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이 된 그해 여름은 유난히 견디기 힘들었다.
상록실이 아닌 교실에서 야자를 마치고 학교 언덕을 내려오는 순간까지 견디기 힘든 일은 많았지만,
무엇보다 버거웠던 것은 특반에서 밀려난 나 자신이었다.
“효진아! 나 여름방학 때 학교에 안 나올 것 같다.”
도망치듯 하교하던 나를 친구 현정이가 붙잡고 말했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보자, 현정이는 경기도의 기숙학원 고3 특강 캠프에 간다고 했다.
순간, 신문 전면광고에 실려 있던 청평 기숙학원 고3 캠프가 떠올랐다. 늘 PMP에 담아 보던 인강 강사들이 청평까지 와서 수업을 한다는 광고.
‘거길 직접 가는 건 무리겠지…’ 하며 덮어두었던 광고였다.
“어… 어어, 그래. 알겠어. 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얘기해!”
“뭐? 기숙학원? …아이고… 효진아… 효진아….”
집에 도착하자마자 폐지함을 뒤져 구겨진 신문 전면광고를 겨우 찾아냈다. 그리고 그 신문을 엄마 앞에 펼쳐 보였다.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내 이름만 연신 불렀다.
그 목소리는 엄마가 나를 말릴 때 쓰는 것이었다.
엄마는 항상 아침마다 동생과 나를 학교 언덕 앞에 내려주곤 했다. 독서실에서 새벽 한 시가 넘어 돌아오는 딸의 아침잠이 엄마의 분주한 아침보다 더 먼저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3년 동안 아침에 버스를 탄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런 엄마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공부를 핑계로 엄마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짜증만 늘어 가는 딸에게
당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라는 것도 ,
나는 알고 있었다.
청평은 멀고도 멀었다.
언제 우리가 청평까지 가보겠냐며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동생까지 모두 엄마 차에 올라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청평의 한 기숙학원이었다.
금방 지은 티가 나는 강당 같은 곳에서 입소식을 했다.
“자! 고3들은 여기로 줄 서세요.”
입소식이 끝나고 처음 보는 얼굴의 동갑내기들이
서로를 훔쳐보듯 쭈뼛쭈뼛 일렬로 섰다.
“효진이^^ 파이팅! 힘내!”
어디론가 끌려가듯 줄지어 가는 길,
학부모들 사이에서 얼굴을 빼꼼히 내민 아빠가 나를 불렀다.
엄마와 아빠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벗어났다.
고3 반에는 대부분 서울내기들이었다.
부산에서 온 남학생 둘이 있었지만,
대구에서 온 학생은 나밖에 없었다.
기숙학원에서 나는 남자아이들에게 “대구”라고 불렸다.
사투리를 쓰는 내가 신기하면서도 서울 깍쟁이들보다 더 깍쟁이 같은 나에게 붙여진 별명이었다.
수능 100일을 앞둔 날,
학원에서는 석식을 근사한 뷔페로 차려준다며
캠프에 온 고1부터 고3까지 모두 강당으로 불렀다.
“어? 대구? 대구 어딨어? 대구! 야, 대구!”
먼발치에서 남자아이들끼리 소란스럽더니
나를 발견하곤 이리로 오라며 손짓했다.
“뭔데?”
이번에도 서울 애들이 어떤 시덥잖은 농담을 할지 궁금했다. 서울 애들의 농담은 유난히 유치해서 나는 종종 실소를 터뜨리곤 했다.
“야야! 야 대구! 제주가 너 좋아한대!!! 악!!! 너 예쁘대!!”
기숙학원에는 ‘제주’라고 불리는 고2 남학생도 있었다.
물론 제주도에서 왔기 때문이었다.
아침마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면 건너편 테이블에서 늘 제주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뭘 보냐’는 눈빛을 보내면
그제야 제주는 식판에 고개를 묻고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어느 날, 친해진 고3 여자아이들과
교무실 원형 테이블에서 자습을 하던 저녁이었다.
교무실 문이 열리고 귀퉁이가 너덜너덜한 초록색 정석 책을 든 그 아이가 들어왔다.
찾는 선생님이 없는지 쭈뼛대다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야! 너 어디 가? 모르는 거 있으면 얘한테 물어!”
고3 반에서 친해진 주희가 제주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그리고 나를 가리켰다.
제주는 쭈뼛거리며 정석 책을 내게 들이밀고 질문할 자세를 잡았다.
“뭐야? 꺼져.”
사실 나는 수학을 몰라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욕이었다.
나는 곧 미안하고 민망해 어색하게 웃었지만
제주는 얼굴을 붉힌 채 교무실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강당에 모인 그 날,
고3 형들 사이에 둘러싸여 앉아 있는 제주가 눈에 들어왔다.
“어? 야! 너 나 좋아해? 어? 어?”
나는 그 난리통에 흥을 맞추듯
제주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장난을 보탰다.
“…저 잠시만요.”
제주는 고3 형들 사이를 비집고 나가
다시 사라져 버렸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남학생들끼리 기숙학원 여학생 중 누가 제일 예쁜지 이야기하던 중,
유일하게 이름을 말한 남학생이 제주였고
그 대상이 나였다는 것.
그 날 저녁은 그렇게 소란스럽게 지나갔다.
점심을 먹고 수업을 듣던 어느 오후,
남자아이들이 갑자기 창문을 보며 웅성거렸다.
나도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포카리스웨트 캔과 편지가 창틀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두고 도망치는 학생이 보였다.
누군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고2가 쉬는 시간이면 고3은 수업 중이었으니까.
제주였다.
편지는 내게 전해졌다.
그날 나는 제주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제주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라는 문장 아래,
그는 정자로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적어두었다.
뚝딱거리는 행동과 달리
그 아이의 뒷모습은 이상하게도 어른의 윤곽을 지녔었다.
그 아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늘 그윽한 잔향이 남아 있었다.
고3 남자아이들은
그 아이가 어떤 향수를 쓰는 것 같다고 귀띔해 주었다.
이름이 생소해 다시 묻고 싶었지만
나만 모르는 브랜드인 것 같아
아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잔향은 그날 받은 편지에도 묻어 있었다.
열아홉 인생, 첫 러브레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