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짓다 만 6층 높이의 하얀 정신병원 뒤편 나즈막한 언덕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학교를 소유한 사립 재단이 재정난으로 공사를 중단했다는 소문만 있었을 뿐, 선배들 시절부터 내가 졸업하기까지 으스스한 모습 그대로였다. 언덕을 끝까지 오르면 같은 이사장이 소유한 상업고등학교가 있다. 언덕 중턱엔 운동장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체육 활동을 하러 꼭대기에 있는 상고로 올라가곤 했다. 학교 화장실에서 내다보면 하얀 건물 사이로 6차선 대로와 맞은편 대형마트가 빼꼼히 보인다. 쉬는 시간마다 나는 작은 화장실 창문 너머로 대형마트를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인파와 차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었다. 출소할 날만 꼬박 기다리는 수감자의 심정으로.
학교 내부도 버려진 하얀 건물처럼 삭막했다. 천정은 보통 건물의 두 배 넘게 높았고, 차가운 도트무늬 타일 바닥에 겨울이면 냉기가 가득 피어올라 살색 스타킹을 신어야만 하는 학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학교는 겨울에 살색 스타킹을 신는 유일한 고등학교였다.한 겨울에 피서를 온 듯, 보는 사람이 더 우리를 걱정했다. 유난히 춥던 어느 날, 버스 안에서 앞에 앉은 할머니가 내 다리를 쓰윽 만져 스타킹을 신은 게 맞는지 확인할 정도였다.
위아래 새파란 겨울 교복 색깔 덕분에, 근처 남고 학생들은 우리를 스머프라고 불렀다. 추위 앞에 장사 없다고 했나. 몇몇은 투명한 살색 스타킹 대신에 할머니들이 신을 법한 두껍고 불투명한 제품을 다리에 장착했다. 파란 교복에 할머니 스타킹. 그럼에도 그 스머프들이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다녔던 건, 서울대 법대에 몇 년 연속 입학시킨 명문고였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님의 기대에 따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 고등학교에 들어왔다. 그 학교에서 전교 1등, 전국에서 몇 등 안에 드는 수재였던 한 학년 선배 엄친딸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 엄친딸의 뒤를 밟길 바라는 부모님의 기대를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엄청난 학구열과 빡세기로 소문난 사립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 나는 안타깝게도 고등학교 3년 동안 공부 말고는 아무런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줄곧 거기서 시험 성적으로 나를 증명하는데 충실했다.
그 일이 있었던 건, 시험을 며칠 앞둔 고3 교실에서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그날, 목소리 큰 누구 때문에 한껏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시험이 며칠 남지 않은 데다 최근에 자리를 바꾸면서 뭉쳐진 시끄러운 무리들의 근처에 앉게 되어꽤나 거슬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 생각하면 꽤나 구차한 방법이지만 나는 담임선생님께 자리를 바꿔달라는 민원을 넣었다.자리 배치가 학습 분위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고.
우리 고3 우리 담임은 깊게 패인 이마 주름과 부리부리한 눈매를가진, 고3 교실만 전담 마크해 명문대 진학률을 책임지는 학주였다. 다들 무서워하는 학주였지만 난 담임이 수업 시간에 허허 웃을 때 그 주름이 다른 모양이 되는 걸 보는 게 좋았다. 화가 나 눈썹을 치켜올릴 때의 카리스마와 그 힘을 우리 반을 지키는데 쓴다는 두 가지 느낌이 모두 좋았다. 나의 민원으로 인해 눈썹이 그 어느 때보다 치켜 올라간 고통스러웠던 그날의 기억을 뺀다면 말이다.
지금 이 시점에 면학 분위기가 이 꼴이면어떡하느냐부터 해서, 분위기를 망치는 주범이 누군지, 끝도 없는 잔소리와 불호령이 고3 교실을 싸늘하게 정지시켰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고작 자리 배치를 다시 하는 정도로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일 이후,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당시 우리 반에 왕따를 당하던 아이가 민원을 넣은 범인으로 오해를 사게 된 것이다. 그 아이는 목소리 큰 그 무리와 친했던 아이 중 한 명이었는데,어떤 이유로 미운털이 박혀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본인들에게 앙심을 품었을 거라는 짐작이 더해져 완벽한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그때 어떻게 했어야 그 아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었을까.
사실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했다.
졸업하는 날, 그 아이와 마지막으로 인사하며 계단에서 반대방향으로 스쳐갈 때의 느낌이 아직도 슬로모션으로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최소한그때 미안하다고 했어야 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그 날의 복잡 미묘한 감정의 실체를 꺼내어본다. 생각만으로도 고통스러웠지만 한번은 해야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난, 누군가는 시끄러워서 불편할 수 있다는생각을 그 무리에게 표현하는 것이 우주의 섭리를 해명하는 것처럼 막막했다. 불편하다고 이야기했을 때 돌아올 그들의 반응을 겁냈었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그 앞에서 말할 용기가 없었다. 욕은 차라리 눈앞에서 하라고 했던가. 불편한 말을 안 불편하게 할 줄 아는 것. 그것도 연습이라는 사실을 그 시절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여전히 어렵다.
그 친구를 생각하면 아직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아무도 몰랐겠지만 스스로에게 지운 최초의 주홍글씨인 것 같다.
지금은 어디서 사는지, 뭘 하는지도 모르는데 미안하다는 이야기도 할 수 없는 안타까움 때문인 것 같다. 그 아이가 겪었을 고통에 나도 관여했을 거라는 죄책감 때문인 것 같다. 그게 나였다고 말하지 못한 후회인 것 같다.
20년 가까이 지난 일인데도 아직도 이토록 생생히 마음에 품고 있는 걸 보면 어쩌면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때의 나를 내가 용서하는 것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