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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moair Nov 17. 2019

고립, 기다림, 연대, 망고 & 옥수수

- 양곤 가는 길

므락우에서 양곤으로 가는 버스를 탄 것은 7월 13일 오전 9시. 약 24시간 걸려서 다음날 아침 양곤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그런데 실제 양곤에 도착한 것은 40시간 후인 15일 0시 30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0713 9:00| 떠나는 날에도 무락우에는 비가 내렸다. 여행 에이전시를 겸하고 있는 킹덤 카페의 주인 마웅은 9시에 도착해야 할 버스가 늦어지는 것은 비 때문이라고 했다. 이 때 이 말을 흘려듣지 말았어야 했다. 이 비로 인해 어떤 문제가 생길지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버스 안은 이미 만석이었는데, 얼핏 봐도 외국인은 나 혼자였다. 내 좌석은 취업하기 위해 말레이시아로 가는 스물한 살 청년 도지 옆이었다.     

 

|0713 15:00| 빗속을 달리던 버스는 점심시간에 한 번 쉬고 오후 3시쯤 다시 휴게소에 섰다. 화장실에 가는 시간을 주는 건가 싶었는데, 운전기사는 주저 않아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2시간이 지났다. 이런 패턴으로 운전해서 24시간 후에 양곤에 도착하는 거라면 한국에서는 8시간이면 충분하겠다 싶었다. 여유 있게 식사를 마친 그들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비는 그친 상태였다. ‘좀 갑시다. 기사 양반!’

30분 즈음 달렸을까? 갑자기 버스가 섰다. 앞에 큰 물웅덩이가 있었던 것이다. 포스 넘치는 운전기사, 뒤에서 자고 있던 예비운전기사, 인간 깜박이부터 승객들 관리 등 전천후 역할을 하는 보조기사 둘이 신속하게 물의 깊이를 체크하고 대책을 강구했다. 이미 도로 옆에는 정차 중인 버스가 여럿 있었다. 그런데 우리 버스는 이 웅덩이를 가뿐히 통과했다. 이 때부터 나를 포함한 모든 승객들은 운전기사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또다시 장애물이 나타났다. 이번 물웅덩이는 제법 컸다. 그런데 운전기사는 엑셀레이터를 밟는 게 아니라 아예 시동을 꺼버렸다. 아직 어둠이 내리지 않은 오후 6시 무렵이었다. 물이 빠지길 기다리는 건가? 누가 복구 작업하러 오나? 차리라 왔던 길로 돌아가는 게 더 빠르지 않나? 물이 빠지다가도 또 비가 내리면?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시동을 껐다는 것은 에어컨 작동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버스 안은 찜통이었다. 그래도 승객들은 금방 복구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누구도 항의를 하거나 하다못해 한숨도 내쉬지 않았다. 대신 밖에 나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하고 안에서 휴대폰 음악을 크게 틀어놓기도 했다. 나는 긴장한 탓인지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화장실은 가고 싶었다.      


|0714 00:00| 밤 12시, 다시 시동이 걸렸다. 물이 빠지기 시작하자 트럭들이 선두에 서서 물 위를 헤쳐 나갔다. 그러나 10m 쯤 앞으로 나간 게 전부였다. 운전기사가 다시 시동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승객들은 또 그러려니 했다. 도지는 비가 많이 내려서 그런 거라며 자기 잘못인 냥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비가 내리면 도로 사정이 나빠진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산악지대가 많고 비포장도로라 움푹 파이는 경우가 많고 비가 많이 내릴 경우 산사태도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만달레이에서 므락우로 갈 때도 도로 사정이 안 좋으니 버스보다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해서 만달레이-양곤-시트웨까지는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면서 이동했고, 시트웨에서 므락우까지는 배를 타고 들어갔었다. 그래도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기다려야 하다니.      


|0714 05:00|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지새우는 동안 버스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동이 트듯, 기다리면 버스는 움직이는 구나.’ ‘얼른 휴게소에 내려서 화장실에 가고 싶다.’ 잠꼬대처럼 우물거리다 깨어보니 날이 밝아 오고 있었고, 버스는 또 시동이 꺼진 상태였다. 

판단도 포기도 행동도 빠른 운전기사는 버스에서 내려 길가에서 양치를 하기 시작했다. 장기전이 될 것이라는 무언의 메시지다. 승객들도 하나둘씩 버스 밖으로 나가 양치를 했다. 버스 좌석 앞주머니에는 일회용 치약세트와 물티슈, 그리고 물이 들어 있다. 나도 무리에 섞여 양치를 하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나의 손을 잡더니 ‘쉬?’하고 말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 수풀로 들어가 참고 참았던 볼일을 봤다. 그녀는 걱정 말라는 듯 나를 향해 당당히 서 있었다. 나도 그녀가 볼일을 마칠 때까지 망을 봐주었다. 여성연대가 결성됐으니 이제 두려울 게 없었고, 급한 일을 처리했으니 조급할 것도 없었다.      


|0714 09:00| 버스는 오전 9시가 넘어서 출발했다. 므락우에서 출발한 지 24시간 만이다. 도지를 비롯한 몇몇이 버스 행렬 맨 앞까지 다녀왔는데, 산사태가 나면서 흙이 무너져 내렸고 나무들이 도로를 점거해 포크레인이 와서 긴급하게 길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도지는 오늘 저녁 양곤에서 말레이시아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그런데 그에게서 조급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양곤까지 얼마나 걸릴까? 제 시간에 비행기 탈 수 있을 거 같아?” 자기는 모른다며 웃는다. 이후의 길도 순탄치 않았다. 비는 계속 내리고 나무가 꺾이거나 뿌리 채 뽑혀서 쓰러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들도 줄 서 있기는 마찬가지다.      


|0714 12:00| 모처럼 열심히 달리던 버스가 멈춰 선 것은 점심을 먹기 위해서다. 사실 느릿느릿 아슬아슬 가고 있는 버스에서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킹덤 카페에서 싸준 볶음밥과 찰떡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있었다. 점심을 먹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뒷좌석에 있던 한 청년이 다가오더니 왜 아무것도 안 먹냐고, 아픈 것은 아니냐고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는 의과대 학생이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도 한 마디씩 했다. 내색은 안 해도 버스에 탄 사람들 모두 나를 걱정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도지가 망고를 권했다. 그런데 동남아인들은 주로 설익은 망고를 스틱처럼 잘라서 먹는 것을 좋아한다. 불안하긴 했지만 승객들이 시선이 느껴졌기에 망고 두 조각을 집어 들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배가 스르르 아프더니 자꾸만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게 만들었다. 빈속에 설익은 데다 껍질 채인 과일을 먹었으니 당연한 생리적 반응이다. 다행히 버스는 2~3시간마다 휴게소에 들렀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화장실로 달려가기를 반복했다.      


|0714 18:00| 사실 휴게소에는 삶은 달걀, 망고, 삶은 옥수수, 찰떡 등 맛있는 것들이 많다. 여성연대 동지가 옥수수를 사서 나에게 한 덩이를 내밀었다. 아직 배가 아팠지만 거절하면 성의를 무시하는 것 같아 받고 입에 넣었다. 지금까지 먹었던 옥수수 중에 가장 맛났다. 또 한 덩이가 내 손에 쥐어지는 사이, 다른 언니들이 우리 주위에 모여들었다. 나도 언니들처럼 쪼그려 앉아 그들의 말을 듣고 따라했다. 그 때 알았다.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지만 웃을 때는 똑같다는 것을.       


|0715 00:30| 버스가 양곤의 아웅 밍갈라 터미널에 도착했다. 여성연대 회원들과  안았다. 옆자리 동지인 도지와도 서로 행운을 빌며 헤어졌다.      


그동안 안 되면 되게 하라고 배웠다

웅덩이의 물이 고여 있으면 빨리 퍼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물웅덩이 앞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보니

순리대로물 흐르듯이 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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