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 앞에서 바쁘게 손을 놀리는 내 자리 주위로 대여섯의 사람들이 나의 손과 모니터를 번갈아 쳐다보며 웅성거리고 있다. 그들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분주하게 내게 질문하거나 지시하며, 다른 누군가에게 보고하고 있다. 제품을 생산하는 공정의 전산 시스템이 먹통이 되어 생산차질이 생기고 있는 상황이다. 회사의매출을 시간 단위로 환산하면 자그마치 몇억. 비상상황이다. 빠르게 시스템 부하요소를 확인하고 제거해 정상화시키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
상황이 다급한 만큼 움직이는 손도 마음도 긴장 상태이다. 하지만 손이 바쁜 실무자는 혼자다. 모두들 내 주위를 둘러싼 채 각자 원인에 대해 짐작하며 이렇게 해봐라, 또는 저렇게 해봐라 하는 지시가 태반이다. 그들의 지시사항을 받아들일지, 내 손과 머리를 따라갈지, 빠르게 판단해서 커맨드를 입력해야 하는 동시에, 원인 파악을 지시하는 최고상관에게 보고할 목적으로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한 질문에도 답해야 한다. 입으로만 일하는 사람들 속에서 잔뜩 긴장한 채 혼자 손이 분주했던 대리 시절 내 모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리더들의 훈수는 폭포수처럼 실무자에게 쏟아졌다. 그들은 오히려 위급한 상황에서 집중력을 분산시켰고,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 그래서 사고 상황에서 리더의 역할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었다. 조치도 실무자 몫이었고, 원인파악과 재발대책도 실무자 몫처럼 느껴졌었다.
생각해 보면 직장생활 중에 좋은 의사결정을 경험해 본 적이 많지 않다. 내 기억에 그들은 보통 실무적인 것에 동떨어진 질문을 자주 했다. 위급상황은 실무자에게 맡기고, 상황이 종료된 이후부터 나서서 온갖 숙제를 떠 안겼다. 내가 중간관리자가 되었을 때 그들에게 느꼈던 불합리를 반복하는 것 같아 스스로 조바심을 냈다. 사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내가 보던 선배들이 하던 대로 쓸데없는 질문이나 하고 숙제나 안겨주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소방 지휘관이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은 보다 긴박하다. 사람의 생명이 달려있는 결정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사람의 생명을 두고 최선의 선택을 하는 법을 연구하고 현장을 뛰는 베테랑 소방관이다. 사고상황을 가정해서 지휘관의 의사결정 능력을 테스트하는 모의평가 장면을 읽으면서 나도 그들 머릿속에 들어앉은 듯 압박감을 느꼈다. 동시에 오래된 시스템 장애 상황이 데자뷰처럼 겹쳐지면서 숨이 가빠져 왔다.
다 알면서도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이유는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단연 최악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은 당연히 사람이다. 실수할지도 모른다는초조함과 결과에 따라 비난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은 당연하다. 그러나 엄청난 스트레스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의사결정의 함정을 알고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고 이 책은 말한다. 답은 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