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사가 문을 열자 나의 시선은 희끗하고 머리숱이 없는 한 노인의 정수리에 가 닿았다. 그 순간 나의 숨결도 헙. 가느다란 소리를 내며 멎었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침상에 누워 가족들과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는 그분. 나의 시아버지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결혼을 약속하던 달콤한 순간에 불쑥 남자 친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기야. 우리 결혼하면 부모님께 생활비를 이 정도는 드려야 할 것 같아."
쿵. 월급의 절반이다. 쉬이 그러자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우리는 거의 헤어졌다. 현실의 벽을 느꼈는지 내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병명은 신부전증이다. 그가 군대 있을 때부터 쭉, 일주일에 3번, 이틀에 한 번씩은 투석을 받고 계셨다. 그는 내가 그 나이에 느껴보지 못했던 것들을 더 많이 경험해온 사람이다. 아버지가 쓰러진 때부터 그 집의 가장이었고, 아버지의 죽음도 일찍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가족들은, 심지어 아버지와 같이 있을 때조차, 죽음을 가정한 농담으로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는 듯 함께 웃곤 했다.
어디선가 봤던 집주소를 겨우 기억해내고는 남편이 살던 빌라를 찾아갔다. 내 마음은 그래도 변함없다는 생각을 전하려 했다. 어! 분명 이 주소가 맞는데. 눈을 다시 뜨고 봐도 그 호수는 빌라 입구에서 아래로 내려간 반지층 번호였다.
쿵. 두 번째 벽에 강하게 부딪힌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두방망질 치는 마음을 다잡으며 발길을 돌려야 할지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슬리퍼를 신고 그 빌라 앞을 뒷짐 진채 이리저리 배회하는 한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내가 누군가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 할아버지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한참이 지나도 우리 둘은 자리를 뜨지 못하고 서로를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갑작스레 상견례를 하게 됐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시어머님까지 합류하셔서 근처 치킨집에서 남자친구의 부모님께 어색하게 처음 인사를 드렸다.
남편을 만나 결혼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다. 하지만 시아버지가 가장으로서 가족들에게, 정확히는 장남인 내 남자친구에게 주었을 생활의 무게를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결혼하고 나서도 쭉, 난 시아버지를 미워했다. 결혼 후에도 아버지와 가족들의 생활을 여전히 어깨에 짊어지고 사는 아들의 모습이 남편에게 보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시부모님을 보면서 자식이 일찍이 부모의 우산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때 난 이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생산성으로 인간의 가치를 매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모를 자식이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중에-
시아버지는 가족들이 가장 행복한 방식으로 돈을 썼다. 쓰는 돈의 가치는 생산성에 비례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시아버지는 돈 때문에 한없이 불행했어야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우리 시아버지는 돈을 현명하게 쓸 줄 아시는 분이다.
곧 12살이 되는 첫째 딸은 아직도 배스킨라빈스에 가면 할아버지가 생각난다고 했다. 무려 6년 전이다. 아이가 5살 때 할아버지는 어린 손녀딸이 어린이집을 마치면 내가 퇴근하고 오기 전까지 매일 같이 손주를 데리고 아이스크림 전문점에 데리고 가셨다. 가서 항상 가장 큰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다. 감기 걸린다고, 너무 많으면 먹고 남기니까 안된다는 온갖 조건을 다는 엄마는 못하는 일. 아이한테는 할아버지만 해줄 수 있는 선물로 오랫동안 기억되었던 모양이다. 해외여행을 갈 때는 가서 입으라며 가족 티를 맞추어 선물하셨고, 명절엔 항상 설빔을 해 입히셨다. 생일엔 가장 좋은 등급의 한우를 사 오셔서 미역국을 손수 끓어주셨다. 어린이날에는 온라인 주문 대신 꼭 장난감 가게에 직접 가서 선물을 해주셨다.
내가 둘째 출산 후 손바닥에 아토피 피부염이 심해져 손을 전혀 쓸 수 없어 육아를 못할 정도가 되었을 때도 그랬다. 이상하게 장어를 먹고 나면 증상이 호전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으셨나 보다. 그 이후 아버님은 늘 "우리 아가" 하시며 장어를 사주셨다. 계산서를 생각하며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건 나뿐이었다. 아이, 아버님. 제가 낼게요. 해도 오늘은 내가 우리 며느리 사줘야지. 하며 지갑을 턱 꺼내드셨다. 그 모습은 항상 내게 부잣집 며느리 못지않은 넉넉함을 느끼게 했다. 그렇게 아버님은 본인의 방식대로 며느리를 아끼는 마음을 부족함 없이 표현하셨다. 이렇게 시아버지는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만족감과 풍족함을 느끼는 방식으로 가족들에게 매 순간의 추억을 선물하셨다.
"자기야, 우리 이번에 새해 일출 보고 오는 길에 아버님 뵙고 오자."
남편은 종종 혼자 아버지에게 다녀온다. 우리 다섯 식구 모두 데리고 가기 어려울 것 같으면 혼자 쉬이 갔다 오는 것이다. 이번엔 오랜만에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본다.
항상 받는 게 당연했던 부모의 이상적 관념에 큰 틀을 깨트려 날 힘들게도, 성장하게도 해준.. 제2의 부모님.
벌써 3년 가까이 되어간다. 왜인지 요즘따라 부쩍 생각이 난다. 그때의 무뚝뚝했던 내가 견딜 수 없이 후회스럽다.
남편은 시아버지를 아주 많이 닮았다. 외모도, 식습관도, 돈을 쓰는 방식도. 시아버지는 내 남편에게 참 좋은 걸 많이 물려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