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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제인 Jul 25. 2023

나는 당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없다

엄마의 옥수수다.

엄마의 깍두기, 엄마의 호박, 엄마의 오이,

그리고 사랑.


여기서도 다 사 먹을 수 있는 야채들이

신문지로 꼭꼭 둘러싸여 집 앞으로 배달됐다.

택배비가 더 나와, 엄마. 해보지만

요즘 비 많이 와서 야채 비싸, 하며

어김없이 집 앞에 당도한 그 야채들.

엄마의 시골 마당에서 자란 못생긴 그것들.




나는 엄마가 그곳에 터를 잡는 게 싫었다.

아이들이 어렸고 할머니의 손이 필요했다.

손주를 키우는 것까지 할머니의 몫이 될 수도 있었다.

엄마는 엄마 자신을 위해 우리와의 거리를 원했다.

나는 엄마와의 거리를 허용했다.

우리는 가까울수록 서로 상처를 주고받았다.

엄마는 나의 아킬레스건이다.


서양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기반에 두고 설명한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것이고, 아버지를 죽이고 나아가는 것이 그의 성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여성이 그의 어머니를 통해 성장하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머니에게 속했다가 어머니를 떠나고, 어머니에게로 되돌아간다. 여성으로서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고, 어머니가 되거나, 모성애에 준하는 사랑을 체험하면서 어머니의 삶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 창문너머 어렴풋이, 신유진


엄마가 그곳에 정착한 지 7년쯤 되었을까.

엄마는 그곳으로 간 결정을 후회한다.

굳이 자식들에게 이야기하기 뭣한 것들이 많아졌다.

늙은 부모의 일상은 자식들에게 공감받지 못한다.

엄마는 지금 외롭다.


엄마의 얼굴은 나에게 과거의 잔상으로 남아있다.

어느 날 문득 바라보면

내가 아는 엄마의 얼굴이 아니라서 깜짝 놀라기도 하고.

4시간이라는 물리적인 거리가 쌓이고 쌓여,

내가 아직 '지금의 엄마'에게 당도하지 못한 것처럼.




분명한 건 우리는 앞으로도

가까운 곳에서 함께 살 수는 없을 거라는 것이다.


엄마는 그곳에 생의 터전이 있고

나는 이곳에 나의 인생이 있다.

내가 아닌 내 가족의 인생이다.


엄마의 외로움을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가 없다.


이런 얘기할 사람이 도저히 없어서 너한테 전화했고마. 

하는 엄마의 하소연을 한 시간 가까이 들으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음에.

내가 엄마의 인생에 끼어들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음에.


그 아픔을 보듬어주다가는

고슴도치 가시에 찔리듯

내가 더 피를 쏟을 것임을 알기에.

후회할 줄 알면서도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


그저 무심한 딸로 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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