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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 Feb 27. 2023

둘째는 좀 다를까?

1. 출산준비_ 용품을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

1월이 돼서야 휴직에 들어간 나는 마음이 분주해졌다. 2월 중순쯤으로 예정된 둘째 출산까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조차 정리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휴직 첫날, 여유롭게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식탁에 앉아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적어 내려 가기 시작했다. 첫째 때는 아마 블로그를 뒤적거리며 수십 가지의 용품 리스트를 적어 내려 갔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둘째 준비는 조금 달랐다.  


기껏 세운 계획이 정리방법 구상이라니. 적어놓고도 어이가 없었던 ㅋㅋ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육아를 하며 매일같이 나를 괴롭게 한 것은 '너저분함'이었다.


아이가 크면서 어지르는 것은 장난감과 책뿐이고 소독해서 바구니에 집어넣으면 그만이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 외의 것들이었다. 대충 걸거나 서랍장에 처박아 놓는 옷들, 분류랄 것 없이 한 데 모아진 자질구레한 용품들, 정리안 된 냉장고, 온갖 물품이 널브러져 있는 주방 아일랜드, 화장실의 물때가 낀 세면대나 붉은 곰팡이가 강박적인 나를 돌아버리게 했다.


※ 강박이 있다고 해서 정리를 잘하거나 완벽하게 일처리를 하는 건 아니다. 그냥 그게 안되어 있는 상황에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을 뿐


결혼 8년 차에도 여전히 살림이 엉망인 핑계를 대자면, 스물여덟 한창 일하고 놀던 시기에 결혼을 해서 소꿉장난하듯 살다가 퇴사하고 살림이 손에 익을 시간도 없이 첫 아이를 낳아 키웠다. 그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자마자 다시 일을 시작해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살림을 정비할 여유가 도통 없었다.


여튼 그 너저분함에 대한 스트레스는 왜인지 육아스트레스로 오인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육아스트레스가 아니라 살림스트레스인데 말이다. 아이는 부모에게 사랑과 행복만 주었는데, 돌아보면 그렇게 아름다운 시절이 없었는데, 그 시절을 부부가 다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많이 남았다. 그런 나에게 한번 더 아이의 사랑과 행복을 받을 시절이 주어졌고 이번에는 그 시절을 100% 누리고 말겠다는 내적 동기가 폭발했다.  


내적인 동기가 폭발할 때 영화의 주인공이 자신조차 모르고 있던 초능력을 발휘하며 슈퍼히어로로 변신하듯 P인 나도 때때로 J로 변신한다. 남편이 이직을 고민할 때 그러했고, 첫 집을 매매할 때도 그러했다. (실제로 모든 준비를 마친 뒤 간이 MBTI를 해보니 INTJ가 나왔다.)


그런 이유로 둘째 출산준비는 아이용품이 아닌 살림 시스템의 마련이 주를 이루게 된 것이다. 남편이 나중에 보더니 기가 막힌 이름을 지어주었다. '지속가능한 살림'. 정리라기보다는 살림 시스템의 구축이었다. 모두가 납득/유추 가능한 물건의 제자리를 찾아주고, 모두가  지킬 수 있는 정리의 규칙을 정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유튜브로 공부한 옷장정리 방법


블로그가 아닌 브런치이고 이미 있는 전문가들의 콘텐츠를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따로 정리방법을 적지는 않으려 한다. 그런데 핵심은 간단하다. 안 쓰는 것을 과감하게 비워내고(안 입는 옷이 정말 많았다), 나머지 물건의 제자리를 가족의 생활패턴에 맞게 정해주는 게 다였다.


첫째 교구 다 끄집어내어 정리하던 날. 이틀 걸렸다.

한 달을 부지런히 고, 생각하고, 정리한 결과, 집 대부분 공간이 어질러지지 않고 별다른 노력 없이도 쉽게 정리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편이 빌런이긴 하다. (옷장에 자꾸 뭘 처박는다.)


용도를 단순화 했더니 어지르기도 쉽지가 않다. 책보고 공부 하는 공간.
유튜브 슨생님들이 가르쳐준 규칙대로 정리한 아이 옷장
화장실 청소는 큰 마음먹고 하는 게 아니라 늘 할 수 있어야 한다. 청소도구가 젠다이에 널부러진 것에도 나는 스트레스를 받더라.
비싼 선반 필요없이 있는 서랍장이랑 3만원대 철제선반으로 창고 정리 완료. 물건 처박을 마음이 안 생기게 해야한다.

육아를 처음 하게 될 때는 그 방법론과 용품점을 맞추게 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돌보는지 알아두고 물건을 사두는 것 물론 필요하다. 그렇지만 아이를 돌보는 방법은 알아둔다 한들 막상 첫 아이를 마주하면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고, 대부분의 물품은 아이가 태어난 뒤 필요를 깨달았을 때 주문한다 해도 다음날이면 집 앞에 도착하는 요즘이다.


복하고 안전한 육아를 하기 위해서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 운신이 비교적 자유로울 때, 효율적으로 운영 가능한 집안 환경을 마련해 두는 것이 더 나은 준비인 듯싶다. (물론, 집이 어질러지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스타일이라면 필요하지 않다.)


문제는 나 또한 그러했듯이 대부분의 요즘 엄마들은 집에 머무르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 일을 하다가 아이가 태어나면서 집에 머무르게 되고, 그제야 부모님 집이 아닌 내가 꾸려나가는 '집'에 대한 가치관이 생기기 시작한다.


거의 24시간 집에 머무르며 일종의 관리자 역할을 하는 동안 물리적 또는 심적 불편함들과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집이 어떤 집인지 결국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기관에 가기 전까지는 을 정비할 여유도, 체력도 도통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매일같이 엉망인 집에서 가까스로 생존하며 스트레스를 받게 될 것이다.


괜찮다. 원래 첫째 아이를 키울 때는 모든 게 엉망진창이다.


기억해 줬으면 좋겠는 것은, 집안이 너저분한 것은 절대 아이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루종일 아이와 씨름하는 통에 시간이 나지 않는 탓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살림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신혼 시절 보기 좋은 살림만 했지 실제 가사를 위한 살림은 한 적이 없었던 탓이다.


지금 느끼는 불편함들을 기억하고 있다가 언젠가 시간이 나고 체력이 되고 여유가 있는 날에 기갈나는 시스템을 만들면 된다. 그리고 그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오니 조급할 필요도 없다.


나와 모든 엄마들이 스트레스로 한숨 쉬기보다는 아이가 주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만끽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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