를 고친다고, 겉사주 속사주 양력사주 음력사주 전생사주 내세사주를 죄다 들여다보며 살다 간다. 401호 도사의 선택이다.

8.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게 운명이라면 저만치 구석에 품어는 두고, 세상 돌아가는 근본이치를 추측(추기측리, 세상살이를 미루어 근본이치를 헤아려보는 짓)하며 살다 간다. 402호 성인의 선택이다.

(청와빌라 거주자에 대해서는 <경청 너머 경청> 참조)


어느 것 하나를 고르든, 여럿을 골라 섞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짓을 하든, 자기가 선택하면 된다. 선택은 모든 생명의 존재양식이다.


내가 추측하는 세상은 끊임없이 활동운화(活動運化, 살아 움직이며 지속-변화하는 것)한다. 혜강 최한기의 지론이다. 이어가야할 건 잇고, 바꿔야할 건 바꾸면 된다.


내가 추측하는 지금 세상살이는 결국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이다.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과 신을 창조한 인간이 짜고, 아직도 사기를 치고 있는 세상이다. 천국과 지옥, 윤회와 구원을 팔면서 사기를 치는 것을 사기라고 했다가는 경을 칠 수도 있는 무서운 세상이다. 가정, 직장 지역사회, 국가, 국제사회에서 행해지는 부당한 제도와 관행을 보면 가진 놈들이 갑질하면서 짜고 치는 세상이다.


부당하게 짜고 치는 세상에 대해서는 꼰대(샌님)의 부정정신과 꼴통(건달)의 저항정신이 필요하다. 짜고 치는 고스톱, 부당한 운명에 대해 혁명이 있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그 혁명은 세상에 앞서 자기로부터의 혁명이어야 한다. 혁명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자기로부터의 혁명들이 무르익었을 때 도둑놈처럼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짜고 치는 세상이라는 말의 깊은 의미는, 세상만사가 인연에 의해 운화(지속-변화)하는 것이라는 데 있다. 인(因)은 개체의 내적인 됨됨이를 말한다. 연(緣)은 개체들의 관계인 짬짬이를 말한다. 짜고 짜이고 되고 또 되고 하면서 이루어지는 세상 자체의 인연이 곧 창조이고 윤회이다. 새판을 짜는 것이 창조요, 판을 굴려가는 것이 윤회이다.


인격신 관념은 이제 폐기해도 된다. 존재론 영역에서는 우주자체, 존재자체를 신이라, 신비한 존재라 하면 된다. 인식론 영역에서는 알다가도 모를 우주자체의 오묘한 인연의 이치를 신이라, 신비라 하면 된다.


이 이치 밖의 이치, 우주 밖의 신에 대해 나는 모른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고, 모르는 대로 내버려 두는 모름다움이 알음다운 거다.


인연에 좋은 인연도 있고, 악연도 있겠다. 나는 아름다운 여인과 아름다운 인연을 맺어 잘 살고 있다. 운명이고 인연이고 간에, 다 저 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회사에서 점심 얼른 먹고 짬을 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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