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15년 다니면서 여섯 분의 팀장님을 만났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임원을 만났다. 임원은 한결같이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그대였지만 유난히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 지금은 다른 조직으로 가셨지만 한 때 우리 조직 담당을 하셨던 전무님이다. 매주 '사람통신'이라는 이름으로 500명이 넘는 구성원에게 이메일로 다소 철학적이고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하셨다. 기업문화라고 하기엔 다소 개인적이고, 개인적이라고 하기엔 조직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글들이었다. 당시 나는 그 글들에 푹 빠져지냈다. 그분의 철학이 너무 좋았고, 일에 대한 고찰이 새로웠고, 익숙한 것을 비틀어 새로운 생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그 영향력을 실로 존경했다.
그분은 리더의 이타성으로 협업의 3단계를 항상 강조하셨다.
- 적극적 협업: 상대가 요청하면 도와줌
- 공격적 협업: 상대가 요청하지 않아도 기꺼이 도와줌
- 침략적 협업: 도와주는지 모르게 도와줌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정신이 첫 번째다. 두 번째는 배려다. 세 번째는? 상대가 도움을 받고 있는지조차도 모르게 도와주는 것.
그런 게 가능하긴 한 걸까? 더구나 침략적 협업으로 자기가 원하는 걸 얻어낸다는 것이 가능한가? 의도가 없는 도움을 주지만 결론적으로는 도움을 받게 되는. 완벽한 이타성에 대한 정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침략적 협업을 하는 사람은 없다. 상대방이 철저하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서 내가 모르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럼 질문을 바꿔본다.
의도가 없는 도움을 받는 자는 상대방의 의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완벽한 이타주의자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마치 어떤 종교 같은 느낌이 없지 않다. 슬프지만 그게 현실이다.
나는 그 '사람통신' 메시지를종교적인 이타성이 아니라 조직에 도움이 되는 이타성의 의미로 해석한다. 조직이 유기적으로 잘 짜여져 있다면,각 구성원이 하는 일은 개인의 선의에 크게 의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개별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일을 하다 보면 저절로 조직에 득이 되는 방향으로 굴러갈 것이다. 연봉과 권한의 위력에 눈멀지 않은 자가 과연 있을까마는 만약 그런 리더가 있다면 이타성을 가진 실력 좋은 이에게 후계구도를 물려주고 떠날 것이다. 이타성이 있으면서도 내 밥그릇 빼앗기지 않고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그립다.
나는 첫째 아이 친구를 주 3회 무상으로 수학 과외를 해주고 있다. 맑은 하늘에 불현듯 소나기 맞듯 과외를 시작하게 된 날을 기억한다. 동갑내기 딸들의 수학 고민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나의 홈스쿨링 경험담을 거쳐 그렇다면 내가 한번 봐주겠다는 제안까지 이어졌다. 어쩌다 결론이 그렇게 흘러갔는지는 모르겠다. 나와 타인의 대화는 늘 새롭고 예측할 수 없어서 재미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야기를 막상 꺼내놓고도 내심 조심스러웠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호의를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되었다. 돈과 노동력의 교환이 어쩌면 가장 깔끔한 거래가 아닌가.
다행히 아이 공부를 매개로 두 엄마와 두 아이는 부쩍 자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관계가 좋아질수록 두려움도 생긴다. 결혼사유가 이혼사유라는 말도 있듯이 공부가 오히려 민감한 소재로 변할 수도 있으니까.
이런 내 마음을 글감으로 써보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전무님의 침략적 협업 마인드가 생각났다. 나의 선의는 아무런 의도가 없으니, 침략적 협업이란 게 실재한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나비효과를 기대한다면 그것조차 의도라고 봐야 하는 건가. 아무튼 확실한 건 난 지금 눈을 가린 경주마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회적인 잣대로 치열했던 일상을 내려놓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