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직 그리고 도서관
도서관에는 무척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옵니다. 주말에는 아이의 손을 잡고 와서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도 있어요. 어린이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보거나 만화책도 읽고, 날이 좋을 때는 도서관 주변을 산책하기도 합니다. 주중에 자주 출몰하는 사람들은 주말에 쉬는지 나오지 않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주중과 주말에 보이는 얼굴들이 다릅니다.
도서관에 자주 머물다 보니 마주치는 사람은 거의 같은 사람들이에요. 젊은 친구들은 공부해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으니,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도 깁니다. 중년 여성들은 자격증 공부를 하는 분들이 눈에 많이 띄고요. 어느 날 갑자기 눈에 안 보이기 시작하면 ‘시험에 붙었나’ 하며 지레짐작 박수를 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주인공은 바로 저처럼 퇴직한 사람들이에요. 도서관마다 편차가 있으니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우리 동네 도서관은 그렇습니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신문을 읽는 사람,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사람, 그저 멍하게 의자에 기대있는 사람, 자는 사람, 정말 천차만별이죠.
한때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기 몫을 채웠을 사람들입니다. 일밖에 모르고 지낸 사람일수록 퇴직하고 나면 늘어난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막막해합니다. 관계 맺음이 서툴기도 해서 사람 많은 곳을 피하려고도 하죠. 여러 이유로 도서관에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그리고 저에게는 도서관이 ‘쉼표’ 같은 공간인지도 모르겠어요. 인생 2막을 시작하기 위한 출발점이 되는 거죠.
윌리는 예순 살이 넘었고 옷차림이 점잖다. 무대를 지나 현관으로 오는 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문을 따고 부엌으로 들어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짐을 내려놓고, 아픈 손바닥을 만진다. 한숨 같은 소리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데, 아마 “아이고, 아이고.” 정도의 말인 듯하다. (중략)
윌리 : (오른쪽으로 가며) 우습지 않아? 고속도로 여행, 기차 여행, 수많은 약속, 오랜 세월, 그런 것들 다 거쳐서 결국엔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가치 있는 인생이 되었으니 말이야.
찰리 : 윌리, 어느 누구에게도 죽는 게 더 나은 경우는 없네.
(잠시 뒤) 내 말 듣고 있어?
아서 밀러(저)/강유나(역), 2009,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세일즈맨인 윌리는 36년 동안 일했던 회사에서 퇴직이 아닌 해고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얼마나 앞이 캄캄했을까요. 사실 윌리는 허세를 부리기도 했고 허풍쟁이이기도 했습니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세일즈맨으로서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방어기제였는지도 모르죠. 아무리 아름다운 허풍 속의 과거였더라도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입니다. 윌리는 보험료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완벽하게 독립하지 못한 아들들을 앞에 두고, 그를 평생 지탱해 줬던 가치들이 얼마나 허무한 것이었는지 현실에서 아프게 마주합니다. 윌리는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점점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윌리의 상황은 개인적 성격 결함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내면세계에는 누구나 성실하게 일하면 언젠가 보상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죠. 그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자신을 다시 재정의할 개념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그동안 해 왔던 일을 내려놓은 후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성취나 보상이 사라진 자리에 나의 가치는 무엇으로 지탱할 것인가. 『세일즈맨의 죽음』은 이러한 질문을 한 개인의 비극으로 남겨두지 않고 우리 모두의 삶을 비추는 거울로 확장합니다.
무대 위의 윌리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도서관에서 마주치는 퇴직자들의 얼굴과 겹쳐 보일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제대로 나이 드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고, 퇴직 후의 삶을 미리 완벽하게 준비하는 사람도 드물죠. 그래서 많은 퇴직자들이 역할 상실과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방황을 하게 됩니다. 오늘도 도서관 내부를 어슬렁거리다 한쪽에서 두 다리를 쭉 뻗고 안방처럼 주무시는 분을 봤습니다. 너무 보기 민망했어요. 복잡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집이 더 편안할 텐데, 집이 아닌 도서관 구석에 숨어서 자야 하는 그의 사정. 공공 공간으로서 규칙을 지키고 쾌적한 환경을 수비해야 하는 도서관의 사정. 앞으로도 도서관에는 퇴직한 사람들이 잃어버린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해 몰려들지도 모릅니다. 목적 없이 도서관을 떠도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개인은 퇴직 전에 알찬 미래를 설계해야 하고, 도서관에서는 적극적으로 퇴직자 대상의 프로그램이라도 개발해야 하지 않을까요. 도서관이 퇴직자들에게 단순한 쉼표가 아니라 인생 2막을 어떻게 써 내려갈지 안내하는 이정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