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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제인 Dec 24. 2022

안녕, 주정뱅이

나 긴장한 거 맞니. Hidden창

#1. 아빠의 술


잠든 내 볼 위로 따뜻한 살갗이 알코올 냄새와 함께 왔다 사라진다. 아빠다.


"아이 참, 애 자는데 뭐해요. 얼른 나와요."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남편이 못마땅한 엄마 목소리.


잠이 살짝 깼다. 바깥소리가 마치 꿈인 듯, 웅웅대는 스피커 소리처럼 한 꺼풀 희미해져 들려온다. 술이란 놈은 항상 웬수야. 한 옥타브 올라간 엄마 목소리로 술은 나쁜 거라고 배웠다.



#2. 모모의 술


여러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6명 이상친밀한 대화가 필요한 순간은 나를 긴장시킨다. 6명이라는 숫자는 개인과 단체 모임을 가르는 임계치 같은 거다. 5명 이하의 소모임은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다. 서로 나누는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 있고, 그에 걸맞은 리액션도 자연스럽다. 원래 얼마나 친했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자리가 끝나면 예외 없이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다. 내가 5명 이하의 소모임을 선호하는 이유다.


반면에 단체 모임에서는 개인 간 사사로운 이야기 대신 여럿 중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는 몇몇에 의해 그 자리의 색깔이 결정되는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말할 타이밍을 잡지 못하거나, 맥을 끊는 갑툭튀가 될까 입밖에 내지 못한 채 그냥 넘기기도 한다.  와중에 케미가 잘 맞는 친구를 찾는 이도 분명 있을 터이나 안타깝게도 나는 보통 그렇지 못하다. 아마도 분위기를 과도하게 살피는 민감한 성격 탓이리라. 이 집에 들어갈까, 저 집에 들어갈까 망설이다 끝내는 길 모퉁이에 혼자 남기를 선택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난 사무치게 더 외로워지고 만다.



이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지원군이 바로 "술"이다. 약간 말이 꼬이고 주제에 벗어나도 스스로 따져 묻지 않는 상태가 된다. 거창한 뭔가가 필요한 게 아니다. 맥주는 한 캔, 소주는 2잔, 막걸리는 반 병, 위스키는 1잔이면 된다. 그 정도 알콜이 내 긴장을 풀어주는 마중물이다. 


술 한 잔 적당한 취기로 감싸여진 세상은 마치 도수가 안 맞는 안경을 쓴 것처럼 모든 게 약간은 두루뭉술해 보인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따져 묻지 않아도, 나랑은 좀 달라도, 같이 있는 것 자체로 앞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은 더 사랑스럽고 예쁘다.


난 왠지 몰라도
술 한잔 한 네가 더 좋더라.


회사 동료 중에 누군가 한 말이다.


그 모임이 너무 좋거나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할수록 상대의 시선을 의식하는 자의식이 발동된다. 그럴 때마다 난 매우 긴장한다. 긴장했다는 싸인은 꽤 명확하다. 일단 소화가 잘 안 되고 배에 가스가 찬다. 그럴 때 술로 자의식이라는 나사를 조금만 풀면 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조금  나다워진다.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나를 덮고 있던 껍질이 한 꺼풀 가벼워진다. 긴장했을 때 나한테 가장 필요한 게 술 한잔 할까? 하는 말 한마디였을지도 모르겠다.




#3. 주정뱅이의 술


몸은 오슬오슬 떨렸지만 속은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꽉 조였던 나사가 돌돌 풀리면서 유쾌하고 나른한 생명감이 충만해졌다.

- 안녕, 주정뱅이 봄밤 中 -

책에 실린 7개의 편소설 속 술은 다양한 의미로 등장한다. 인간의 여러 가지 삶의 모습이 술과 교묘하게 얽혀있다.


연인과의 애틋한 과거를 회상하는 매개체가 되고, 오랜만에 만난 학교 동창들을 다시 뭉치게도 한다. 이혼으로 가족과 삶을 몽땅 빼앗기고 알콜이 유일한 낙이 된 중독자의 이야기도, 마치 섬광처럼 현실에 없는 누군가와 술 한 잔 추억을 가진 자의 이야기도 있다. 세상 사람들 사는 모습이 모두 다르듯이 그 개수만큼 각자 가진 술의 소회가 있을 것이다. 술을 잘 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4. 술 친구


모두들 술 약속이 많은 연말이다. 지인 중 한 명은 이미 속이 너덜 해질 대로 너덜 해졌다며 자기가 살아있는지 종종 확인해 달란다. 나에게 올해 연말은 의미 없는 연말 회식 자리가 없어져 모임 횟수는 크게 줄었지만 좀 더 즐거운 술친구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가벼운 반주가 필요할 때는 몇 주 전 이마트 행사 때 반 값으로 쟁여둔 와인을 마신다. 다행히도 와인 맛 차이를 잘 모르는 저질 입맛이라 이마저도 나에겐 호강이다. 톡 쏘는 청량함이 생각날 때는 십장생 막걸리다. 막걸리는 대학 동아리 활동에서 이 술로 신고식을 호되게 당한 이후 입에도 대지 않았었는데 올해 최고로 애정한 주종이 되었다. 취하고 싶을 때는 비싼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시거나, 저렴이 위스키를 하이볼로 만들어 마신다. 좀 많이 마셔도 다음 날 머리가 개운해서 좋다. 사람이 많을 때는 소주와 맥주가 진리다. 시작은 소맥 몇 잔으로 하고 배가 좀 부르다 싶으면 소주로 바꾼다. 한마디로 가성비가 좋다. 늘 먹던 술 말고 새로운 기분을 내고 싶을 때는 청하나 오십세주(백세주와 소주를 반반 섞은 것)가 제격이다.


다음 주 모임에는  어떤 주종을 골라볼까.

좋은 술과 좋은 사람.

절대 실패할 수 없는 꿀 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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