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봄날의 기록
산불이 지나간 산에 올랐다.
그날의 산불은 막 새싹이 돋고, 봄꽃이 만발하던
찬란한 봄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개미마을에서 출발해 인왕산을 오르는 등산로,
시커멓게 그을려 잔해만 남은 나무들은
유난히 파랗고 화창한 하늘과 대비되어
죽음처럼 검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
오래전 어느 봄, 엄마와 가까운 서울 근교에 나물을 캐러 갔었다.
봄이 오는 길목이기는 했지만,
앙상하고 황량한 시골 들판에는 여전히 찬바람만 가득했고
땅은 단단히 얼어붙어 생명의 기운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병으로 작아진 몸을 웅크려
먼지바람이 이는 메마른 땅에서
끝도 없이 나물을 캤다.
엄마의 시선은 땅으로 땅으로 한껏 낮아졌다.
달래, 냉이, 머위순, 다래순, 쑥, 원추리...
서서는 보이지 않던 생명들이
몸을 낮추어 보니 온 땅에 지천이었다.
꽁꽁 언 땅보다 더 단단하고 힘이 센 것은
그 땅을 뚫고 솟아나는 여리디 여린 것들이었다.
엄마는 병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생기 가득한 소녀의 표정으로
작고 여린 새봄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봄을
마중하고 있었다.
그 봄은 내가 본 이전의 어떤 봄보다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했고
그 어떤 봄보다도 눈물겨웠다.
그 해 여름, 엄마를 잃고도
아무 일 없는 듯 몇 번의 봄이 오고 또 지나갔다.
받아들일 수 있던 일도, 받아들일 수 없던 일도
그저 지나갈 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어떤 일이라도 받아들이지 못할 게 있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날 일은 어김없이 일어났다.
그 계절에 엄마가 보내준 나물이며 바지락을
손질하고 데쳐 냉동실 깊숙이 넣어두었다가
가을이 오기까지, 오래도록 밥상에 올렸다.
엄마는 돌아가신 뒤에도 그렇게 한참 동안 나를 먹였다.
엄마가 없어도 나는 어김없이
먹고, 자고, 일하고 또 울고, 웃었다.
어김없는 것들이 내 삶을 이끌었다.
시간이 한참 흘러,
엄마를 잃은 상실감이 조금 무뎌질 때쯤
어떤 일이 어김없이 일어난다는 것은
얼핏 보면 가혹한 일이지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꽤나 안심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확실한 현실이나 알 수 없는 내일은
매 순간 우리를 불안과 걱정으로 몰아넣지만
어김없이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내가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은-
그저 내버려 두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거니까.
난 내가 마주한 이 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살면 될 뿐이라는 생각.
......
시커멓게 그을린 채 등산로에 늘어선 나무들의 밑동에는
소나무와 잣나무 맹아들이 빽빽이 돋아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불 앞에서 절망하고 슬퍼하며 낙담했고
그리하여 한 발도 나아가지 못했지만
자연은 담담히 제 일을 했다.
비바람에 꺾여도, 화마에 휩쓸려도
땅 속 깊숙이 씨앗을 묻어두었고
물관 아래로 꽃눈을 감추었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연은 주저앉는 법 없이 자기 길을 간다.
어김없이 봄이 왔다.
다시 생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