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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 Jun 20. 2020

'부모도 사람이다'라는 말의 위험성

불안한 환대

이 책에 담긴 글들을 쓰게 된 것은 이 시대 부모들에게 넘치는 위로의 말들을 조금 걷어내고 싶은, 이상해 보일 수 있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위로의 말들은 기본적으로 '부모된 삶'과 '육아'의 가치를 저해하고, 부모 스스로를 피해자의 자리에 놓게끔 한다.


내가 아이를 낳던 2018년에는 육아의 방법론을 담은 책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서점에는 '엄마가 되어도 나 자신을 지키라'는 메시지를 담은 심리와 관련한 책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엄마도 사람이다"라는 위로가 성행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사실 그 위로는 엄마가 사람으로서 느낄 수 있는 아이에 대한 분노나 출산에 대한 후회 등 감정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한 위로였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양육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죄책감에 대한 위로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부모, 특히 엄마가 된 여성의 권익에 대한 목소리가 급속도로 높아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불가피한 사정이 아님에도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졌고, 부모의 개인적인 삶의 질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채 끌려온 세상에서 이리 저리 맡겨지는 짐짝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게 '엄마도 사람이다'라는 말의 유행이 아이들에게 가한 '위험'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의 삶의 질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낳아놓은 아이들이 독립할 수 있도록 그 바탕을 가꾸어 주는 일이다. 그것은 결코 '희생'이 아니라 '책임'의 영역이다. 아이들은 결코 혼자 클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는 살아남기 위한 몇 가지 반사작용만 가지고 태어난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백지상태의 뇌, 출렁일 준비가 되어있는 정서만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을 채우는 것이 사회의 몫일까, 부모의 몫일까? 아이의 양육을 누가 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그 뇌와 정서의 바탕을 어떤 것으로 채울 지에 대한 결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대략적으로 세 돌 이전 아이들이 왜 정서적으로 안정된 부모의 손으로 키워져야 좋은 지는 그렇게 키워 본 부모들만이 느낄 수 있다. 아이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반복이 필요하다. 생각보다 훨씬 긴 기간 동안, 경험 상 몇 백번 이상 같은 말을 해줘야 제 것으로 받아들인다. '지식'에 국한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무너지는 순간에 나를 지탱해주는 바닥같은 '정서'라던가 다른 사람과 살아가는 사회에서 서로 지켜야 할 '선'같은 가치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가 어떤 모습이어도 변치 않아.'를 가르치기 위해 아이가 하루 종일 수도 없는 실수를 반복 할 때마다, 서투른 모습을 보일 때마다 따뜻한 표정으로 "그래도 우리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어야 했다. '감정에는 틀린 것이 없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아이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에 "너는 그렇게 느꼈구나. 그렇게 느낄 수 있지."라는 공감의 말을 매번 건네주어야 했다. 아이는 하루에 수도 없는 실수를 반복하고, 하루에 수도 없는 감정을 느낀다. 


그 하루의 수도 없는 순간,
아이에 대한 진심을 담아 그런 말들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아이가 필요로 하는 사랑과 정성이 얼마나 큰 지 느껴보았고, 그 필요가 어디까지 나에 의해 충족될 수 있는 지, 충족됐을 때 아이가 어떻게 성장하는 지를 지켜보았기 때문에 아이가 세상과 관계를 처음 맺는 영아기에는 오랜 시간 일관성있고 밀도있는 전적인 육아가 필요하다고 감히 설득하고 싶다.


일을 하다가 양육을 하게 될 부모들의 고민도 안다. 일을 내려 놓았을 때 내가 여태까지 지향해 온 나다움이 사라지거나, 여태까지의 살아온 나의 인생이 아무것도 아닌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은 매우 크다. 하지만 일을 내려놓고 육아를 한다고 해서 나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생이라는 기찻길 위에서 결혼과 출산이라는 분기점을 만났고 몇 갈래의 길 중에 어떤 길이 나에게 더 가치 있는 지 판단해 나답게 선택할 순간이 온 것 뿐이다. 양손에 두 떡을 쥐고 살 수는 없다. 겪어보고 말하건데 일과 아이는 양 손의 떡 같은 관계이다. 둘 다 엄청난 나의 애정과 수고를 필요로 한다. 둘 다 동시에 잘 할 수는 없다.


나는 본능에 이끌려 아이를 낳기 전 세워놨던 개인의 계획들은 잠시 미뤄두고 육아에 비중을 더 둔 삶을 살게 됐다. 나중에는 그런 삶을 조금 더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그 과정에서 나를 괴롭게 했던 것들은 사실 '부모도 사람이다' 같은 세상의 말들이었던 것 같다. '결혼과 출산은 여자의 무덤'이라던가, '아이를 낳으면 나를 잃는 느낌이다.' 같은 류의 말들은 아이를 키우는 축복을 느낄 새도 없이 부모를 불안함과 조급함으로 밀어넣는다.


그런 말들을 걷어내고 온전한 나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부모된 삶의 속성과 그 새로운 삶에서 느끼게 되는 혼란의 감정들, 그 감정들을 정리해나가는 생각의 흐름을 담았다. 그리고 아이에 대하여 느끼는 경이로운 감정들 또한 너무 소중하다는 흔한 말보다는 조금 더 나의 언어로 담아보았다.


나는 이미 부모가 된 이들이 죄책감에 찌들어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다만, 앞으로 부모가 될 세대들에게 '부모가 된 삶'과 '육아의 가치'에 대한 또다른 시선을 하나 제시하고 싶을 뿐이다. 그들이 선택하는 데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육아에서 가장 피동적이고 유약한 존재는 부모가 아니라 갓 태어난 아이들이다.

그것을 늘 기억하는 부모가 되길 바라며,





그들은 나를 환대주었다.


언제나 내 공간은 쾌적하게 정돈되어 있었 허기가 진다 싶으면 루에 몇 번이고 밥상을 차려내왔다. 심심할 틈이 없도록 항상 노래를 불러주고 조잘조잘 떠들며 미로운 것들을 보여주곤했다.그들이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굉장히 환대받고 있고 그들이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것 외에 내가 느끼는 것은... 혼란, 낯설음, 불안. 그 셋 뿐이었다.


여기에 언제, 왜, 어떻게 오게 된 것인지 하나도 기억나는 것은 없었지만 그 불안을 떨쳐볼 수 있는 것은 한결같이 진실되고 친절 보이는 저들 덕분이었다. 그들의 웃음은 따뜻했고 거짓이 없어보였다. 나의 불안한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내가 깨어있는 동안은 내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고, 우울한 기색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 등을 쓸어주었다.


어느날 밤 난생 처음 겪어보는 통증이 몰려왔다. 온 몸이 두드려 맞은듯 아팠다. 하는 수 없이 난 그들을 깨워야 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나의 아픈 표정과 몸짓을 보고 맞는 약을 주었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그렇게 아팠다. 아픈 이유를 모르겠으니 죽을 병에 걸린 것은 아닐지 무섭고 불안하다.


그런데 앓은 지 나흘째가 되자 그들의 얼굴에 귀찮은 내색이 비치는 듯 하다. 아무 말 없이 피곤한 얼굴로 약만 주고 다시 들어가버렸다. 새벽마다 깨는 일이 그다지 유쾌하진 않을터였다. 그 다음날도 그들은 퉁명스럽게 약을 건넸다. 이번엔 내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매우 신경질이 나있다는 것 뿐이었다. 다음 날 나는 잠들기 전 나에게 약을 미리 주면 아플 때 알아서 먹겠노라 말했지만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도 나처럼 답답하겠지.


불안해졌다.

난 아직도 이 곳이 어디이고 내가 왜 여기 있으며,
내가 누구인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데
저들이 나를 귀찮아하고 답답해하다가 싫어하게 되면,
나는 어디로 가서 무얼 해야하는 걸까?


통증보다 두려운 것은 이 낯선 곳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두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었다. 매일 밤 나는 그들에게 내쳐질까 두렵고 불안한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그들을 깨운다. 그들이 걱정스러운 눈빛과 다정한 말을 건넬지 아니면 귀찮은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약만 건넬 지 항상 초조한 마음으로 침실 문을 두드린다.


낮 동안 그들은 마치 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친절하고 따뜻하다. 하지만 나는 불안하다. 그들이 나를 항상 무조건적으로 좋아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의심까지 든다. 여태 날 좋아하는 척만 했던 건 아닐까?


그런데 애초에 이 수상한 곳엔 누가, 왜 나를 데려온걸까?



20xx년 7월 우리 아기 80일 일기

노래를 불러주면 배냇짓을 하고 촛점책을 보여주면  꽤나 집중해서 보는 것이 너무 사랑스럽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기분에 벅차오른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낮동안엔 순둥순둥한데 밤은 조금 힘들다. 밤수도 힘든데 요새 원더윅스 때문인지 배가 고픈 것도 아니면서 찡찡댄다. 잠을 못 자는 게 너무 힘들다.

어젯밤엔 나도 모르게 "나더러 어쩌라고~ 제발 좀 자라고!" 신경질을 내버렸다.


미안해 아가야. 그치만 엄마도 사람이니깐 어쩔 수 없었어. 이해해줄거지?


'부모도 사람이다'라는 말은 한참 틀렸다. 당신이 그 가벼운 핑계 하나로 책임을 회피하고 위로받으려 할 때 아이는 영문도 모른채 끌려온 이 세상에서 불안함과 두려움에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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