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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어쩌자고 알콜중독자가 되다

한시로 그린 자화상

by 청와

친구와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나온 말입니다.


친구 : 밖에서 여럿이 마셔야 맛있어.

청와 : 나는 맨날 혼술이라도 맛있어.

중독이야.

친구 : 모든 반찬이 안주로 보이면 중독.ㅋ

청와 :

이생진 시인은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으로

고독을 마셨다.


나는


새우깡 한 봉지에

소주 두 병


으로

중독이 되었다.



대화 끝에 술꾼으로 살아온 지난 날을 반추해 봅니다.


1.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건달(꼴통)입니다.


是不肖子息 시불초자식


出初軍暇與友飮 출초군가여우음

轡脫變瞵酒魔瞪 비탈변린주마등

父覓出來未歸我 부멱출래미귀아

雨橋上者非子乎 우교상자비자호


못난 자식, 바로 저예요


첫 휴가 나와 친구와 술을 마신 것 같다

고삐가 풀리고 눈빛이 변하더니 술귀신이 쏘아본다

아버지께서 돌아오지 않는 나를 찾아 나서셨다는데

비 내리는 육교 위에 너부러져 있는 것이 설마 내 아들은 아니겠지?


건달(꼴통)은, 나의 내면과 인간들의 행태를 이해하기 위해, 저의 내면과 인간유형을 범주적으로 설정해 본 것 가운데 한 유형입니다. <제22화>에 그 자세한 내용이 있습니다.


건달은, 원래 술과 고기를 먹지 않으며, 음식의 향기만을 먹고 산다는, 브라만교에서 숭배하는 건달바에서 온 말이랍니다. 그 건달이 어찌해서 '꼴통'과 동급에 놓이게 되었으려나?


그건 술 때문이라는 설을 지어내서 퍼뜨려 보겠습니다.


2. 첫술부터 기억상실


술은 고2가 시작되는 무렵부터 마시게 되었습니다. 친구 어모 군 집 앞에서 깡 소주로 병나발을 불었던 기억이 첫술의 기억입니다. 첫술부터 일명 ‘필름’이 끊기는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필름은 끊겼다 이어졌다 하기도 하는데, 끊어진 부분은 술이 깨어서도 전혀 그 기억을 복원할 수가 없습니다. 필름이 끊기면 그때부터 술버릇이라고 하는 것이 기어 나옵니다.


아내도 그러고 후배들도 그럽니다. 제게서 어떤 술버릇이 나올 때는 눈빛부터 돌변한다고. 그때부터는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때부터는 다른 사람, 아니 술귀신이 된다는 겁니다. 그때부터 저는 제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때부터의 술귀신 또한 다른 저일 터인데, 저는 도대체 뭐하는 놈일까요?


그 수많은 박술경(잠수경 이후 새로 붙은 별명)에 관한 얘기를 하자면 그것만으로 대하소설이 될 겁니다. 그 가운데 두 꼭지만 가져와 봅니다.


3. 정녕 저 물건이 너였더냐?


아내는 제게 ‘그러니 공부는 언제 했겠어’라고 했습니다. <제4화>에서 잠과 당구 이야기를 할 때 그 얘기를 했습니다. 대학에 가야겠다는, 그 후에 이리저리 하겠다는 계획도 목표도 꿈도 희망도 없이, 그래도 2학년 때까지의 공부가 남아있었는지 대에 합격은 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세상에 대한 제 안의 막연한 불만과 분노가 정의롭지 못한 세상, 부정부패가 가득한 세상,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불만과 분노였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학과 수업은 건성으로 들으면서, 윤모 군, 홍모 군, 최모 군, 이모 군 등과 어울렸습니다. 학내 시위는 윤모 군이 주동자였고 저는 열성 참가자에 불과했습니다. 술자리는 제가 주동자였고 윤모 군이 열성 참가자였습니다. 대학교 1, 2학년은 그야말로 술에 절어 살던 때였습니다.


도저히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지요. 휴학을 하고 바로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도피처로 택한 군입대가 순탄했을 리 없습니다. 포병과에 배속이 되었어요. 포신에 포탄을 넣고 닫아버리는 폐쇄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한 폐쇄기가 철커덕하면서 미끄러져 포신구멍을을 때 거기에 걸리면 그게 뭐든 잘려나가 버립니다.


자대배치를 받고 얼마 되지 않아서, 그 포신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폐쇄기를 닫아버렸습니다. 폐쇄기를 닫는 오른손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적거렸고, 왼손가락은 그 사이 동물적 본능으로 포신구멍을 탈출했나 봅니다. 손톱이 떨어져 나가며 손가락은 구사일생, 몇 바늘 꿰매는 것으로 사고는 일단락되었지만, 저는 선임들로부터 기합을 무지막지하게 받았습니다. 그 후로 저는 고문관이 되었지요.


그냥 들이받고 싶은 것을, 군대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다가 첫 휴가를 나왔으니 오죽했겠나 싶어요. 국운회의 친구 김모 군과 광화문에서 만나 술을 마신 모양입니다. ‘술을 마셨다’가 아니라, ‘마신 모양이다’라고 해야 할 정도로 정신적, 육체적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 놓였던 겁니다. 나중에 김모 군과 아버지의 얘기를 통해서야 ‘내가 그랬었나 보다’ 하게 되었습니다.


눈빛이 돌변했나 봅니다. 제가 팔꿈치로 폭행을 해서 지금도 김모 군의 눈알 흰자위에 노란 자국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일부러 그랬겠어요? 말리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거였겠지요. 제가 그 넓은 광화문 대로에 뛰어들어 나자빠졌다는 겁니다. 김모 군이 저를 끌어내서 택시를 태워 그때 돈 만육천 원을 쥐어주고 택시에 태워 보냈다는 겁니다. 이건 김모 군이 간직하고 있는 제 끊어진 필름의 한 부분입니다.


김모 군의 전화를 받으시고 제가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와 작은 누이가 저를 찾아 나서셨다는 겁니다. 지금은 없어진, 개봉고가도로 앞 육교 위에, 비를 흠뻑 맞으며 너부러져 있는 것이 설마 내 아들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셨다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녕 그 물건이 바로 저였다는 니다.


그래, 그게 바로 저란 놈입니다.


4. 파란만장 너머 또 뭐가 있기에?


제 끊어진 필름들을 간직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 저란 놈이 어떤 짓들을 하고 돌아다녔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어젯밤에 사라져 버린 그 저란 놈에 대해, 함께 술을 마셨던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서 넌지시 물어볼까? 좋은 소식을 들을 리가 만무하니 선배나 후배들이 ‘그놈이 이랬다’더라 할 때까지 기다려볼까? 그런 식이었습니다.


크고 작은 사고야 조금 있었겠지만, 뉴스에 나올 만한 사건을 일으키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겼었는데, 아뿔싸 그것마저도 넘어버렸으니, 어찌합니까?


5. 도대체 넌 누구냐?


汝孰乎 여숙호


其日憶斷三杯酒 기일억단삼배주

通鐵窓隙㑏見母 통철창극저현모

於破車窓毁映像 어파차창훼영상

接酒神後汝孰乎 접주신후여숙호


너는 누구냐


그날따라 소주 석 잔에 필름은 끊기고

쇠창살 밖으로 우두커니 어머니를 뵙네

깨진 버스 유리창에 일그러진 얼굴을 한

주신을 접한 뒤의 너는 대체 누구냐?


복학을 해서 4학년 때의 일입니다. 3학년 때부터 혼자 마음속에 두었던 김모 양 때문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김모 양 사는 곳이 고양이라서 김모 양 별명은 '나비'입니다.


여기서는 술과 관련된 이야기가 중심이고, 나비 이야기는 <제10화>에서 하렵니다. 못난 놈이 또 한 여인을 마음에 두었으니 하는 짓이 가관이었겠습니다. 속에 있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그 여인의 주위를 맴돌기만 합니다.


주위에서도 그런 저를 보기에 답답했던 모양입니다. 그날은 사학과 배모 과 저, 학과 선배 그렇게 셋이 술을 마셨습니다. 배모 양은 나비와 친한 사이였고, 학과 선배는 제가 유일하게 형이라 부르는 절친이었습니다. 형과 관련된 이야기는 <제7화>에서 하렵니다. 어찌 되었거나 그날 북문에서 셋이 술을 마셨는데, 그날따라 정말 소주 석 잔에 필름이 끊긴 겁니다.


나비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배모 양이 집에 간다고 버스를 탔던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지 말라고 버스를 막았고, 버스 기사가 그냥 출발을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하루에 세 번 살(煞)이 내린다고 했던가요? 정말 살이 내렸던가 봅니다.


눈앞에 철창이 보이고, 철창 너머에 어머니께서 서 계셨습니다.


버스를 멈추라고 주먹으로 버스 앞 유리창을 세게 쳤던가 봅니다. 버스 유리창이 좌악하고 깨지고, 버스 기사가 저를 태우고 파출소로 갔던가 봅니다. 파출소에서 를 바로 경찰서로 이송하고, 형이 어머니께 연락을 드렸던가 봅니다. 어머니께서 합의금을 가지고 황급히 오셨던 겁니다. 이 사건은 형이 여러 모로 돌봐 주고 도와주어서 검찰에서 기소유예로 종결되었습니다.


깨진 유리창에

술에서 미처 깨지 못한

일그러진 얼굴을 한 그놈이

이제껏 거기에 우두커니 서있습니다.


거기 그러고 있는 너는 대체 누구냐?


제가 술을 마시고 취한 다음 날, 아내가 제 손을 붙들고 한 말이 있다.


"술에 먹히고 난 뒤의 당신은 박수경이 아니야. 완전 허깨비야."


아내가 저보고 허깨비라고 한 것, 그것이 꼴통입니다. 지금은 허깨비 꼴통 박술경에서 순둥이 박수경으로 얼마나 돌아와 있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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