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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한 자로 진단한 청와빌라 내면풍경

밥통성찰록 - 지선스님의 달마도다.

by 청와

청와빌라 입주자들의 정신상태 진찰 결과를 한자 한 자로 통보한다.


1. 101호 깍쟁이는 진찰결과 탐할 탐(貪) 짜가 나왔다.


탐은 탐욕을 말한다. 탐으로부터 지나칠 과(過) 짜가 나온다. 과는 과욕, 지나침에서 비롯되는 잘못이다.


식탐이 있었다. 처남은 좋아하는 음식만 맛있게 먹는다. 처남은 음식에 대해 까탈스러운 미식가다. 나는 좋아하지 않는 음식만 빼고 다 맛있게 먹는다. 나는 음식 먹는 것을 즐기는 호식가다.


어느 날 문득, 늦둥이 막내딸이 대학에도 가고 시집도 가고 그러려면 얼마나 남았나 보았더니, 아직 10년은 남은 것 같았다. 고개를 숙여 아랫배를 보았더니 이건 청와가 아니라 반백 년 묵은 두꺼비가 앉아 있는 거다.


그날부터 바로 식사량을 반으로 줄였다. 밥도 반, 반찬도 반, 국도 반. 식사조절과 함께 바로 운동도 시작했다. 사실 하루 12시간 가까운 일만으로도 운동량이 부족하지는 않다.


"과장님, 대회 나갈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 운동을 열심히 하세요?"


내가 주차장 에이치빔에 매달려 턱걸이운동을 하는 걸 보고 전 점장이 하는 말이다.


'어느 날 문득'으로부터 7년이 지났다. 몸도 몸이지만, 의지에 관한 문제다. 대회에 나갈 것도 아니다. 팔굽혀펴기 100만 번을 해보겠다고 했으니 해보는 거다. 어제까지 누적 횟수 328,960번이다. 초콜릿 복근을 친견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려면 지금의 야간 음주를 끊어야 한다.


두 번째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씨익^^


2. 102호 범부는 하고자 할 욕(欲) 짜가 나왔다.


욕은 욕망이다. 욕으로부터 뜻 의(意) 짜가 나온다. 의는 의지이다. 욕망이 본능적이라면, 의지는 의식적이다.


어려서 잠과 맞서보았다. 내가 잠수경이라는 별명을 들었던 것은 잠이 많아서라고들 알고 있는데, 잠을 안 자려고 해서 생긴 결과였다. 밤이 좋았다. 밤새 편지를 썼고, 글을 썼고, 생각을 했고, 밤새 당구를 쳤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밤을 새웠다. 그러고 다음날 학과시간에 잠을 잤다.


음식과도 맞서보았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 딱 한 가지이다. 비린 음식이다. 예전에는 고기 같은 것이 비위생적인 유통과정으로 인해 상한 것은 아니지만 비릿한 냄새가 나곤 했다. 지금도 정육이 오래된 고기에서 그런 냄새가 나곤 한다. 나는 그 맛이 싫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아예 고기뿐만 아니라 동물성 음식은 손도 대지 않았다.


만두를 빚어먹을 때 고기를 갈아 넣는다. 나는 그것도 안 먹었다. 어머니께서 그것이 안쓰러웠는지 내가 먹을 만두소를 고기를 안 넣고 따로 빚어 만두를 만들어 손으로 꼬집어 표시를 해주셨다. 불효막심했다. 이제는 먹는 것을 가리지 않게 되었지만, 멸치맛국물의 비린 냄새와 새우젓으로 간을 한 계란찜은 아직도 먹지 않는다. 이건 아내와의 에피소드에서 얘기하련다.


섹스에 관한 얘기는 여기서 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는 자체심의에 걸렸다.

3. 201호 건달은 성낼 진(嗔) 짜가 나왔다.


진은 분노이다. 진으로부터 미울 증(憎) 짜가 나온다. 증은 증오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으면 성인(聖人)이 되는 건가? 내게 너무 많은 미움이 있었다. 그것이 내가 평생을 분노로 살아온 이유이다. 아예 세상 전체를 증오했다.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여겼다.


세상에 대한 감정적 대치로부터 나 자신에 대한 성찰적 자세로 좌회전하게 되기까지, 몸부림치고, 울부짖으면서 그야말로 온몸으로 세상과 전력으로 직진하며 부딪쳤다.


거기에 또 한 가지, '눈엣가시'라는 미움까지 앓아버린 만신창이가 201호 건달의 옛 모습이다. 하~ 한숨만 나온다. 거기에서 일단 나를 건져는 내놨는데, 그 몰골이라니, 처량하고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이건 뭐 견적이 안 나온다. '밥통성찰'을 한다고 하니 두고 보자.


4, 202호 장부는 옳을 의(義) 짜가 나왔다.


의는 의분(義憤)이다. 의로부터 평평할 평(平) 짜가 나온다. 평은 평정, 평천하다. 의분에 떨면, 의족(義足)처럼 의인(義人)이 되는 건가? 아니면 의인(醫人)이 되는 건가?


건달의 증오가 조금 나아진 모습이 의분이다. 좋게 말하면 정의감이고, 있는 대로 말하면, 그 꼴은 못 보겠다는 거다. '불여의(不如意)'라는 말을 깨닫기까지 세상을 뜯어고쳐보겠다고 무모하게 덤벼들었다. 나 자신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것도 불여의였다.


그래서 김광석이 그랬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이제 다시>가 밥통성찰이다.


5. 301호 샌님은 발보일 현(衒) 짜가 나왔다.


현은 뽐내고 자기를 돋보이려는 과시다. 현으로부터 업신여길 멸(蔑) 짜가 나온다. 멸은 깔보고, 얕잡아보는 멸시, 천시다. 안하무인이다.


학은 행이어야 한다. 그것이 선비들의 고집이고 자존심이다. 어디서 무슨 병 깊이 들었나 했더니, 사람 행실을 그르치게 만드는 '먹물'이라는 고질병이다. 태우(太愚)가 대우(大愚)를 어리석다 하는 격이다. 먹물 좀 들었다고 사람들을 얕잡아 보는 건 어디서 배워 먹은 버릇일까? 인간에 대한 예의, 생명에 대한 예의를 배우려면 군자의 길을 배워야 했다.


6. 302호 군자는 어질 인(仁) 짜가 나왔다.


인은 너그러운 인자함이다. 인으로부터 화할 화(和) 짜가 나온다. 화는 화이부동이다. 남들이 내 생각과 같아야 한다고 우기는 동이불화가 내 모습이었다.


치열하게 상대의 개념과 논리를 논파하면서 내 개념과 논리를 관철하려고 했다. 개념과 논리만 가지고라면 내가 옳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와 불화하고 다투는 것은 내 개념과 논리가 옳고 상대의 개념과 논리가 그르기 때문이 아니다.


논리의 옳고 그름을 넘어서 열린 논리가 필요했다. 열림의 첫 번째는 다름을 인정해 준다는 건데, 그게 논리가 아니라 마음의 여유공간이라는 거다. 각박한 거리, 논리와 상대와 나 자신에 너무 밀착해 있는 그 각박한 거리가 문제다. 상대와 나를 내가 볼 수 있는 마음의 거리를 갖는 것이 필요했다.


'그님'과의 만남이라고 했던 그날 이후, 나 자신과의 따스한 거리를 갖게 된 이후, 대상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상대도 뜨겁게 데고 나도 데고 공허한 논리만 술자리에 허공에 가득하던 그 자리에, 비로소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과의 관계에 정답은 없다. 미숙함에서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아름다운 과정이 있을 따름이다.


7. 401호 도사는 꿈 몽(夢) 짜가 나왔다.


몽은 이상세계를 동경하는 몽상이다. 몽으로부터 비롯할 창(創) 짜가 나온다. 창은 창조다.


취생몽사(醉生夢死), 술에 취해 살다 꿈속에서 죽는다는 말이다. 딱 내 모습이다. 허랑한 삶 속에, 이상(理想)스러운 생각만 잔뜩 하다가 한평생 사라질 판이다.


그 이상한 생각의 마지막에 무엇을 가져다 놓을지 많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것도 아니다.'


401호 도사가 가져다 놓은 말이다. 누가 뭐라 하건, 그건 누가 뭐라 한 것일 뿐이다. 딱 저 말의 온도를 재보면 0`C이다. 무게를 재보면 0그램이다. 깊이와 높이, 거리와 가격 모두 0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뜨겁게 싸늘하게 삶을 느낀다. 무겁게, 높게, 넓게, 크게, 위대하게, 거룩하게, 비루하게, 허무하게, 느끼고 느끼고 흐느낀다.


0과 1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0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이고, 느낀다는 것이 1이라는 창조적 발현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주어와 술어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 가져다 놓아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온다. 어떤 결과?


그렇게 여기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거다. 그러면 각자 각자의 생각으로 삶의 문제가 해결이 되면 좋은데 그것도 아니라는 거다. 왜?


관계가 삶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사의 마지막 생각이 맞을지라도 그게 다가 아니다.


8. 402호 성인은 공경할 경(敬) 짜가 나왔다.


경은 늘 깨어있는 성찰이다. 경으로부터 성실할 성(誠) 짜가 나온다. 성은 정성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는데, 치성(致誠)이면 감동, 감천지동귀신(感天地動鬼神, 천지를 감화시키고 귀신을 움직이게)하는 힘이 있다고 한다.


관계를 생각하며 마지막에 가져다 놓을 한 마디로 삼고 있는 말이 '경'이다


401호 도사의 말이 맞다고 해보자. 내 삶의 가치를 저울에 올려놓는 것도 누군가이고, 그걸 90쯤 되는 것으로 평가하는 것도 누군가이고, 내 삶이 다 했을 때에도 나를 계속 저울 위에 올려놓고 평가하는 것도 누군가일 뿐이라는 거다.


나는 저울이 필요하지 않고, 누군가를 저울에 올려놓지도 않는다고 해도, 나는 세상과 관계 맺기를 해야 하고, 세상은 저울질하기를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거다.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판단했다면, 세상과 관계 맺는 동안,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세상과 아름답게 동행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거다.


401호를 저울 위에 올려놓았더니 정말 0이 나오는 거 아닌가?


9.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


梁武帝問達磨大師 양무제문달마대사

양나라의 무제가 달마대사에게 물었다.


"如何是聖諦第一義" 여하시성제제일의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磨云 마운

달마가 대답했다.


"廓然無聖" 확연무성

"텅 비었습니다. 성스럽고 말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10. 쌓인 들판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어지러이 발걸음을 내딛지 마라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뒤에 오는 사람의 길이 되리니


까마귀 발자국 어지러이 남기고 가면서.


(청와빌라에 사는 여덟 명은, 나의 내면에 무한한 가능성으로 거주하는 나의 여러 모습들을 유형화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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