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영어만은 학습이 아니라 살아있는 언어로 흥미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는데 엄마의 영어 교육철학의 K.O패였다.
부모는 아이성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간단한 영어 단어도 잘 읽지 못하는 아이를 맞닥뜨리자, 이제서야 아이의 지난 초등 4년을 복기해 본다. 영어학원에서는 아이 실력에 대한 한 치의 의심 없이 정해진 커리큘럼과 매뉴얼대로정직하게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일하는 엄마는 학원에서 보내주는 출석 문자로오늘도 영어를 하는구나 생각한다. 교재가 다음 단계로바뀔 때마다 선생님이 보내주는 테스트 결과는 아이의 학습지표로 어떤 의미도 없는 그냥 숫자일 뿐이었다. 뭐라도 하고 있다며 안심했던 엄마와, 학원의 매뉴얼이 찍어낸 당연한 결과였다. 이제 와서 학원 탓을 해 뭐 하리.
아이의 학습에 무관심한 혹은 무관심 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을 가진 아이와 학원의 조합은 강력하다. 역설적이게도 아이를 철저히 관리하는 부모일수록 아이를 위해 학원을 더 괴롭히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학원 고객인 대다수의 부모가 학습 가이드를 직접 하기 어려운 데다,나 같은 맞벌이 가정은 부족한 시간의 죄책감을 지우기에학원이 가장 쉬운 해결책인 거였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세상에서 가장 쉬운 문제라니까. - 더 글로리 하도영 대사 중.
공부든 운동이든, 뭔가를 잘하는 아이 뒤에는 절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부모의 열정이 있다. 초등학생은 이직 포기하기 이르잖아(희망회로 돌리기). 이제라도 학원 전기세 그만 내주고 돈으로 살 수 없는 엄마의 열정을 쏟아볼까. 그렇게 나는 겁 없이 홈스쿨링 하는 엄마가 되었다.
하루에 4시간씩 아이를 붙잡고 공부를 시킨다. 학원이 제일 싫다 했던 아이는, 이제는 제발 학원 좀 보내달라고 성화다.
후훗. 그래. 이 정도면 나 제대로 하고 있는 것 맞군.
그도 그럴 것이, 내 아이지만 그 애 특성상 시간만 때우다 왔을 게 뻔하다는 걸 안다. 다니던 학원들은 교사 직강이 아닌 동영상 강의 보고 따라 읽고 대충 숙제만 해가면 되는 시스템이었으니까.
어제는 최소공배수 개념으로 응용문제를 풀고 있었다. 문제 자체가 이해가 안 되다기에, 이 문장은 공배수를 구하라는 말이고, 이 문장은 그것 중에 조건을 만족하는 수만 골라서 쓰라는 거야.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10분이 지나도 끄적거리고만 있는 폼을 보아하니, 이미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품은 모양새다. 갑자기 빡쳐서 이럴 거면 하지 마! 하며 책을 빼앗고 나와버렸다. 거실에 앉아서 미어캣이 적의 동태를 살피듯이 아이 방에서 나는 소리에 힘껏 귀를 기울인다. 부스럭부스럭. 그래. 이 정도에 굴할 네가 아니지. 아마도 하기 싫었는데 잘 됐다. 하면서 손장난이나 하고 있을 거야. 아.. 마저 하긴 해야 하는데 이제라도 가서 다시 하자고 해볼까. 아니야. 엄마 존심이 있지. 아이한테 넘어가면 안 된다. 근데 난 왜 갑자기 이렇게 화가 난거지? 진짜 몰라서 그러고 있는 거였으면 어쩌지. 마음을 비우려 해 보지만 온갖 생각을 하다 결국엔 지나가는 척하며 슬쩍 아이 방을 들여다본다. 아이는 책상에 물건을 죄다 들어낸 채 벅벅 닦고 있다. 어쩜. 스트레스받으면 청소하는 게 이런 것까지 나랑 닮았니. 마음이 짠하다. 너도 힘들 텐데, 내 눈치 살피며 공부는 싫지만 엄마랑 하는 건 좋다면서 웃는 딸이다.
예상했겠지만 결국 우리는 여섯 시간 만에 그날 공부 분량을 마쳤다.
어제는 최소공배수만 문제가 아니고 맞춤법도 우리를 지독히도 괴롭혔는데, 아이고, 우리 딸 이제 5학년인데 맞춤법도 이리 틀려서 우짜믄 좋노. 하며 한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자 아이가 눈물이 서서히 차오른 눈으로 천천히 내 눈을 바라보더니, 일순간 환히 웃는 얼굴로 변해 망설임 없이 말했다.
엄마, 그런다고 내가 못하는 맞춤법을 갑자기 잘할 수 있는 거는 아니잖아 ㅋㅋㅋㅋ
본인도 못하는 걸 알아 서글프지만 해보겠다는 마음이
그 눈물과 웃음에 동시에 담겨있다. 띠띠띠. 감정이 마비된 듯 저릿하다. 울컥. 울컥. 울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